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멈추고, 돌아보고, 진정한 의미를 찾을 때
북한과 프랑스의 교차점에서
번쩍번쩍 빛이 나는 브라운색에 견고해 보이는 나무관 속에 프란시스가 누워있다. 관 안쪽은 하얀 천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그는 잠을 자듯이 편안해 보였다. 프란시스가 9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7년 전, 쇠약해진 그의 몸에 암세포가 자리를 잡았다. 프란시스는 “이제 충분히 살았어. 내 나이에 지금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지!”라며 항암치료를 거부했다. 그렇게 그는 암과 함께 칠 년을 더 살았다.
프란시스가 죽기 한 달 전쯤, 나는 우연히 그의 집 근처를 지나가다 그를 만났다. 가녀린 지팡이에 긴 몸을 기댄 채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었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야”라고 영어로 말했다. 프란시스의 아내 마리는 남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보세요. 혜성은 영어보다는 프랑스어가 더 편하대요.”
마리는 쉰 살도 넘은 거북이 여러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그날 점심으로 먹다 남긴 파스타와 상추를 거북이들에게 흩뿌려 주던 일을 멈추고, 남편을 향해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프란시스는 나의 시할머니의 여동생 마리의 남편이다. 나는 시어머니보다 시할머니와 친하다. 시할머니, 마리, 그리고 프란시스는 전쟁을 겪은 세대다. 전쟁을 겪은 프랑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세대와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공통점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인종도 세대도 다른 나는 그들과 어울리는 사이가 됐다. 프란시스는 나만 보면 영어로 소통하고 싶어 했다. 내가 프랑스어를 익힌 후부터는 나는 프랑스어로 프란시스는 영어로 대화했다. 영국인 전 여자친구 자랑을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아내 마리의 핀잔을 듣기 싫었던지, 마리가 잔소리를 늘어놓을 때마다 오른쪽 귓속에 꽂아 넣은 투명한 보청기를 어루만지며 나에게 찡긋하고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프란시스의 죽음에서, 북한 아버지의 최후를 떠올리며
프란시스가 열네 살 때 프랑스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광기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라코스테라는 아주 작은 프랑스 남부 시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혼란을 피해 친분이 있던 유태인들을 숨겨 주었다. 프란시스는 유태인들의 은신처에 감자와 빵, 그리고 신선한 우유를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밀고자의 신고로 프란시스가 잡히게 되었다. 프란시스의 집에 독일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독일 군인들이 프란시스를 끌고 가려고 하자, 프란시스의 아버지가 군인들을 막아 나섰다. 그리고 말했다. 아들이 아니라 내가 그 일을 했다고, 독일 군인들은 프란시스의 아버지의 뒤통수에 권총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작은 지프차에 그를 싣고 사라졌다. 그게 프란시스와 프란시스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다.
오래 산다는 건 축복일까? 98세이니, 프란시스는 장수한 셈이다. 그러나 그는 새끼를 잃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어미의 모습을, 그 어미의 아비 된 자로 지켜봤어야 했다. 프란시스는 작은 딸도 앞세웠다. 이제 그도 이 세상과 매듭을 지었다. 프란시스가 한 말들이 떠올랐다.
“언제 나이를 이렇게 먹어 버렸을까? 자다 깬 것 같은데 벌써 백 살을 바라봐. 이젠 케이크에 초를 하나만 꽂아. 내 나이만큼 초를 꽂으면 케이크를 버려야 해.”
“열심히 사는 건 좋다고만 할 수는 없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열심히만 하면, 돌아오는 길만 멀어져. 전쟁통에서 군인들이 열심히 하면 살인자밖에 더 되겠어?”
‘인생은 생각보다 짧아. 그러니 두 다리로 걸을 수 있을 때 즐겨야 해.’
70년을 함께한 남편을 떠나보내야 하는 마리는 안젤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침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슬프게 울거나 통곡하는 사람은 없었다. 조용한 장례식이었다. 프란시스의 관이 그가 나고 자라서 평생을 보낸 라코스테의 공동묘지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향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외삼촌과 외할머니의 삶을 떠올렸다. 나의 아버지는 한량이었다. 아버지는 평생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나태하다 욕했고, 게으르다 원망도 했다. 북한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조직생활로 사람들을 촘촘하게 옭아매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아버지는 평생을 뺀질거리며 손가락에 흙 한 톨 묻히지 않고 놀고먹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이따위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건 게으르니만 못하다.”
