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 현장을 가다

2013-02-08     이재형

대선이 끝난 후 영화가에서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예상  밖의 흥행을 기록했다. 지난 1월 17일 현재 관객 500만 명을 넘겼고, 원작 소설의 판매도 20만 부를 넘길 것으로 본다. 다양한 버전을 통한 고전의 부활이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되는 가운데 원작의 무대였던 감동의 현장을 찾아가본다.

몽페르메유 마을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이 마들렌으로 이름을 바꾸고 시장 자리에까지 오르는 몽트뢰유 쉬르메르는 프랑스 파리에서 북쪽으로 230km가량 떨어진 도시다. 비록 빅토르 마리 위고는 1837년 9월 연인 쥘리에트 드루에와 함께 북부 프랑스 여행 중에 이곳에 들러 한나절밖에 머무르지 못했지만, 그가 쓴 <레미제라블>은 이 도시의 주민들이 출연해 매년 여름 벌이는 ‘레미제라블 축제’ 덕분에 이곳에 영원히 자리 잡았다. <레미제라블>에서 팡틴은 몽트뢰유 쉬르메르로 일자리를 찾으러 가다가 파리 동쪽의 몽페르메유라는 작은 마을의 테르나디에 여인숙에 3살짜리 딸 코제트를 맡긴다. 그리고 장발장이 팡틴의 부탁으로 코제트를 데리러 가다 한밤중에 만난 이 마을의 어두운 숲 속에는 실제로 1865년 ‘장발장샘’(작품에서는 뷔송샘)이 만들어졌다. 위고가 <레미제라블>에서 “몽페르메유는 숲 속의 마을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지금은 파리 북부의 여러 도시처럼 슬럼가로 변해 높은 실업률과 범죄율이라는 고질적 문제에 시달리는 빈곤한 도시에서 테르나디에 여인숙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상팽 풍차방앗간에서 봉디 숲까지 이어진 ‘코제트의 길’을 천천히 걸으며 그때 분위기를 잠시나마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위고는 1845년 9월 이 도시에 들렀다가 2주일 뒤 <레미제라블>을 쓰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레미제라블>의 시대적 배경인 1820~30년대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인 1832년 6월 민중혁명의 주요 무대인 센강 북쪽의 보부르 구역은 1850년대부터 레알 농산물 시장이 들어선데다, 1970년대 들어 퐁피두센터까지 세워져 모습이 크게 바뀌었다. 

뤽상부르 공원

<레미제라블> 2권에서 마리우스가 장 발장과 함께 산책하는 코제트를 보고 한눈에 반한 곳은 라탱가(街)에 자리한 뤽상부르 공원이다.  지금도 이 공원에서는 많은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고 있어 작품 속 분위기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역시 2권에서 장 발장은 자베르와 맞닥뜨리자 코제트를 데리고 도망치다가 담장을 넘는데, 그곳은 수녀원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구해준 포슐르방이 수녀원의 정원사로 있는 덕분에 코제트에겐 수녀 교육을 시키고, 자신은 포슐르방의 동생으로 신분을 꾸며 숨어 살게 된다. 작품에서 이 수녀원은 픽푸스 거리 62번지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레미제라블>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수녀원의 실제 모델은 지금의 팡테옹 남쪽 로몽 거리 32번지에 있던 생토르 수녀원이라고 한다. 이 수녀원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1832년 6월 5일(1832년 6월혁명 첫날), 마리우스는 플리메 거리(<레미제라블>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사랑을 나누는 장소인 플리메 거리도 센강 남쪽에 있는데, 작품 속의 플리메 거리는 지금의 플리메 거리가 아니라 실제는 센강 남쪽 14구에 있는 우디노 거리다. 그리고 1829년 말 장 발장과 코제트가 자리잡은 곳도 같은 장소다)를 나서 샹브르리 거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로 간다. 그리고 장 발장 덕분에 이 거리에서 살아 나온다. 나중에 그는 아내가 된 코제트와 피으뒤칼베르 거리에서 살게 될 것이다.

센강을 건너 파리 동쪽의 바스티유 광장에서 멀지 않은 피으뒤칼베르 거리 6번지에서는 마리우스 퐁메르시의 할아버지인 부유한 부르주아 질노르망이 살았다. 아버지가 워털루 전투에서 전사한 대학생 마리우스는 민중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발견하고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든다.

생폴생루이 성당

피으뒤칼베르 거리에서 서쪽으로 걸어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파리 동부 마레 지구의 보주 광장으로 가보자. 위고 가족은 1832년 6월혁명의 열기가 사라진 뒤 같은 해 10월 이 광장 6번지로 이사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1845~62년 <레미제라블>을 탄생시킨다.

