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봄, 다양한 질문 꽃피는 향연
무대 위에 자기 몸을 제어하지 못하는 노인이 울고 있다. 출근하려던 중년의 아들은 결국 와이셔츠 소매를 걷은 채 기저귀 위로 넘쳐나는 변을 주체하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다니며 난감해하고, 무력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것은 "미안하다"는 말뿐이다. 무대 뒤편 관객석을 향해 서 있는 거대한 예수의 얼굴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장면은 점차 예수의 얼굴을 향한 공격으로 이어진다. 노인이 여전히 괴로워하며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이 무대로 나와 이 얼굴을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이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커다란 폭발음으로 증폭된다. 연극은 신과 인간, 아버지와 아들, 사회 속 여러 세대 간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투영하는 이같은 구조를 통해 비극적 상황 속에 던져진 인간의 삶에 대한 질문을 털어놓는다. 오랫동안 무대에서 사라졌던 신의 존재가 다시 소환됐고, 강렬한 빛과 음악적 장치가 관객으로 하여금 감각이 지성을 관통하는 순간을 유도한다.(로메오 카스텔루치, <신의 아들을 바라보는 얼굴의 컨셉에 대하여>)
'다원예술'로 여는 한 해의 시작
일본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카다 토시키는 지극히 일상적인 상황과, 정제되지 않은 구어체의 말투를 그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몸짓과 붙이고, 그것의 반복을 통해 분열적 상황을 구축하는 독특한 연극 방식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런 그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한 뒤 전작에 비해 매우 느리고 조용한 연극으로 돌아왔다. 그의 신작 <현재지>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가상의 마을을 설정하고, 그곳의 사람들이 불특정한 사건의 도래에 대해 가지는 예감과 불안, 그리고 공포를 담담하고 예민하게 풀어놓은 픽션으로, 재난의 시대에 놓인 삶의 조건과 인간 심리에 대한 조용한 응시가 반영돼 있다. 한편 1년간 직접 기른 양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세계의 폭력적 경제구조에 대항하는 증여 관계의 가능성을 시도하는 젊은 작가 남동현은 발랄한 전반부에서 과연 그런 대칭적 관계가 실현 가능한지에 대한 어두운 질문으로 전환하는 무대를 만들었다.(남동현, <양의 침묵>) 또한 안무가 노경애의 작업 <Mars II>는 탄성, 마찰, 가속도과 같은 물리학적 개념을 적용한 동작을 하나씩 풀어 설명한다. 무용이 결국 몸와 세계의 물리적 조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임을 상기시키는 각각의 동작은 이윽고 음악을 만나 어느덧 유쾌한 '우주적' 리듬의 안무를 구성한다. 이외에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족 구성원이 겪는 삶의 변화를 애틋하게 그린 재커리 오버잰의 <네, 형 기억해?>, 아이디어의 발현에서부터 공연의 완성까지 관객의 생각에 복종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문화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다니엘 콕의 <Q&A>까지, 극장이 질문과 사유의 장으로 바뀌고 있다. 극장을 나온 관객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게 하는 것이 4월 현재 프로그램의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페스티벌 봄'(이하 페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페봄은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축제가 되었다. 기존의 축제나 비엔날레와 같은 행사들이 보통 여름과 가을에 집중돼 있었다면, 페봄을 시작으로 축제의 시기는 모든 계절로 연장됐다. 페봄의 이름은 해당 축제가 열리는 계절을 각인시키는 것과 동시에 '보다'라는 단어의 축약형인 '봄'을 통해 이곳이 말 그대로 '본다'는 행위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기획임을 강조하고 있다. 보는 것은 이내 통합적인 감각의 체험으로 다시 지적 체험에서 확장된 현재에 대한 질문들로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페봄은 연극, 무용, 음악, 미술 각계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이 페스티벌이 초창기부터 주창해온 '다원예술'의 개념이 다양한 장르의 교차와 충돌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장르의 방식을 아울러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작업, 특정 장르로 지칭할 수 없는 형식의 예술을 가리키는 다원예술의 개념은 사실 행정적 용어로서 예술 지원을 위해 2000년대부터 사용됐다. 페봄은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국제다원예술축제를 표방하면서 다원예술 개념의 구체적 예시이자 기준이 되기도 했다.
