거짓으로 가득한 미테랑의 허위 신화

탈식민주의자라는 잘못된 미화

2024-11-29     토마 델통브 | 저널리스트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이 평생 자신의 과거를 얼마나 능숙하게 위장해 왔는지 아카이브를 살펴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1930년대 청년 시절의 민족주의부터 1990년대 르완다 투치족 집단 학살에 대한 책임, 그리고 불륜과 숨겨진 딸, 암에 이르기까지 숨기려 했던 것들이 밝혀지는 데 수년, 아니 수십 년이 걸렸다.

그런데도 프랑스 대통령으로서의 재임 기간(1981~ 1995)이 유독 길었던 그의 경력 중에는 이상하게도 은폐된 한 묶음이 더 남아 있다. 그것은 그의 제4공화국 시절의 정치 경력이다. 전기 작가들은 1947년부터 1957년 사이에 11개 내각에서 다양한 장관직을 맡아 일했던 니에브르 출신 젊은 의원(1946) 미테랑의 야망을 강조해 왔다. 또한 역사가들은 그가 알제리 전쟁(1954~1962) 동안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 내각의 내무부 장관(1954~1955), 그리고 기 몰레 내각의 법무부 장관(1956~1957) 등으로 일하면서 취했던 행적에 대해 연구했다. 그가 남긴 “알제리는 프랑스다!”라는 유명한 발언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프랑스 해외영토부 장관 시절의 흑역사

그러나 이 시기에 미테랑의 구체적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식민지 민중들의 정치적·사회적 요구가 급증했던 터라 그가 추구했던 정책의 본질이 교묘하게 은폐되었던 까닭이다. 이후 수십 년간 그는 진정한 좌파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구축을 위해 노력했으며, 덕분에 反식민주의자라는 이미지와 함께 ‘탈(脫)식민주의자’라는 끈질긴 신화를 만들어냈다.

이 신화의 핵심은 그가 1950년 전후 프랑스 해외령(outre-mer) 장관 시절에 남긴 왜곡된 이야기에 근거한다. 이 전설에 따르면, 독립 관련 아프리카와 프랑스 간의 접촉이 활발했던 시기에 해외령 장관직을 맡은 젊은 미테랑은 당시 코트디부아르의 국회의원이자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주요 정치 단체인 아프리카 민주연합(RDA) 회장이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를 만나 설득을 통해 아프리카의 독립을 지지하는 프랑스 공산당(PCF)과의 동맹을 포기하게 만든 정치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아프리카 대륙에 싹트던 독립의 기운을 함께 억눌렀고, 폭력 사태 없이 모든 프랑스령 아프리카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탈식민화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미테랑은 프랑스 제4공화국이 붕괴한 직후부터 시작된 이 전설을 이후 수년간 거의 모든 대화 상대에게 되풀이했다. 심지어 그는 1965년 드골 장군과의 대선 당시에 이 이야기를 선거 캠페인으로 사용했다. 당시 그는 수백만 명의 TV 시청자들 앞에서 “감옥이나 교도소에 있었던 아프리카 정치 지도자들 대부분을 석방했다”고 주장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용기있는 대화 정책을 거부하는 이들의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고 밝혔다. 미테랑은 프랑스 해외령부에서의 자신의 행동을 “분명히 나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고, 프랑스를 위해서도 그러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1)

이 뻔뻔한 거짓말은 1986년 출판된 그의 책 『Ma part de vérité(나의 진실의 몫)』(Fayard)에서 반복되었으며, 이 책은 1969년 거짓 미테랑 만들기에 일조한 언론인 알랭 뒤아멜 기자와 함께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내가 자유를 준 이들 중 일곱 명이 (아프리카) 공화국들의 대통령이 되었다”라고 썼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단 한 명의 아프리카 지도자도 석방한 적이 없었으며, 그가 책임을 맡고 있을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미래의 국가 원수는 없었다!

이후 미테랑의 발명품인 이 “신화적 진실”은 그와 관련된 모든 저서를 통해 퍼져 나갔다. 그의 전기 작가들이 쓴 글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프란츠-올리비에 지스베르트는 미테랑이 프랑스 해외령부에서 실시한 정책을 매우 “모범적”이라고 평가했다(『프랑수아 미테랑 또는 역사의 유혹』, 1977).

또는 장 라쿠튀르는 이 젊은 장관이 ‘흑인의 해방’을 위해 얼마나 열정적으로 일했는지를 감탄조로 묘사했다(『미테랑, 한 프랑스인의 이야기』, 1998/재발행, 2006).