보주 광장 왼쪽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세비네 거리 11번지에는 코제트의 후견인이라고 자처하는 테나르디에가 살인미수 혐의로 자베르에게 체포되어 갇혀 있다 탈출한 포르스 감옥의 외벽이 있었다. 이제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든 이 벽에는 순찰로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길 건너편의 파베 거리 24번지에 가면 지금은 도서관으로 쓰이는 라미뇽 저택이 있는데, 이 저택 오른쪽 벽면이 바로 포르스 감옥의 담이었다.

세비네 거리 11번지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최근 보수공사를 마쳐 눈에 한층 더 잘 띄는 생폴생루이 성당이 보인다. 이 성당에서 1833년 2월 16일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결혼식을 올린다. 지나가는 길에 한마디 덧붙이면, 위고가 가장 사랑한 큰딸 레오폴딘도 이곳에서 1843년 2월 15일 샤를 박크리와 결혼식을 올린다. 이 성당에 들어가보면 위고가 딸 결혼식을 기념하는 뜻에서 기증한 성수반 두 개가 아직도 매달려 있다.

생폴생루이 성당 앞을 지나 리볼리 거리를 50m가량 걷다 오른쪽으로 나 있는 레자르시브 거리로 접어들면 바로 브르리 거리가 나타나는데, 이 거리 16번지에서 'ABC의 벗' 멤버인 쿠르페이락이 살았다. 쿠르페이락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이 거리로 이사를 왔는데, 모순에 가득 찬 사회적 현실에 분노하는 서민들이 모여 사는 이 거리야말로 혁명의 불꽃이 되살아나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고르보 여관(<레미제라블>에서 여러 가지 극적 사건이 발생하는 여관으로 파리 동쪽 오스테를리츠 기차역 앞으로 나 있는 오피탈 대로 50~52번지를 점유했는데, 이 동네는 1820년대만 해도 파리와 파리 외곽을 나누는 성벽이 근처를 지나가는 빈민가였다)에서 테나르디에가 자베르에게 체포되자 주소를 바꾸어야만 했던 마리우스는 쿠르페이락에게 잠시 재워주고 먹여줄 것을 간청한다.

보부르의 바리케이드

1832년 6월 1일, 라마르크 장군이 같은 해 2월부터 파리에 잠복하며 시민 2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콜레라에 희생되었다. 루이 필리프 왕에게 맞섬으로써 프랑스 국민에게 인기가 많았던 그의 장례행렬은 6월 5일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나 장지인 랑드로 향하기 위해 파리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행렬이 바스티유 광장을 지나 오후 2시쯤 지금의 오스테를리츠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다리 초입에 다다랐다. 바로 그때 그 근처의 앙리 4세 대로에 자리잡고 있던 용기병 부대 건물에서 병사들이 갑자기 튀어나왔고, 잠시 후 근처 부르동 대로 쪽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시위자들은 흥분했고, 또 다른 용기병들이 부대에서 쏟아져나와 군중에게 발포하자 시위는 한층 더 격렬해졌다. 그러자 용기병들은 바스티유 광장 근처에 있는 스리제 거리와 프티뮈스크 거리로 일단 후퇴했다.

같은 날 밤, 시위자들이 파리의 주요 지역을 점거했다. 군과 공화주의자들은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군은 국민방위군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결국 권력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1832년 6월혁명은 1830년 혁명 당시 봉기했던 국민방위군의 부르주아들에 의해 피로 물들었다.

6월 5일 저녁, 두 개의 바리케이드가 혁명군에 의해 보부르 동네에 세워졌다. 하나는 생마르탱 거리와 생메리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또 하나는 생마르탱 거리와 생모뷔에 거리가 만나는 지점에 세워졌다. 이 바리케이드는 생마르탱 거리 30번지에 자리잡은 혁명군 사령부를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정규군과 국민방위군은 마지막으로 이 사령부를 점령하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그리고 1832년 6월혁명은 이틀 만에 막을 내리면서 집단의 기억으로부터, 심지어 이 혁명의 주역들을 '길 잃은 형제들'이라고 부른 공화주의자들의 기억으로부터 지워져야 할 오류로 간주되었다.

몽데투르 거리

영원히 잊힐 뻔한 이 민중혁명은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1832년 6월혁명이 발발했을 때 장 발장은 코제트와 함께 롬아르메 거리 7번지에 살았는데, 실제 존재하지 않는 롬아르메 거리는 지금의 브르리 거리에서 50m쯤 북쪽으로 가면 나타나는 자르시브 거리 40번지와 일치한다. 장 발장은 이웃 사람들이나 경찰이 수상쩍게 생각하지 않도록 센강 남쪽의 플리메 거리와 우웨스트 거리, 그리고 롬아르메 거리에 집을 동시에 빌렸다.