특정 장르로 분류될 수 없음을 특징으로 하기에 '다원예술'의 정의를 내리고 분석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이 단순히 기존 장르 사이의 접합을 시도하거나 해당 장르 전문가들 사이의 협업을 통해 이뤄내는 공동 작업과 달리 어떤 태도의 문제와 관련 있다는 것이 그 정의를 더욱 어렵게 한다. 작업 방식에 대한 열린 접근, 세계의 변화에 대한 예민한 레이더로서의 예술가가 포착하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 거대한 구호가 아닌, 개개인의 특정화된 목소리로 발화되는 위트 있는 질문의 형식들이 다원예술의 유효성을 증명한다. 다원예술의 특징이 예술가 사이의 단순 교류과 매체 단위의 실험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서현석 연세대 교수(커뮤니케이션대학원)는 다원예술의 성격을 "각자 장르가 가지고 있던 매체의 개념을 장치로 치환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장치'(Apparatus)라는 용어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를 위해 작동하는 모든 정치적·역사적·이데올로기적인 조직과 관계들에 대한 총칭"이며 이를 통해 "서로 본질이 다르면서도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복합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고정적인 것과 가변적인 것이 상호작용하는 장"(1)이 바로 다원예술이라는 것이다. 각 매체를 구성하는 기관과 그 구조를 장치로 내려놓고 그 사이의 수평적 관계맺음을 통해 발생하는 사건과 에너지의 흐름으로 보는 다원예술의 개념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컨템포러리 아트' 전반에 대한 설명으로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덧 7회를 맞이하면서 페봄은 작가와 전문가를 중심으로 각광받던 축제에서 일반 대중에게로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다. 페봄은 2007년의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이라는 전신을 통해 '다원예술 축제'로서의 성격을 정의하기 시작한 워밍업 기간을 가졌다.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의 상륙
올해 한국을 찾는 제롬 벨, 로메오 카스텔루치, 윌리엄 포사이스는 당시의 프로그램에도 소개된 바 있다. 동시에 페봄의 시작은 김성희 디렉터가 2002∼2005년에 기획한 '모다페'(Modafe·Modern Dance Festival)의 프로그램들로부터 연장된다. 당시 모다페는 유럽을 중심으로 무용계를 흔들던 컨템포러리 댄스의 새로운 조류를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고 덤 타입, 빔 밤데키부스, 메그 스튜어트, 에미오 그레코/PC와 같은 안무가들이 연달아 한국을 방문했다. 특히 2005년 제롬 벨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안무의 수행성을 전면에 내세우며 화제를 모았다. 표현적 메시지 전달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춤판에서 신체를 이용한 시공간의 탐구, 그리고 몸을 통한 사유의 방식으로 무용을 재정의하는 데 일조한 모다페의 프로그램들은 시각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무용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다페에서 여전히 무용이 중심축이었다면 스프링웨이브 페스티벌은 설치미술과 공연의 경계에 있는 작업(크리스티앙 리쪼, 윌리엄 포사이스, 나디아 로로)을 통해 장르 간의 사건 발생을 도모한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미술에서 퍼포먼스가 다시 활발히 재조명되기 시작한 흐름과도 시기를 함께한다. 역사적 퍼포먼스의 재연(Reenactment)에서부터, 뉴욕의 퍼포먼스 페스티벌 퍼포마(Performa) 및 <Theater within a theater>와 같이 총체예술의 관점에서 공연예술과 미술의 역사를 섭렵하는 대규모 전시, 제롬 벨과 티노 세갈, 자비에 르루아와 같은 안무가 출신의 작가들이 미술관 전시에 개입하는 흐름으로 퍼포먼스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증대되는 상황에서 모다페와 스프링웨이브가 제안하는 작가들의 작업과 맥락은 미술에서도 생경한 경험은 아니었다. 특히 페봄은 시각예술 작가들에게 극장 공간을 실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관객과의 직접적 접촉이 없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와 달리 특정 시간, 한자리에서 관객과 조우하는 공연 형식의 경우 작가들로 하여금 시간과 시선을 정의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주었고, 작품의 형식적 영역뿐 아니라 개념적 조합의 범위도 넓혀주었다. 스프링웨이브에서부터 매년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는 홍성민 작가의 경우 무대 실험에서 공연예술 장르의 문법에 대한 메타언어적 차원으로 작업을 확장해가고 있다. 2009년 한강유람선과 강변을 무대로 치환한 <S.O.S> 이후 2011년 고문의 희생자이자 장기복역수였던 실존 인물을 통해 상흔의 실체를 무대로 소환한 임민욱 작가의 <불의 절벽>, 그리고 무용 같은 비물질적 형태의 예술 아카이브를 무대 위의 시간이라는 형식으로 재구축하는 남화연 작가의 <이태리의 정원>(2012)에 이르기까지 미술작가들의 시선이 공연의 장치와 만나 서로에게 신선한 자극과 체험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은 페봄이 가져온 여러 성과 중 하나다.
