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콧수염 기를 권리를 달라!”

1907년 프랑스 제빵사와 카페·술집 종업원들의 저항

2024-11-29     마티외 콜로간 | 만화가

1906년 쿠리에르 광산 폭발 사고를 전후로 노동운동에 변화가 일었다. 기업주와 노동자 간에 벌어진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콧수염 기를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대체 콧수염과 노동자는 어떤 관계에 있었던 것일까. 당시 기업주는 종업원의 콧수염을 규제했던 이유를 이렇게 내세웠다. “당신은 인류에서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 우리의 하인이다.”

 

콧수염은 심각한 문제다. 농담이 아니다.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콧수염』에서 여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정말이지, 콧수염이 없는 남자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니에요 (…) 콧수염은 남성적인 외모에 필수적이에요. 콧수염을 다듬는 이 작은 빗이 시각적으로, 또 배우자와의 관계에 얼마나 유용한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콧수염은 학술적 분류와 변형, 그에 따른 세부 분류의 하위 그룹에서 프랑스어로 사용할 때는 정관사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moustaches)으로 표기해야 한다. 콧수염에는 모양과 특징에 따라 여러 스타일이 있었는데, 끝부분이 위로 올라가면서 곡선 모양을 이루는 골족 스타일, 두껍고 풍성한 콧수염으로 입술을 덮을 정도로 넓게 퍼진 불곰 스타일, 아주 얇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연필 콧수염, 양쪽 끝이 길게 뻗어 아래로 내려가는 페르시아 스타일 등이 있다. 독재자들의 콧수염 선호도를 조사한 연구도 있지만 결정적인 사실은 없었다. 전제 군주 가운데 42%가 콧수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적 성향보다는 해당 국가의 관례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907년 4월 17일은 프랑스의 군사적 개입과 통제 강화를 초래한 모로코 우지다의 폭동이 있었고,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영국의 작가이자 시인)은 대표작 『정글북』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파리 시민들은 여느 날들처럼 맑은 날씨를 만끽하며 대로변에 있는 술집 테라스로 몰려갔다.

바로 그날 그곳에서 오후 6시 30분에 콧수염 파업이 시작됐다. 정확하게 6시 30분이 되자 종업원들은 더는 주문도 받지 않고 손님들에게는 계산을 끝내도록 했다. 그리고 카운터로 달려가 일당을 챙기고 앞치마를 반납하자마자 술집을 떠났다. 그들은 인도에 삼삼오오 모여 미니 시위를 벌였다. 근무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이는 종업원들의 시위에 다소 놀란 소비자들은 재미는 있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눈길을 보냈다.

 

식당·카페·술집 종업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

술집 주인들은 테라스를 정리했다. 카페 드 라페(Cafe de la Paix: 1862년 오픈, 파리 9구에 위치, 예술가, 작가, 정치인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유명)는 문을 닫았고, 카페 리리크(Cafe Lyrique: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 근처에 위치한 카페)는 셔터를 내렸으며, 바 랭테르나쇼날(Bar L’internationale: 파리와 같은 대도시에 있고 주로 사회주의자, 예술가 등이 모이는 카페)은 더 이상 서빙을 할 수 없어 불을 끄고 손님을 내보냈다. 의자는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리옹역에 있는 뷔페에서는 그 어느 빈 잔도 채워지지 않았고, 카페 카르디날에서는 그 어느 코르크 마개도 따지지 않았으며, 라메리캥에서는 단 하나의 테이블도 치워지지 않았다. 파티는 끝이 났다.

그렇게 식당·카페·술집 종업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

이튿날, 언론은 그들의 요구를 비웃었다. 종업원들은 다름아닌 콧수염을 기를 권리를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그때까지 시위에 나섰던 노동자는 대부분 광부와 철도원, 전기 기사였다. 그러다 제빵사들과 정육점 직원들도 목소리를 냈고 공무원과 교사들은 단결권을 요구했으며 그리고 보병 조합까지 생겼다!

