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 끝나지 않은 노래 ‘테러와의 전쟁’
2013년 1월 11일, 프랑스는 말리와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이 미온적일 뿐만 아니라 전쟁의 목표도 분명치 않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천명한 것처럼 ‘테러리스트들을 괴멸’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현지 상황의 안정화? 말리 북부 지역의 재탈환? 전략 부재로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에서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도 게릴라전에 유리한 광대한 사막에서 발목을 잡힐 위험에 처했다.
역사가들은 아마 21세기 초의 프랑스 군사작전을 '딸꾹질 전략'으로 정의할 것이다. 지난 10년간 프랑스 군사전략에 일관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열흘 전부터 수많은 논평가들이 프랑스의 말리 내전 개입에 대해 열을 올리며 논평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말리 파병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다음날, 프랑스는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격작전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얼마간은 대규모 지상군 파병을 경계했는데 아프가니스탄은 프랑스와 별다른 이해관계도 없고, 카불이 '군벌'에 장악됐다고 해서 지금까지 혼란스러웠던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구조적으로 달라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02년 9월 코트디부아르. 프랑스는 리코른 부대를 파병해서 '프랑스 언어권의 아프리카 관문'이던 코트디부아르에서 중재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수천 명의 지상군이 프랑스의 주요한 이권이 걸린 이 지역에서 내전이 확산되는 것을 막았다.
갈팡질팡하는 프랑스
2003년 이라크. 한동안 주저하던 프랑스는 눈에 뻔히 보이는 지역 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 네오콘의 도박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이뿐만 아니라 '도덕적'이라고 자체 선언한 서방과 한창 정체성과 정치적 혼란을 겪던 아랍 세계 사이에 큰 골이 생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 프랑스는 '비개입'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미국에 이끌려 비현실적이고 도덕적인 목표인 '이라크의 민주화'라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합류했다. 주둔군이 아무리 전문성을 가지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목표였다. 2011년 리비아. 지나친 호언장담과 효율적인 군사작전이 결합한 블랙코미디였다. 프랑스는 여느 정부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로테스크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지만, 북아프리카 지역 전체가 항구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걸프만의 오일머니로 막무가내식 무장을 하게 됨에 따라 더욱 과격해지는 계기가 되었다.(1)
프랑스가 왜 이렇게 무능력에서 비롯된 현실주의와 비양심적 이상주의 사이에서 춤을 추는지 논리적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말리는 더 흥미롭다. 프랑스 정부는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의 모순에 발목이 잡혀 여러 달 동안 주저하더니 적군이 대응할 시간을 다 준 뒤에야 말리 파병을 발표했고, 리비아 내전의 피해를 복구하려 했다. 리비아 내전으로 인해 사하라 남쪽 사헬 지방의 과격한 이슬람 분파가 무장하게 되었고, 반군의 주도권이 투아레그족의 분리독립 운동에서 서아프리카 통일과 지하드를 위한 운동(NOJWA), 알카에다북아프리카지부(AQMI)로 넘어갔다. 그 결과는 말리 정부군의 약화와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졌다.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 관저)은 신속하게 행동지침을 마련하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11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지상군 파병은 없다. 군사적 개입은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또 한 번 분명히 하며 대신 말리 정부군에 단순한 물적 지원을 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렇게 신중하지 못하게 성급히 선언하는 바람에 대통령은 말리 현지의 상황 변화에 따라 자신이 한 말을 부정해야 할 위기에 처했고, 좀더 자유롭게 정책을 펼 여지를 스스로 제한해버렸다. 더구나 근본적으로 현지 상황은 엘리제궁의 통제 밖에 있는데도 말이다.
지난 1월 10일 말리의 수도 바마코에서 북동쪽으로 700km 떨어진 전략적 요충지 코나가 이슬람 과격단체 안사르디네와 AQMI의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수도 바마코를 보호해줄 세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ECOWAS)는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고, 유럽연합(EU)은 조심스러워했고, 미국은 미덥지 못한 눈으로 상황을 주시했다. 남은 것은 프랑스 전투기와 병력밖에 없었다. 1월 11일 '세르발(Serval·아프리카 살쾡이 세르발의 이름을 붙인 작전명) 작전'이 시작됐다. 3개월 전에 "아프리카를 대신해서 개입할 수 없다"고 한 대통령은 이제 자기가 한 말을 부정해야 했다. 이런 방향 전환은 정부의 예측 능력에 의문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이른바 '안정화'라는 임무가 앞으로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 되도록 빨리 예측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엘리제궁이 주저했던 것에는 무엇보다 진흙탕이 되어버린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배경에 있다. 아프가니스탄 사태의 실패는 미국의 문화주의적 이론에 기초한 '테러와의 전쟁'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테러와의 전쟁은 일시적인 안정화보다 훨씬 범위가 넓은 것으로, 정치적 목적에 맞는 전술을 채택하게 했고, 전쟁의 목적을 극도로 도덕화했다. 명예로운 퇴장도 어렵게 했다. 전략의 부재로 10만 병력이 최종 목표도 없이 10년 동안 진흙탕 속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리 사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안정화 작전 혹은 중재 작전의 필요성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예는 "절대 지상군을 파병하지 않겠다"고 말한 올랑드 대통령의 성급한 판단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다음 4가지 기본 원칙을 지킨다면 모든 형태의 개입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먼저, 위협에 대한 자율적인 평가다. '테러리즘'의 정의는 펜타곤의 파워포인트 자료나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다큐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책과 사회학책에 사헬 지역의 '테러리스트'에 대해 자세히 설명돼 있다. 다음은 정당성이다. 안정화는 주변국과 자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현지 정부를 약화시킬 정도로 무한정 주둔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 번째 원칙은 작전의 효율성이다. 대규모 재원이 필요한 군사작전은 기간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 마지막 원칙은 자유로운 정책 수행이다.