무용에서 미술로 접촉면을 확장해간 페봄이 다소 주춤하던 연극계의 반응과 관심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2009년 리미니 프로토콜의 <자본론>을 소개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리미니 프로토콜은 일반인들이 무대에 올라와 그들의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다큐멘터리 시어터' 방식을 실험하는 독일 극단으로, 이 연극에서는 자신의 삶이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연계된 사람들이 무대에 올라 대화하는 공연을 선보였다. 재현과 실제 사이를 오가는 이 작업은 개인의 미세한 경험들을 모아 시대의 모습과 사상의 지도를 구현하는 방식인데, 우리나라에 <자본론>을 처음으로 번역한 강신준 동아대 교수(경제학)가 무대로 초청되기도 했다. 이 작업은 독일의 연극학자 한스 티스 레만의 동명의 저서에서 촉발된 것이자, 전통 연극의 절대적인 드라마적 기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바탕으로 연극적 서사와 형식의 다양성을 제안하는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 논쟁을 한국에서 전개하는 데 공동의 예시가 될 수 있었다.
아시아 아티스트 발굴의 한마당
장르 간의 교차와 영역 확장에 성공한 페봄이 현재 본격적으로 전개하는 기획의 방향은 신진 작가들의 발굴과 국내 작가들의 작품 제작이다. 한동안 페봄이 해외의 주요 작업들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회로 알려졌다면, 점차 한국 작가들의 신작 프로덕션 비중을 늘리고 또한 아시아 작가들에 대한 리서치를 확대하면서 아시아의 특수성과 현실의 문제를 건드리는 작업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페봄 스스로도 2010년부터 '다양한 문화적 배경, 특히 아시아 아티스트를 발굴, 소개한다'라는 구호를 새로 내걸며 이같은 작업에 본격적으로 매진할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전체 프로그램 중 한국 작품의 비중도 2012년 22작품 중 9작품에서 올해는 27작품 중 13작품인 절반으로 늘어나, 현격한 증가세를 보여주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페봄은 현재 해외 관계자들이 한국 작가들의 리서치를 위해 찾아오는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실제로 페봄에 소개된 작업이 해외에서 이미 공연됐거나 새로운 공연 일정이 잡히는 등 본격적인 아웃바운드의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비공공기관에서 이처럼 장기간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축제의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페봄이 매년 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장르적으로 서로 다른 타자들 간에, 그리고 국내와 해외의 다양한 시선 간에 교차하는 충돌과 자극을 통해 접촉 반경을 넓혀온 페봄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곳, 내부의 삶을 향해 집중하기 시작한다. 카메라의 렌즈를 줌인해 대상의 세밀한 삶의 면면과 변화를 목도하는 동시에 세계 전체와 수평적으로 줌아웃하려는 페봄의 앞으로의 전개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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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해주 독립큐레이터. 백남준 아트센터 어시스턴트 큐레이터(2008), 국립극단 연구원(2011∼2012). 현재 국립극단 발행 <연극> 및 문지문화원 사이의 다원예술 아카이브 '아트폴더'의 편집위원. 오는 6월 프랑스 파리 팔레드도쿄에서 열리는 전시 <메모리얼 파크>를 준비 중이다.
(1) 서현석, 페스티벌 봄:극장, 역사, 신체의 삼각관계, 혹은 공연예술의 장치론, 국립극단 반연간 <연극> 1호, 2011년,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