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방임과 자유주의는 동의어인가
주변부 지식인에서 반생산주의적(Antiproductiviste) 저항의 상징으로 부상한 철학자가 있고, 한편에는 고등사범학교(ENS) 출신으로 서른도 안 된 나이에 모교에서 세미나를 주최하는 학자가 있다. 영민한 두 지식인의 작업은 현재 프랑스 좌파의 사상적 모색의 두 극단을 보여주는 예다.
장클로드 미셰아와 조프루아 드 라가느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대척점에 있다. 미셰아는 문화적 자유주의뿐 아니라 경제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격렬한 비판을 가한다. 반면 라가느리에게 자유주의는 '상상력의 요람'이다. 그러나 두 자유주의가 서로 연결돼 있다고 보는 것에서 두 사람의 관점이 일치한다. 두 사람이 공히 오류를 저지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미셰아는 여러 저서에서 "도덕과 문화에 대한 항상적 위반을 지지하는 이들이 '세계 금융의 약탈자'들에 대한 비판이라는 좌파의 정치적 영토를 잠식했다"는 주장을 펴왔다.(1) 라가느리는 최근 저서에서 비슷한 관점을 피력한다. 미셸 푸코를 사숙한 이 젊은 학자는 지나친 노파심에서 좌파의 '권위주의적 충동'을 경계한 나머지 시카고학파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다원주의'를 그것에 대비시킨다.(2) 조지 오웰과 크리스토퍼 라시(1932~94·미국의 사회학자)를 자주 인용하는 미셰아는 무엇보다 좌파의 대중적 전통을 되살리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는 좌파가 부르주아적이고 상업적으로 변질됐으며 '지식인연한다'며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그는 "사회주의적 프로파간다는 그것이 누구보다 '못 가진 자'를 향할 때만 의미가 있다"며 "매일같이 스포츠신문 <레퀴프>를 애독하는 공장 노동자, 금요일마다 로또를 구입하는 가사도우미 여성, 낚시광인 사무직 노동자,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노파 같은 이들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
서로 대립하는 이상적 전형(축구를 좋아하는 씩씩한 노동자와 자전거를 타는 파리의 부르주아)을 구축하는 것은 교육적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유머와 분노를 자극한다. 그러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표면적 이미지만 제공할 위험도 있다. 가령 한쪽은 활력 있고 솔직하며 동지애가 넘치고, 다른 한쪽은 쾌락과 책략, 이윤만을 추구한다는 식이다. 미셰아가 생각하는 인민은 영화 <멋진 팀>(La Belle Equipe)의 장 가뱅 같은 인물이다. 덩치도 좋고 프랑스적이며 가장 노릇을 하는 남성 말이다. 반면 그가 비판해 마지않는, 모더니티에 열광하는 좌파는 갈수록 줄어드는 <리베라시옹>과 <앵로큅티블>(록음악 독립잡지) 등의 독자로 표상된다. 미셰아가 보기에 이 좌파들의 '진보주의'는 "과거의 모든 흔적과 뿌리를 하나하나 제거하려는 목적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서민 계층이 사는 게 갈수록 힘들다고 느끼는 것은 예전이 지금보다 좀더 나았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미셰아의 눈에 현재의 좌파와 극좌파는 너무 '현대적'이다. 반대로, 라가느리는 좌파가 충분히 현대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라가느리는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를 상기하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공격 속에 권위적·관료적 세계에 대한 향수가 숨어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위대한 급진적 사상가들이 고민했던 중대한 문제와 만난다. 모든 비판적 기획의 중심에 필연적으로 도사리는 복고주의적·반동적 충동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동적으로 기존 질서에 대해 찬동하고 그것을 그리워하는 태도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현 질서를 비판할 것인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공연히 신자유주의가 이미 해체한 것, 전(前) 자유주의적 가치에 의존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기획이 어떻게 가능할까?"