사람들은 동시에 걱정했다. 이들의 요구와 행동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닌, 꼼꼼하고 신중하게 준비된 움직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계기가 있었다. 제빵사들의 시위 발생 일 년 전인 1906년 3월,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쿠리에르 광산에서 대형 폭발 사고가 있었다. 당시 폭발로 수갱(垂坑, 수직갱도) 여러 곳이 파괴되면서 1,09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고 당일, 구조대는 이미 손을 쓰기 어려웠고, 폭발 후 3일째 되는 날에 쿠리에르 광산 회사는 화재를 막고 회사의 피해를 줄인다는 이유로 갱도 세 곳으로 통하는 지하 통로를 막기로 했다. 광부들이 아직 잔해 속에 갇혀 있음을 감안하면 이는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셈이다.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고, 분노는 역사적이라고 할 만한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정부는 경찰과 군대로 강경 대응을 서슴지 않았고, 사법부는 시위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사고로 인한 거대한 공분(公憤)은 노동운동의 불씨로 작용했다. 경영진은 한발 물러나 노동자들의 작업환경 개선을 위한 안전 표준과 피해자 가족에 대한 보상책을 마련했다. 또한 ‘급진당’의 중도파 정부는 노동 운동이 제시한 강력하고 상징적인 요구를 수용키로 했다. 요구사항인 주휴제와 하루 8시간 노동 중에 정부는 주휴제를 수용했다.

주휴제 요구는 노동자 해방, 즉 노동자의 운명은 단순히 일을 하고 잠을 자고 다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열악한 노동 조건과 위험한 작업환경에서 벗어나, 보다 인간적이고 안전한 노동 환경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정치적 투쟁, 나아가 노동자의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려는 투쟁을 의미하는 개념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휴제가 적용 안돼 노예 상태로 돌아간 종업원들

페르디낭 사리앵(1840-1915) 당시 프랑스 총리가 주휴제(주간 휴일) 도입을 발표했지만, 그 계획은 실망으로 끝났다. 급진당은 주휴제 법안을 여러 차례 수정했고, 그 결과 주휴일 적용 범위가 대폭 축소되었다. 특정 분야만 분기별로 주휴제를 적용받고, 누적된 주휴일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용주들은 주휴제를 악용하여, 이미 체결된 노동 협약마저 지키지 않으려 했다. 당초 주휴제 도입 취지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실상 종업원 입장에서 보면 투쟁으로 얻어낸 주휴제 단체 협약은 휴지조각이 될 형편이었다. 해당 쟁점에 대한 해결책은 각 사업장마다 다르게 수용되어, 사실상 대부분 근무 조건이 이전으로 돌아갔다. 즉, 노예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식당 및 카페 종업원은 사장이 원하면 하루에 20시간도 일해야 했다. 저녁에는 고정 급여를 받지 않고 팁만 받았다. 팁도 일부만 받았다. 서빙으로 생기는 팁은 바에 놓여 있는 금전함에 넣어야 했다. 일과가 끝나면 사장은 금전함에서 먼저 자신의 몫(총액의 5~25%)을 챙기고, 일반 경비(성냥, 편지지, 이쑤시개, 신문 등 좋은 종업원이라면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 물품 비용)를 제했다. 파손된 물품(깨진 유리잔이나 컵 비용)과 계산에서 누락된 음료나 식대도 뺐다. 규모가 큰 술집에서는 사장이 종업원들에게 사무나 청소와 설거지를 강요하기도 했고, 사례금과 식비를 내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남은 돈은 종업원들 간 위계에 따라 분배됐다. 종업원들이 돈을 전혀 받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고용 보장도 없고, 휴가도 없고, 복지도 없었다. 일이 끝나기도 전에 지치다 보니 종업원들은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현재 우버(Uber)가 초래하는 문제는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 노동총동맹은 1904년 9월 부르주 회의에서 의회의 주휴제 포기를 좌시하지 않겠다며 식품업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에 나서겠다고 했다. 단체 협약 수정을 위해 바스티유역에서 나시옹역까지 24시간 시위를 하기로 했지만 날짜는 예고되지 않았다. 고용주는 의심되는 노조원을 해고하고 파업 대체 인력 고용에 관심을 쏟았으나 노동자 및 노동계의 요구사항은 무시했다.

 

파업에 나선 제빵사들

1907년, 프랑스 노동총연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CGT)은 노동자들의 결집을 위한 은밀한 방법을 사용하여 대규모 파업을 준비했다. 노동자들에게 파업 참여 의향과 참여 가능 일자 등을 묻는 설문을 경찰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진행하고 설문 결과 또한 은밀하게 수집되었다. 최종 결정된 파업 일자와 요구 사항 등을 노동자들에게 전달하는 방법 또한 아주 특수한 방법을 동원했다.

설문지에는 얼마나 많은 회원들이 기꺼이 파업에 동참할 것인지, 고려중인 방법이 무엇인지(합법적인 방법인지 폭력적인 방법인지),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 질문들이 있었다. 해당 설문을 완료하면 설문지는 노동위원회 사무소나 노동조합이 아니라 경찰이 알 수 없는 비샤 20번지에 사는 르그랑이라는 사람에게 발송됐다. 그곳은 건설 중인 노동위원회 본부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이었다. 발신자 주소와 성명도 찍혀 있지 않고, 어떤 설명도 없는 상태로 우편으로 발송됐다. 이것이 결집을 알리는 신호이자 날짜였다.