1832년만 해도 레알 지하철역의 랑뷔토 거리 쪽 출구와 몽데투르 거리 쪽 출구 사이에는 <레미제라블> 덕분에 유명해진 'ABC의 벗' 멤버들의 모임 장소인 코랭트 술집이 있었다.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이 술집 주변에 샹브르리 거리의 바리케이드 두 개를 세운다. 이 작품에서 바리케이드가 세워진 샹브르리 거리는 지금의 그랑드트뤼앙드리 거리와 프레쇠르 거리의 중간, 랑뷔토 거리의 북쪽으로 설정되었다.

생드니 거리에서 샹브르리 거리로 들어서는 행인은 마치 좁은 깔때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이 거리가 조금씩 좁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척 짧은 이 거리 끝까지 가보면 그는 죽 늘어선 높은 집으로 차단되어 있는 시장 쪽 통로를 발견하는데, 만일 좌우에 긴 구덩이 같은 게 있어 그리로 빠져나갈 수 없다면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몽데투르 거리로, 한쪽은 프레쇠르 거리로 이어지고, 또 한쪽은 시뉴 거리와 프티트트뤼앙드리 거리로 이어진다.

일종의 막다른 골목 안쪽, 오른쪽 구덩이와 만나는 모퉁이에 다른 집들보다 낮고 꼭 무슨 곶처럼 길거리로 삐죽 나와 있는 집이 한 채 있었다. 2층밖에 안 되는 이 집에 300년 전부터 유명한 술집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 두 개의 바리케이드가 동시에 세워졌는데, 둘 다 코랭트 술집에 기대여 있으며 직각을 이루고 있었다. 큰 바리케이드는 샹브르리 거리를 봉쇄했고, 다른 바리케이드는 시뉴 거리로 이어지는 몽데투르 거리를 봉쇄했다."(<레미제라블>, 제4권 12부)

노트르담의 다리

1789년 프랑스혁명의 현장인 센강 북쪽의 바스티유 광장 한가운데에는 나무와 석고로 만든 높이 24m의 코끼리상이 1812~40년 버티고 서 있었다. 원래 나폴레옹은 이 코끼리상을 대리석으로 만들어 프랑스 국민의 힘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삼으려 했으나, 돈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빅토르 위고는 이 코끼리상 안에서 살고 있는 한 소년을 우연히 보고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가브로슈의 캐릭터를 상상해냈다.

1832년 6월 5일, 마리우스는 가브로슈가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쪽지를 주고 롬아르메 거리로 가서 코제트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코제트가 아닌 장 발장에게 쪽지를 전해준 가브로슈는 숌므 거리(현재의 랑뷔토 거리와 오드리에트 거리 사이에 있는 자르시브 거리 일부)와 비에이으오드리에트 거리(지금의 레조드리에트 거리), 장팡루즈 거리(지금의 파스투렐 거리와 포르트프앵 거리 사이에 있는 레자르시브 거리의 일부)를 지나 샹브르리 거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가브로슈는 샹브르리 거리에 세워진 바리케이드 앞에서 총탄을 줍다가 진압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바리케이드가 세워진 거리에 사는 주민들이 혁명군을 외면하면서 1832년 6월혁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장 발장이 바리케이드를 사수하다 총에 맞은 마리우스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친 하수도는 에펠탑 근처의 알마마르소 옆 박물관에 있어 긴박한 상황을 몸으로 느껴볼 수 있다. 1832년 6월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나서 자베르는 노트르담 다리의 센강 우안 모퉁이에서 센강으로 몸을 날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거의 평생 장 발장을 쫓다가 결국 6월5일 혁명을 일으킨 민중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샹브르리 거리까지 그를 잡으러 갔다. 하지만 혁명군에게 발각되어 처형될 뻔했으나 장 발장은 그를 한쪽으로 데려가 놓아주고, 자베르는 회한에 휩싸여 장 발장 추격을 포기하고 세상을 하직한다.

그러나 1832년 6월혁명의 불씨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높은 물가상승률과 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월급인상률, 그로 인해 견고하게 고착된 빈곤, 이익을 독식하는 대기업, 실업에 대한 일상적 공포, 무거운 세금, 비인간적인 법률, 효율적이지 않은 정부…. 이것이 2013년 현재 프랑스의 모습이다. 이같은 상황은 한국이라고 해서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니, 프랑스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레미제라블>이 한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끄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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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이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