깊이를 결여한 지성인 범주
미셰아와 라가느리의 관계는 대립적인 동시에 상호보완적이다. 한쪽의 주장이 없었다면 다른 쪽이 그 주장을 대신 내세웠을지 모른다. 미셰아는 "전통적으로 부과된 '도덕적·자연적 한계'의 파괴야말로 자유주의에 필수적인 문화적 측면을 이룬다"고 지적한다. 라가느리는 신자유주의의 발명 속에 내재된 긍정적 관점을 옹호하면서 그것이 '소수자들의 결집'을 자극했고, '규율 권력 작동의 기초에 대한 급진적 비판'을 가능케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 경제학자 개리 베커(1930~ ) 같은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이 국가와 사회적 통제 메커니즘의 정당성을 비판함으로써 개인적 자유 영역을 확장시켰다고 본다. 이들은 모든 인간의 결정은- 결혼이나 범죄까지도- 사실상 경제적 계산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중요한 도덕적 판단, 정신의학적 소견, '개인을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로 구분하는 작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시카고대학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뒤를 이은 셈이다.(4) 두 사고 체계 사이에는 일종의 접점이 존재한다. 미국의 자유주의자 중에는 마리화나 합법화, 동성애자 결혼 권리, 사회복지의 완전한 철폐를 동시에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로널드 레이건, 마거릿 대처, 덩샤오핑 등은 신자유주의의 도입과 국가의 사회적 통제와 억압이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했다. 반대로 이 세상에는 금융자본주의 체제를 혐오하는 예술가, 자유사상가, 무신론자, 불면증 환자, 마약중독자가 넘쳐난다. 미셰아와 라가느리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때로는 슬그머니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대립적 명제는 텍스트를 인용하거나 해석하고, 범주를 재구성할 때는 매우 매력적이고 일관적으로 보이지만 사회학적 깊이와 역사적 운명에 대한 질문은 결여돼 있다. 미셰아는 "'어떤 영역이든'(5) 예전이 더 나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좌파 활동가를 식별하는 결정적 단서가 된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는 어떤 종류의 좌파 활동가들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정말 모든 좌파 활동가가 '오르페우스 콤플렉스'(미셰아의 책 제목)에 사로잡혀 있다고 믿는 것일까? 즉 '뒤돌아보지 말라는 종교적 금기'에 겁을 집어먹은 채, '역사의 의미에 대한 형이상학적 믿음'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일까? 그러나 최근까지 좌파가 욕먹은 이유는 과거에 대한 향수, 팡테옹(프랑스 국립묘지)에서 시작된 좌파 집권 정부들의 실패(미테랑이 대선 승리 뒤 팡테옹에 장미꽃을 바친 일화를 빗댄 표현), 추모에 집착하는 성향 때문이 아닌가.(6)
미셰아는 우파가 더 이상 반동적이지 않다는 과장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정의가 그렇듯이, 그가 정의하는 반동의 개념은- 전(前) 자본주의적, 구체제(Ancien Régime)에 대한 향수, 교회권력에 대한 복종 등 - 여전히 지나간 과거에 머물고 있다. 그렇기에 좌파와 우파를 싸잡아서 모더니티, 시장, 개인주의, 뿌리의 부정, 보헤미안적 범세계주의(Cosmopolitanisme) 등에 정신이 팔려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가톨릭 신자들이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다든지, 일부 우파 인사들이 공공연히 프랑스혁명과 인민주권에 적대적인 발언을 내놓는다든지 하는 것을 보면 프랑스의 반동주의자들이 샤를 모라스(1868~1952·극우민족주의자)와 함께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라가느리는 신자유주의의 정치사에는 관심이 없지만, 피노체트가 밀턴 프리드먼에게 자문받았고, 레이건과 대처가 하이에크와 베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상가들 덕분에 "범죄를 과장 없이 고찰하게 되었고, …도덕적·도덕주의적 범주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함께 형사체제 전체가 붕괴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빠졌다. 이 체제가 범죄자를 병리학적으로 바라보는 정신의학적 권력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가난을 범죄시하고 기록적인 사형 집행을 달성한 레이건과 대처의 시대(피노체트는 말할 것도 없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마 자유주의자들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그런 식의 억압은 "경찰 병력, 사법기관 운영 등과 관련해 비싼 비용을 치러야 한다. 따라서 모든 범죄자를 적발하고 벌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리석다. 그런 생각을 정책에 반영한다면… 그것이 사회에 가져다주는 이익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것이다."
미셸 푸코의 '실패한 게임'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계산은 달랐다. 그들은 계산 결과를 글로 발표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공공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관여했다. '범죄의 경제학'에 경도된 이론가들은 여전히 실증주의적 태도를 견지한 채 모든 종류의 범죄(절도와 강도, 살인, 보안·감시 시스템, 보험, 정신적 장애 등)가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을 고려한다면 수형시설에 대한 예산 지출을 유지하거나 늘리는 것이 더 이익이 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범죄자가 범죄행위에 앞서 그 대가를 계산하는 게 사실이라면, 비용 대비 이익이 보잘것없다는 합리적 주장을 입막음하기 위해 범죄의 대가(장기 징역, 수형자 학대, 사형 등)를 갈수록 무겁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사변적인 결론은 급진적 자유주의자를 자유주의적 사법, 형사체제로부터 완전히 떼어놓게 된다. 1978~79년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정반대의 패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뒤, 게임은 그의 패배로 결론이 났다.
지적인 모색은 계속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론에 대한 우호적인 재해석도, 지나간 세기의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도 지금의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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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발행인. 파리8대학 정치학 교수. 저서로 <새로운 경비견>(Les Nouveaux Chiens de garde·2005) 등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Jean-Claude Michéa, <Les Mystères de la gauche: De l’idèal des Lumières au triomphe du libèralisme absolu>(좌파의 미스터리: 계몽의 이상에서 절대 자유주의의 승리까지), Climats, Paris, 2013.
(2) Geoffroy de Lagasnerie, <La Dernière Leçon de Michel Foucault: Sur le nèolibèralisme, la thèorie et la politique>(미셸 푸코의 마지막 가르침: 신자유주의, 이론, 정치에 대하여)>, Fayard, Paris, 2012.
(3) Jean-Claude Michèa, <Le Complexe d’Orphèe: La gauche, les gens ordinaires et la religion du progrès>(오르페우스 콤플렉스: 좌파, 평범한 사람들, 진보에 대한 신앙), Climats, p.67, 2011.
(4) 1960년대 말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광고를 포함한, 자본주의사회의 사회적·문화적 형식에 대한 혁명적 비판이 진행됐고, 당시 학생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5) 강조는 미셰아. <Les Mystères de la gauche>(좌파의 신비…), op. cit., p.31.
(6) Pierre Rimbert, ‘L’histoire ne repasse pas les plats’(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4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