1907년 4월 11일에 제빵사들이 움직였다. 파업이 시작되었다. 파리 경찰청장인 루이 레핀은 파업 진압에 나섰다. 가담한 노동자들이 평화롭게 시위를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총동맹은 대안을 찾았다. 예를 들면 시위 장소를 콩코드 광장이라 발표해놓고 경찰과 기자들이 그곳으로 몰려가면 다른 곳에서 시위를 벌이는 형식이었다.

식품업 노조 연맹 대표인 아메데 부스케와 오귀스트 아돌프 사부아는 마리니 가에서 샹젤리제까지 산책하듯 걷다가 오전 10시 정각, 입고 있던 프록코트에서 ‘제빵사 파업 중’과 ‘주휴제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꺼내 든 채 인도를 벗어나 로얄 가로 떠나는 방법을 썼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그때까지 숨기고 있던 깃발과 플래카드를 꺼냈고, 채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시위대는 3,000명으로 불어나 경찰을 놀라게 했다.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 끝에 무질서한 모습으로 노동위원회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직도 신속하게 파업에 동참했다. 노동위원회 사무실은 물론 모든 크고 작은 방들과 심지어 복도까지 파업에 참여하는 식품업 노동자들로 인해서 크게 붐볐다.

이렇게 파업이 시작됐다.

 

클레망소 총리가 중재를 제안한 이유

총리 겸 내무장관인 조르주 클레망소는 다음 날 파업 중인 제빵사 대표단을 만났다. 본인 사무실에서 맞이했다. 그는 대표단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빵집 주인들에게 중재를 제안했다. 동시에 프랑스 빵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일드프랑스 지역에서 생산된 빵을 파리 전역에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식사에 필수적인 빵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파리 주민들에게 공급되어야 했다. 당시 모든 정치 지도자는 빵 부족이 폭동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의 주요 인물이었던 클레망소는 사실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루이즈 미셸(프랑스의 아나키스트—역주)의 친구인 사회주의자 오귀스트 블랑키로부터 오랫동안 지지를 받았고, 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에 반대하는 반(反)교권주의자이자 반(反)식민지주의자였으며,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고 확신에 찬 드레퓌스파였다. 보수 정당인 ‘질서당’을 옹호했으며, 반(反)군국주의 발언으로 징역형을 받았고, 최초로 집시 감시법을 제정했으며, 반(反)노동 정책과 친(親)노동정책 사이를 오갔다.

당시 클레망소는 제빵사들을 만나서 고용주와의 협상을 요구하는 그들의 의사를 지지했지만, 고용주 측은 외국에서 제빵사를 불러들이는 방법을 썼고, 그들이 도착하기까지 경찰의 보호 아래 빵을 만들고 있었다. 제빵업 노조는 제빵사가 없는 빵집들이 생산한 엉망진창인 빵을 노동위원회 앞에 전시하면서 그들을 조롱했다.

4월 17일 파업 중인 카페·술집 종업원들이 노동위원회에 모여서 첫 번째 회의를 열었지만, 분위기는 과열됐다. 복도에서도 회의장 내부의 소리가 들렸고 문 앞에는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카페·술집 종업원 노조의 핵심 인물인 외젠 프로타는 연단에 서서 매주 휴식 시간을 줄 것, 금전함을 치우고 비용 공제를 하지 말 것, 노조를 인정할 것, 콧수염을 기를 권리를 인정할 것 등의 요구사항을 낭독했다. 다른 방에서는 호텔 종업원들이 파업을 두고 투표했다. 정육점 종업원들도 인접한 작은 방에서 조직을 가다듬었다. 잠수부들도 첫 번째 회합을 가졌다. 집회는 혁명가를 부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사람들은 “파업 만세!”라고 구호를 외쳤다.

 

카페 주인들, 종업원들을 비웃고 클레망소 중재를 거부

설탕 정제업 종사자들 회의에서는 고함이 들렸다. 메티비에 동지가 여성 파업 참가자들이 받는 압박감을 설명하자 고함소리가 터져 나와서 연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복 경찰이 연사들의 이름을 적다가 사람들에게 들켜서 두들겨 맞고는 노동위원회에서 쫓겨났다. 새롭게 파업에 동참하는 단체가 들어올 때마다 환호성이 터졌다. 카페·술집 종업원 총회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전면 파업에 투표했다.