“내가 하는 짓의 결과를 생각지 않고 열심히 하는 건 사람잡이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땐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질 못했다. 일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거라 단정이었다. 그러나 인생을 조금 더 살아낸 지금에 와서는 아버지의 말이 프란시스와의 말과도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여기고 있다.
아버지는 청진 도병원의 명망 있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내일 당장 죽을 사람처럼 “여기 아프오, 저기 아프오.”라며, 엄살을 부려 ‘사회보장’자격을 얻어냈다. ‘사회보장’이란 한국으로 치면 ‘기초생활 수급자’ 자격이다. 30살부터 죽을 때까지 조직생활에서 예외 된 채 스스로 고립되어 아무것도 하질 않았다.
<노동신문>을 잘라낸 종잇조각에 잘게 자른 마른 담배 잎사귀를 돌돌 말아 끝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참 좋아했다. 담배를 집안에서 피웠다. 기관지가 약해 봄만 되면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밤새 기침을 해대느라 잠을 못 이루는 나를 옆에 두고도 아버지는 집구석에서 줄담배를 태워댔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집안은 아버지가 피워댄 담배연기로 가득 차 곰 굴을 연상케 했다. 그렇게 놀고먹으며 살다, 내가 한국으로 와서 해마다 때가 되면 붙여주는 돈으로 먹고살았다. 그러다 환갑을 한 달 앞두고 간암으로 세상으로 떠났다.
나는 아버지가 폐병으로 죽을 줄 알았다.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니 폐가 썩어있을 거라 짐작했었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버지의 폐는 담배 따위로 망가뜨리질 못할 강철같은 폐였다. 그런 아버지의 생각을 하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발악해도 이 나라에서 우리가 설 자리는 없어”
남편이 물었다. “장례가 재밌었어? 왜 웃어?” 나는 입술 밖으로 비실비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냥… 아버지 생각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 참 철없는 양반이었는데, 평생을 유유자적하다 죽었으니 후회는 없을 것 같아… 남겨진 자식인 나에게 마음의 짐을 떠넘기진 않았으니. 인생은 개떡같이 살았으나, 삶을 잘 마무리했다고 해야 할까.”
인생을 열정적으로 살다 나이 마흔에 불꽃같이 삶을 마무리 지은 외삼촌이 있다. 외삼촌의 이름은 김홍일이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삼촌을 “홍길동”이라 불렀다. 북한에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과 외삼촌이 닮았다고 동네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런데 막상 작은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호박”이라고 별명을 지어줄 정도로 못생긴 여자였다. 작은어머니는 함경북도 남양군 출신으로 토대가 좋았다. 남양군은 두만강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은 두만강을 넘어 남양군을 통해 국내로 드나들며 활동했다. 작은어머니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들에게 도움을 줬다. 그 덕에 작은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입당도 했다. 삼촌은 작은어머니의 당원증과 결혼했다. 그리고 작은어머니의 토대를 발판 삶아 입당하고 싶어 했다.
삼촌은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농장 포전에서 살다시피 했다. 분조장도 맡았다. 분조의 알곡 생산량을 맞추지 못하자, 삼촌의 몫의 분배를 군량미로 내놓았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심’을 내는 삼촌을 아버지는 비웃었다.
“홍일이가 아무리 발악해도 이 나라에서 우리가 설 자리는 없어. 그거 다 헛고생이야. 담배나 피우라고 해.” 그렇지만, 야속하게도 철옹성 같은 입당의 문턱은 넘질 못했다. 사회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삼촌에게 인생을 살아내야 할 동기를 앗아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삼촌은 명예욕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입당이 좌절되니, 작은엄마와의 결혼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고는 마을의 처녀들과 바람을 피워댔다. 길을 잃은 사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에게 아주 큰 돈이 생겼다. 한국에 먼저 온 이모가 인편으로 삼촌에게 돈을 부쳤다. 그런데 그 돈 액수가 북한으로 치면, 같은 자리에 앉아서 로또를 서너 번 맞은 액수와 맞먹을 정도였다. 삼촌에게서 돈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다리의 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한동안 일어나질 못했다.