그의 전설은 프랑수아 말리예와 벵자맹 스토라의 책에서도 묘하게 서술되었다. 미래의 대통령 (미테랑)의 알제리 정책에 대한 충격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도(『프랑수아 미테랑과 알제리 전쟁』, 2010), 당사자의 발언과 앞선 전기 작가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를 ‘탈식민주의자’로 묘사하며, 그가 “알제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이 주장은 이제 거의 모든 곳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미셸 위녹(『프랑수아 미테랑』, 2015)이나 필립 쇼트(『프랑수아 미테랑, 모호한 인물의 초상』, 2015)와 같은 최근 전기 작가들조차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탈식민주의자가 아니었던 미테랑

이들은 미테랑이 제공한 자료 외에는 다른 출처의 어떤 자료에 대해서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미테랑의 ‘진실’은 이제 공식적인 것으로 격상되었다. 엘리제궁 웹사이트는 미테랑에 대해 미래의 대통령(미테랑)이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지휘하던 당시 그는 이미 “결단력 있는 탈식민주의 지지자”였다고 명시되어 있다.(2) 대담한 역설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람은 결코 ‘탈식민주의자’가 아니었다. 1951년에 미테랑이 당시 코트디부아르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와 가까워진 것은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보수 세력들의 평가, 즉 그가 “스탈린주의자”이자 “반(反)프랑스” 운동가라는 것이 근거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카카오와 커피 농장을 소유한 부유한 코트디부아르 국회의원이었던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는 사실은 독립과 관련한 정치를 했을 뿐 진정한 독립 의지도 없었으며, 오히려 4년 뒤에 “프랑사프리크(프랑스가 아프리카에 대해 끼치는 영향력, 혹은 지배방식—역주)”를 공고히 하여 프랑스 지원 아래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하는 일에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우푸에부아니가 프랑스 공산당과 결별한 것도 미테랑의 어떠한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자발적인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아프리카 의원들을 자신의 휘하에 연합시키는데 실패한 후 1952년에 니에브르 출신의 미테랑 국회의원과 협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 협약은 아프리카 해방이라는 명분 아래 이 두 마키아벨리주의자를 저명한 장관직으로 이끌었다.

1950년대의 미테랑은 프랑스 해외령을 상대로 ‘프랑스 정체성’을 열렬히 옹호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칫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식민지 사회 내에서 ‘분리주의’를 자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푸에부아니에 했던 것처럼 그들 내부의 반항적 기운을 억누르려는 토착 지도자들을 지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독립운동가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 적시에 ‘대담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1952년 ‘프랑스-튀니지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그가 이를 권고한 바 있다).(3)

 

“미테랑은 신식민주의 주요 이론가 가운데 한 명”

미테랑은 1953년에 출판된 그의 책 『프랑스 연합의 국경에서: 인도차이나 전쟁과 아프리카의 전망』에서 “우리에게 유일하게 남은 아프리카의 통치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말하며 자원과 비용이 많이 드는 인도차이나 전쟁은 속히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인도차이나는 이미 전쟁 패배로 잃었으니, 보다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 젊은 장관 미테랑은 촉구한 것이다. “아프리카라도 잃지 말자는 소위 아프리카 우선”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오늘날 ‘탈식민주의자’라는 과거의 칭호를 얻게 된 것은, 식민지를 상대로 충분히 계산된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행하면서도 식민 통치에 있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짐은 포기하는 방식으로 제국 시스템을 효율화, 합리화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기 작가들이 간과한 게 있다. 그의 그럴 듯한 모습, 즉 겉으로 보기에 진보적인 식민지 현대화 정책으로 보일지라도 이미 그 당시부터 독립운동, 특히 알제리 독립운동 세력으로부터 의심과 우려의 눈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1954년 즈음 이 정책을 아주 새로운 단어로 지칭했다. 그것은 바로 ‘신식민주의’였다. 그리고 그들은 프랑수아 미테랑을 그 ‘신식민주의’의 “주요 이론가들 중 한 명”이라고 분명히 못박았다.(4)

미테랑의 착시 마술, 그리고 역사학적 조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당시 알제리 민족주의자들은 오늘날 많은 프랑스 역사가들이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즉, 식민지 시스템의 개혁은 그 지지자들에 의해 제국을 해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복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미테랑, “식민지 개혁은 억압을 배제하지 않는다”

국회의원 미테랑은 1954년 5월, 피에르 멘데스 프랑스(1954~1955년 프랑스 총리역임)에 의해 내무장관에 임명되기 한 달 전에 “프랑스가 위대한 나라라는 감정을 되찾게 할 수 있는 것은 아프리카를 통해서다”라고 열정적으로 말한 바 있다. 미테랑은 지중해 건너편으로 프랑스 청년들을 대거 보내 “창조자이자 미래의 족장으로서의 정복 사회를 구축하는 것”을 꿈꾸었다. 그것은 마치 “50년 전 서부로 향하며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같은 놀라운 주들을 만들어낸 미국인들”과 같은 모습이었다.(5) 또한 1950년대 미테랑은 “식민지 개혁은 억압을 배제하지 않는다”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식민지 민족들을 올바른 목적지로 이끄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것은 바로 ‘당근과 채찍’의 고전적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는 적어도 1954년 11월 1일 알제리 민족주의 봉기 이후 그가 내무부 장관(1955년 2월까지)과 법무부 장관(1956년 1월~ 1957년 5월)을 수행하면서 견지했던 그의 주요 정책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몰레 정부가 시작한 ‘평화화’ 작업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1956년 3월, 알제리를 공포의 분위기로 몰아넣은 ‘특별 권한’을 설정하는 명령에 서명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알제리 운동가들의 처형을 승인했고, 그들 중 수십 명이 제출한 자비를 구하는 청원에 반대했다.