식당 주인들이 모인 노조에서도 회의를 가졌다. 분위기는 다른 방보다 경직돼 있었다. 요식업자 노조가 주최한 비공개 회의에 참가한 극우 언론에 따르면 그들이 노동총동맹을 인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중요한 것은 주방에서 해결해야 했다. 단체협약과 지점협약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들은 테라스에 사무직과 하녀뿐만 아니라 면접을 보러 온 모든 추가 인력을 배치했다. 이탈리아에서 기차를 대절해서 적은 임금으로 파업 중인 종업원들을 대신할 가난한 노동자들을 싣고 왔다. 일부 카페는 그 값싼 노동력 덕분에 계속 문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카페들은 굴복하느니 문을 다시 열지 않는 쪽을 택했다.

몽마르트 대로에 위치한 비엔나 카페의 주인인 스피스가 “파업을 막기 위해서 노동총동맹을 인정하면 어떠냐”라고 하자,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프랑스인답지 않다며 입을 다물라고 말했다. 반대로 ‘카페 드 라 페’의 아르튀르 밀롱 사장은 파업에 참가한 종업원들이 작성한 글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카페 주인들은 종업원들의 요구사항을 비웃었다. 그들은 클레망소의 요청에 따라 중재를 제안한 치안 판사도, 노조도 전혀 만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일간지 <르마탱>, “모든 문제는 빵집 사장에게만 생길 것”

파업에 참가한 자들은 여전히 문을 연 테라스 카페나 술집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을 찾아가 몇 시간에 걸쳐 호소했다. 전단을 읽어주며, 일하지 말 것을 부추겼다. 파업은 확산됐고, 무료 급식소가 샤펠 가에 마련됐다. 경찰과 군인은 카페와 빵집을 보호했다. 언론은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모욕하거나 공격하는 일이 잦자 파업이 급진화되는 것을 우려했다. 빵집 유리창을 깨거나 오븐 한 대 분의 반죽통에 석유를 부어버리는 일도 생겼다. 일부 보수적인 기자들은 경찰의 단호한 대처와 사법부의 명백한 결정을 요구했다. 노조 대표들은 기소를 피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위와 같은 사보타주는 동료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사보타주는 노동 운동의 수단 중 하나다. 프랑스어로 사보타주(sabotage)를 표기할 때도 단수 정관사 ‘Le’가 아니라 복수 정관사 ‘Les’를 사용해야 한다. 도정업 종사자가 약간의 실수를 하고 아주 약간 일을 덜 잘해서 생산을 늦추는 경우도 사보타주이고, 자신이 판매하는 제품의 결함이나 속임수를 소비자에게 경고하는 것도 사보타주이며, 준법투쟁도, 파업에 가담하지 않는 노동자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막는 행위도 사보타주이고, 논쟁을 하는 것도 사보타주이기 때문이다.

식품업 노조 운동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 노동총동맹의 주요 지도자인 에밀 푸제는 일간지 <르마탱>에 아래와 같은 입장문을 보냈다. “밀가루를 손으로 만지거나 상한 밀가루나 콩가루를 섞거나 반죽에 해로운 성분을 넣는 등의 사보타주를 하는 것은 빵집 사장들이다. 노동자들은 상대편의 금고를 공격한다. (…) 빵집 조수가 반죽에 누룩을 넣는 것을 ‘잊거나’ 소금을 넣는 것을 잊거나, 반대로 너무 많이 넣을 수 있다. 아니면 오븐에서 빵이 타게 내버려두면 빵은 팔 수 없을 것이고 사장만 고통을 당할 것이다. (…) 모든 문제는 빵집 사장에게만 생길 것이다. 그게 바로 사보타주의 성격이다. 사장에게 치명타를 입히려면 사장의 금고를 공격하면 된다. 업주만 공격할 것이다.”

 

빵집 고용주들에 군대를 보내 타협을 종용한 클레망소 총리

그리고 덧붙였다. “기업가나 업주들은 사보타주를 걱정하다 보면 인간답게 생각하고 화합을 위해 성찰하는 계기를 갖게 될 것이다. 사보타주는 그들에게 좀 더 진지한 태도를 갖게 할 것이고, 나아가 사보타주가 없어도 노동자가 만족하는 여건을 위해 힘을 쏟게 될 것이다.”