그 정도로 큰돈이었다. 평생을 못 먹고 못 입고 살던 구질구질한 삼촌의 인생이 한순간에 돈벼락을 맞은 것이다. 정신을 놓은 사람 같았다. 없이 살던 사람이 돈이 갑자기 너무 많이 생기면 주체를 못 한다. 일본제 중고 자전거를 하나 사더니, 인근 은덕군을 뒷집 드나들듯이 들었다. 종산리에서 은덕을 가려면 오룡천을 건너 금송을 지나 강파리령을 넘어야 했다. 여덟 개의 가파른 고개가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강파리령”이라 불렸다. 삼촌은 강파리령을 지나 은덕을 한 달에 몇 번꼴로 드나들었다. 그러다 고향 친구가 찌른 칼날이 횡격막을 가로질러 목숨을 잃었다.
삼촌을 언 땅에 묻고, 가슴을 쥐어뜯었던 엄마의 절규
삼촌을 언 땅에 묻으며 엄마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짐승처럼 울분 짖었다. “거북 띠는 비렁뱅이처럼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오래 사는데, 팔자에 어울리지 않은 큰돈이 생기니 그 돈을 네가 못 이겨서 돈에 치여서 죽어버렸구나.”
엄마의 절규는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삼촌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새 신발, 새 옷, 옷감, 한 번도 신어보지도, 입어보지도 못한 물건들이 잔뜩 있었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단 한 개도 남기지 않고 한 보따리 가득 싸 안고 산으로 올랐다. 그리고 삼촌 무덤 곁에서 하나씩 하나씩 태웠다.
“이것도 가지고 입어라. 이것도 가지고 가서 신어라. 이것도 가지고 가서 멋지게 만들어 입어라. 잘 어울리겠다.” 어머니는 울다 그치고, 태우고, 또 울다 그치고 태우고, 반나절을 삼촌의 무덤 곁에서 불질을 해댔다. 외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던 외할머니는 곡기를 끊고 아들을 지키러 저승길을 스스로 따라갔다.
삶과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사실은 이 둘의 경계가 흐릿한 것 같다. 내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열심히’와 ‘노력’, 이 두 단어가 세상을 지배라도 할 듯이 청년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자기 계발서들이 난무했고, 그것들은 하나같이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원하는 것들은 대부분 부유한 삶이었다. 부자가 되면 북극의 만년설 얼음을 갈아 팥빙수를 만들어 먹으며,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매일 화려한 코스요리를 먹으며, 전용기를 타고 이동하며, 날마다 사람들을 부리고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지 않을까? 그런 삶들을 남겨주고 죽으려면 눈이나 제대로 감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그 무한대의 영역인 ‘열심히, 노력’이라는 명제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그리고 관찰자로 남을 것을 선택했다.
이제는 단순한 ‘열심’이 아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때
프랑스 사람들을 흔히 게으르며 노동을 꺼리는 민족이라고들 한다. 프랑스에서 조깅하는 사람 외에는 급히 뛰어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느긋하다. 마치 인생의 한 조각 한 조각을 음미하는 듯이…
반면, 한국이나 북한 사람들은 진취적이고 부지런하며, 목표 지향적이다. 목표를 위해 현실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게으름을 멀리하고, 열심히 사는 것을 숭상하며 근면과 성실을 미덕으로 여긴다.
이러한 특성은 남북한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닌 한민족의 특징인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민족’이라는 단어조차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의 ‘게으름’을 ‘이유 있는 게으름’이라고 불렀다. 게으름은 국가 권력의 입장에서는 이유를 막론하고 배척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목적 없는 ‘열심’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의 인생철학이 담긴 질문 없이 참여하는 ‘열심’은 자연과 문명, 그리고 인간을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물었다. 수십만 명을 굶겨 죽이는 북한이 왜 무너지지 않느냐고, 그리고 북한 사람들은 왜 억눌린 채 가만히 있느냐고. 물론 그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북한 사람들도 ‘열심히’ 북한이라는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동참한다.
한 국가는 지도자의 폭정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성적 경쟁에 열심히 참여하고, 좋은 대학으로 진학하기 위해 뇌물과 인맥 경쟁을 펼치며, 입당하여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를 얻기 위해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한다. 이러한 다양한 ‘열심’들이 모여 그 나라를 유지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반도 사람들의 가슴속에 대를 이어 새겨져 내려온 ‘열심’을 다시 검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사는 것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멈추고, 돌아보고,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열심’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는 단순한 ‘열심’이 아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때다.
글·김혜성
2004년 16세에 탈북해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연세대 인문학부에 입학해 역사학을 전공했다. 2017년 프랑스인을 만나 결혼했다. 프랑스 남부에서 프랑스인 남편,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