재회의 갈망, 식민 모국과 자식
그렇다면 말리는 이 4가지 원칙에 부합하는가? 정당성과 관련해서는 프랑스가 아프리카의 안정화 노력을 돕는 것에는 실질적 근거가 있다. 아프리카는 아프가니스탄과 다르게 프랑스와 언어,(2) 문화, 그리고 지역적으로 가깝다. 여기서 비난받아 마땅한 관례인 '프랑사프리카'(식민시대의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한 비공식 외교 통로로, 프랑스는 이를 통해 아프리카에서의 이권을 보호했다)와 아프리카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며 체결한 군사합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2008년 프랑스 정부가 발행한 백서에 따르면, 프랑스는 이란의 위협에 맞서 걸프만에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한동안 등한시했는데 이는 '지리보완성 원칙'(Principle of Geosubsidiarity)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지리보완성 원칙은 특정 국가의 안정화 혹은 중재 노력은 우선적으로 그 국가에 논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행사돼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아프리카 군사지원 정책의 여러 예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차드에 주둔한 에페르비에 부대와 1997년 아프리카 국가의 평화 유지 능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시작된 리캠프(Recamp) 프로그램은 성공작으로 평가된다. 리캠프의 성공에 힘입어 2004년에는 EU도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과 공동으로 유로캠프(Eurocamp)를 시작했다. 프랑스는 계속 리캠프 프로그램을 원하는 아프리카 국가와 양자관계 차원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군사지원 정책으로 다져진 상호 신뢰 관계는 1월 19일 코트디부아르의 수도 아비장에서 열린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정상회의에서 잘 드러났다. 이날 회의에서 정상들은 '말리 지원을 위한 유엔 다국적군'(AFISMA)에 참여해서 말리 정부군과 프랑스 세르발 병력에 힘을 더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슬람, 기독교, 프랑스어권, 영어권 국가 등 8개국이 지원을 약속했다. 차드, 토고, 베냉, 세네갈, 니제르, 기니, 부르키나파소, 나이지리아, 가나는 3600명 규모의 다국적군을 파병할 예정이다.
군사개입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제한하는 적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1월 19일 "테러리즘이 패퇴할 때까지 프랑스군을 현지에 주둔시키겠다"(3)고 했다. 이것 역시 신중하지 못한 언사였다. 언어란 매우 중요한데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에서 3개월이 지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주둔 기간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고 번복하는 것은 놀랄 일이다. '딸꾹질 전략'이 다시 시작되는 것일까?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슬로건이 말리에 다시 출현했다. 슬로건의 주창자인 미국도 2009년 테러와의 전쟁을 폐기처분한 마당에 '테러와의 전쟁'의 재출현을 보는 것은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전쟁 발발시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정치적 배경에 대한 연구를 등한시한 채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수행한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고 강조한 바 있다.(4) 겨울철 감기나 장맛비를 사라지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테러리즘을 패퇴시킬 수는 없다. 단지 제한을 가할 수 있을 뿐이다.
테러 프레임 벗어나야 실마리 보여
테러는 어느 상황에서나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모든 게릴라 전투의 이론적 근간이다. 그렇다고 게릴라 전투가들을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할 필요는 없다. 놀랐는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아일랜드의 마이클 콜린스 같은 인물, 코소보해방군대(UCK), 이스라엘의 이르군 (Irgoun·시오니스트 군사조직), 그리고 '좋은 탈레반'과 함께 2014년 이후에는 불가피하게 협상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테러리즘'이라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 역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사색거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효과적으로 전략을 펼치려면 적과 목표가 신중하게 정의돼야 했고, 대통령은 '급진적인 사헬 지역 반군이 말리의 영토에서 항구적으로 물러날 때까지'라고 말해야 했다. 세르발 작전으로 이 합리적인 목표가 일단 달성되면 말리와 주변 동맹국은 구반군, 신반군, 무기 밀매자, 정부군 탈영병,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원리주의 와하비즘의 영향으로 급진화된 네오지하디스트, 종교와 상관없는 분리독립주의자 등 여러 갈래로 분리된 유령 같은 세력과 좀더 여유롭게 정치적 합의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왜곡된 안경을 쓰고는 지속적으로 변하는 혼란한 상황을 명확히 보기는 불가능하다.
말리와 사헬 지역,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정치적 혼란과 지난 10년 동안 대규모 예산 삭감을 경험한 프랑스군의 실질적인 능력에 비춰봤을 때 중기적 전략이 더 적절해 보인다. 프랑스 외무부와 국방부의 강경파들은 자신감에 차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군사력이 장기적으로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난 1월 대중에 공개된 국방과 국가안보 백서에서 세르발 작전이 어떻게 다뤄졌을지 궁금하다. 프랑스의 말리 내전 개입으로 여러 가지 질문과 의문이 생겼는데 이것을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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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올리비에 자제크 Olivier zajec 국제정치학자. 전략분쟁연구소(ISC) 연구원.
번역•임명주 myjooim@gmail.com
(1) 이 점에서 1월 15일 카타르의 하마드 빈 자심 알사니 총리가 프랑스가 말리 내전에 개입해서 말리의 지하드 세력과 맞서는 것을 비판하며 이슬람 수장국의 중재로 ‘지역에서의 대화’를 제안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 말리공화국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다. 망데, 송가이스, 도곤, 하사냐, 베르베르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다.
(3) 2013년 1월 10일에 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신년사.
(4) Scott & Al Kamen, ‘새로운 이름을 얻은 테러와의 전쟁’(Global war on terror is given new name), <워싱턴포스트>, 2009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