 

미테랑, 자신의 전기마저 미화시켜

그는 또한 수십만 명의 프랑스 청년들을 전투에 보내는 것을 지지했고, 1956년 가을 수에즈에서 벌어진 프랑스-이스라엘-영국의 군사 작전을 지지했다. 그는 1957년 초 알제리 전투가 한창이던 당시 언론에 의해 보도된 고문 사실을 축소하기도 했다.

여기서도 프랑수아 미테랑은 이후 자신의 전기를 미화하려고 했다. 그는 결코 영광스럽지 못한 사건들을 삭제했고, 자신이 정부 동료들의 억압적인 성향에 저항했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20년 후, 그는 유명한 전기 작가인 프란츠-올리비에 지스베르트 앞에서 “정직한 역사가들은 어쨌든 몇몇 장관들이 알제리에 대해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지스베르트는 물론 다른 이들도 그 후 이 빛나는 미테랑 법무장관이 그 피의 세월 동안 “항상 올바른 편에 있었다”라고 망설임 없이 주장했다. 미테랑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적용했던 이 정책으로 고통받았다고 해설자들은 덧붙이며, 장관이 겪었다고 하는 ‘불편함’과 ‘의심’을 관대하게 설명했다. “신중하고, 종종 불행했던 그는 정치 생활에서 최악의 몇 달을 보내게 될 것이다”라고 미셸 위녹은 그에 대한 동정심을 표했다.

북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좌절된 신식민지 계획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구체화되었다. 몰레 정부는 1956년 6월 가스통 드페르 당시 프랑스 해외영토부 장관이 추진한 법안을 통해 이들 지역에 내적 자치의 시작을 허용했다. 이렇게 하여 각 지역의 신흥 아프리카 엘리트들은 책임 있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 법안은 미테랑과 1956년 1월부터 장관직을 맡고 있던 우푸에부아니가 공동 서명했으며, 몰레 정부 내에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옛 국가원수의 지지자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평가이다. 왜냐하면 드페르 법안은 많은 역사가들이 나중에 기록한 것처럼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를 지키고 그곳에 머물기. 그것이야말로 아프리카인들이 환상적인 민족주의의 신기루에 눈 감도록 만드는 게 아닌가?”라고 프랑수아 미테랑은 새로운 체제가 발효된 몇 주 후에 논평했다.(6)

3년 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독립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독립이었다. 1958년에 권력을 되찾은 드골주의자들은 협력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이 독립을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고, 프랑스에 가장 충성스러운 ‘아프리카 친구들’—펠릭스 푸에부아니가 그 선두에 있었다—에게 관리를 맡겼다.

이렇게 프랑사프리크 신식민주의가 제도화되었고, 미테랑은 1950년대에는 신중한 선구자, 1960~1970년대에는 능숙한 비판자, 1981년 엘리제궁에 입성한 후에는 두려운 실천가로서 이 신식민주의를 이어갔다.

 

 

글·토마 델통브 Thomas Deltombe
저널리스트, 편집자, 독립 연구자. 『L’Afrique d’abord ! Quand François Mitterrand voulait sauver l’empire français 아프리카가 우선이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프랑스 제국을 구하려 했을 때』(라 데쿠베르트, 2024) 저자.

번역·아르망
번역위원


(1) 로저 루이와의 인터뷰, <ORTF>, 1965년 11월 22일.
(2) www.elysee.fr/francois-mitterrand 엘리제 웹사이트 - 프랑수아 미테랑
(3) 참조: 국립 아카이브, 벵상 오리올 소장 자료, 552 AP/113.
참조: 「Comment François Mitterrand réinventa la colonisation 프랑수아 미테랑은 어떻게 식민화를 재창조했는가」, 오리앙 XXI, 2024년 9월 3일, 링크
(4) 압델-엘-가니, 「Face au néocolonialisme 신식민주의에 맞서」, <라 나시옹 알제리엔>, 1954년 10월 1일.
(5) <콩바>, 파리, 1954년 5월 19일
(6) 프랑수아 미테랑, 『Présence française et abandon 프랑스의 존재와 포기』, 플롱, 파리,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