식당 ‘부이용 뒤발’의 사장은 여성 종업원에게 노동위원회에서 파업에 참가한 사람들을 만나지 말도록 명령했다. “파업중인 카페 종업원들이 노동위원회에 여성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놀고 싶어서다. 조심해야지. 그들이 당신더러 일터를 떠나라고 하는 건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랑 즐기기 위해서다. 그러다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아기 파업 동참자가 생기겠지!” 테라스 테이블에는 빨간 나비가 붙었다. “파업을 지원하고 팁을 지불하지 마십시오.” 술집 여러 곳에서 파업에 가담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1프랑도 벌지 못한 채 하루를 끝냈고, 결국 다음날 일터로 돌아가지 않았다.

파업이 리옹과 툴롱, 낭트, 마르세유로 확산되는 동안 클레망소는 파리에 전투부대를 세웠다. 모든 일이 벌어지는 곳이 파리였기 때문이다. 클레망소는 빵집에 군인 제빵사와 시립 빈민 구제 제빵사를 배치했다. 빵집 사장들에게 종업원들의 요구사항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도록 압력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몇 가지 주요 사항에서 진척이 있었다.

 

마침내 굴복한 고용주들, 종업원들이 콧수염 기르는 것을 허용

경찰청과 클레망소의 중재를 거부했던 카페·술집 고용주들이 종업원들의 입장을 인정하고 굴복했다. 고용주들은 경비 일부를 면제하고 콧수염을 기르는 것을 허용했다. 가장 합리적인 고용주들은 사업장에서 경비와 금전함을 없앴고, 일부는 노조를 인정했다.

이틀 후 제빵사 노조원들은 21일 간의 투쟁 끝에 파업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주요 목표인 교대식 주휴시간과 노조 승인 및 기타 몇 가지 혜택을 받았다. 48시간 후 카페·술집 종업원들이 16일간의 파업을 마치고 일터로 복귀했다. 경비를 더 적게 제하게 됐고 금전함도 없어졌지만, 노조는 인정되지 않았고 휴일은 여전히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 4년 후, 노동총동맹은 최초의 고정 보수, 최저 소득 및 경비 공제 종료 등을 위해 새로운 파업을 조직했다. 마침내 1980년대가 되어서야 팁에 대한 모든 공제가 없어졌다.

그런데 왜 콧수염을 기를 권리를 주장했던 걸까? 우파에서 비웃었던 그 요구사항은 큰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수염을 좋아했다. 정치가 에밀 콩브(1835~1921, 총리역임)의 짤막한 턱수염, 무정부주의자 조르주 이브토(1868~1942, 노동운동가)의 뾰족한 콧수염, 정치가 장 조레(1859~1914, 사회주의 운동가)의 짙은 수염, 파트리스 드 마크 마옹(1808~1893, 제3공화국 두 번째 대통령) 대통령의 염소수염, 클레망소의 자전거 핸들 모양의 콧수염과 구레나룻, 코밑수염을 좋아했다. 헌병들 사이에서는 콧수염은 의무일 정도였다.

수염은 곧 남자라는 말이 있다. 수염은 어른과 성인 시민을 뜻했다. 수염이 없는 사람은 아이, 즉 미성년자였다. 하지만 계약상 콧수염 금지 조항은 하인과 카페 종업원이 콧수염을 기를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반면, 구레나룻 길이는 센티미터 단위로 규제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당신은 인류에서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 우리의 하인이다”라고. 여성의 패션은 느슨한 헤어스타일과 볼륨감 있는 커트, 망을 씌우는 것이 가능했지만, 가사도우미의 머리카락은 확실하게 묶고 가려야 했다.

20세기 초 노동운동은 이미 노동자의 육체 해방을 요구하고 있었다.

 

 

글·마티외 콜로간 Mathieu Colloghan
만화가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출처: 
- <르탕(Le Temps)>, <르마탱(Le Matin)> <랭트랑시장(L’intransigeant)>, <라프레스(La Presse)>, <라크루아(La Croix), <뤼마니테(L’humanité), <레코 드 파리(l’Écho de Paris), <로로르(L’Aurore)>, 1907년 4월 11일~5월 4일. 
- Grégoire Fleurot, Aurélia Morvan, Mathieu Perisse, Agathe Ranc, 「Un bon dictateur doit-il porter la moustache? 훌륭한 독재자는 콧수염을 길러야 하는가?」, Slate.fr, 2012년 3월 8일. 
- 기 드 모파상, 『콧수염』, <길 블라(Gil Blas)>, 1883년 7월 31일. 

*『Trop jeunes pour mourir 죽기에 너무 젊은』의 저자 기욤 다브랑슈와 셀다 카난의 조언에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