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즘적인 김정은의 책략
김정은의 고모부가 굶주린 사냥개들의 먹이가 되어 처형당했다는 끔찍한 보도가 홍콩 타블로이드 신문 문회보(文匯報)에서 비롯된 풍자적 이야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서양의 인권 전문가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북한은 그저 나치 히틀러나 구소련 스탈린, 또는 과거 크메르루즈의 폴 포트를 빼 닮은 무자비한 미치광이 독재자가 쥐락펴락하는 국가일 뿐이다.
이안 버렐은 작년 10월 영국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 정권은 수천 명에 달하는 주민을 살해·감금한 죄로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기소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참고사이트: http://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3/oct/29/north-korea-joke-serious-kim-jong-un)
버렐은 김정은과 그의 정부요인들을 평양에서 납치해 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로 제안한 (분명 007 제임스 본드에게 주어질 만한 미션!) 이 공개 재판이 북한의 정치범 및 주민 전체를 위해 무엇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의 주장은 인권에 대한 자유민주적 인도주의 담론이 얻게 된 거의 완전한 오명은 물론이거니와 북한과 관련해 논리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는 현 상황을 나타낸다.
북한 공산당 체제 내부에서 일어난 김정은 “가족 간의 불화”는 남한 정치의 특징인 자유 외교와 비교할 때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나 영화 <대부3>를 더 연상시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북한과 남한 사이에 너무 뚜렷한 경계를 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분명 두 국가 간에는 엄청난 헌법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북한은 일당체제 국가이다. 주체 사상이라는 최고 지도부에 대한 존경 및 유지를 위해, 정치적 종교 아래 (물론 김일성은 주체란 인민이 우선시되는 사상이라고 항상 주장했었다) ‘인권’이 설 자리는 없다. 그러나 김씨 일가의 체제를 다수의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들의 집단으로 단정 짓기 이전에, 한 가지 기본적인 뼈아픈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즉, 북한 지도부의 행동은 엄밀히 말해 여전히 전시(戰時) 중인 한반도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지정학적 긴장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대한 마키아벨리식 책략의 관점에서 볼 때, 김정은의 무자비한 국정 운영 기술은 모든 정치의 작용 방식과 완전히 일치한다. 15세기의 정치 천재로 자본주의 기업가들에게 존경 받은 것으로 알려진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읽는다면 정부와 국민 간의 사회 계약을 언급한 부분은 한 군데도 찾지 못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가장 도덕적인 지도자가 가장 효과적인 정부를 가능케 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여겼다. 마키아벨리라면 그 어떤 정직한 박애주의자보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스트리트>에 등장하는 사기꾼 악당 고든 게코를 더 선호할 것이다. 그렇다면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누구인가?
146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의 젊은 시절은 수수께끼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태어나 그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마도 피렌체 대학에서 수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94년 이 도시를 지배했던 메디치 가문(은행가 집안으로 당시 피렌체 정계를 지배)이 몰락하면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관으로 임명되고 떠올랐다. 그는 서기관을 지내는 동안 이탈리아 경쟁국들을 왕래하며 외교관으로서 또한 정치 전략가로서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다.
1512년,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지배권을 다시 회복하며 공화정을 무너뜨렸다. 마키아벨리는 그 이전 그리고 이후로도 결국 불행히 전쟁의 패자가 되어왔던 그토록 많은 공화주의자들의 운명을 초기에 겪게 된다. 그는 메디치가에 대한 반란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억울하게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석방된 이후 그는 시골로 내려가 자신의 외교경험을 바탕으로 정치사상을 가다듬는 데 여생을 보낸다.
강압은 모든 정치의 주요 고려 사항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마키아벨리의 시각은 다소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정치 세계, 그리고 우리가 무자비한 독재자와 권력의 정치적 악용에 느끼는 매력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마키아벨리는 모든 인간이 악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 개혁 도입 등을 통해 이에 대한 도덕적 이슈를 부각시켜 해결책을 강구하기보다는, 어떤 기간 동안 통치하고자 하는 리더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상황에 따라 필요한 경우 지도자들이 마음대로 잔인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물론 마키아벨리는 그러한 행동이 매우 정당하다고 인정하지만 말이다). 대신에, 이는 사악한 행동이 “모든” 정치적 사유에 개입되어야 하며 통치 전략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정치적 정당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인권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북한은 분명 완전히 다른 경우로, 이 “깡패 국가”의 사악한 통치 체제 및 주민 감시 전략은 우리가 남한 및 서양에서 혜택을 받고 있는 인도적인 자유 헌법과는 정반대이지 않은가?
마키아벨리의 정치관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그 차이란 정도의 차이이지 종류의 차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정치란 항상 한편으로는 노골적 공격성 또는 물리적 강요, 다른 한편으로는 좀 더 부드러운 설득의 기술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찾는 문제이다. 영어로는 종종 “당근과 채찍의 접근방법”이라 불린다. 즉, 당나귀가 당근으로도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을 사용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이 지나친 고문과 억압에 의존하는 것은 그 지도부가 정신이 나갔거나 피해망상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당근보다 채찍에 의지한다는 것은 정부에 대한 주민의 지지, 또는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무장한 예언자는 성공하는 반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한다”고 했다. 남쪽 이웃국가의 대체적으로 이상적이고 “관대한” 통치와 비교했을 때, 북한 정부를 독재정권으로 특징짓는 것은 강압적 조직의 노골적 공격성, 전쟁 준비태세를 갖춘 것으로 여겨지는 점에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에 바탕을 둔 자신의 권력을 군사 퍼레이드를 통해 정당화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또 물론 그럴 필요도 없다. 게다가 민주주의에 대한 남한 국민의 적극적인 동의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어떤 전략도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압도적으로 강경책(채찍)이 아닌 회유책(당근)의 국가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강압, 그리고 권력자들의 세력을 유지시키는 강압의 역할은 민주정치, 독재 정치를 막론하고 항상 모든 정치의 주요 고려사항이다(그리고 물론, 최장기간의 한국 철도 파업 이후 세 명의 코레일 노조 간부 구속은 이 나라 정부가 권력이 위협당할 시 강경책을 쓰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나 아마도 마키아벨리의 가장 귀중한 통찰은 자유의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 지도자들과 정치 엘리트들은 정치 라이벌이나 “극단주의자들”에 대해 정부가 극단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경우, 정부는 공동선(共同善), 즉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만 그러한 조치를 취한다고 계속 우리에게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글·제이슨 바커Jason Barker
2003년 웨일즈의 카디프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알랭 바디우, 프랑수아 로렐 등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을 영미권에 활발히 소개했다. 2002년 발표한 <알랭 바디우: 비판적 입문>은 전 세계를 통틀어 최초로 나온 바디우 연구서로서, 바디우에게 “내 작업의 정치적 궤적을 가장 잘 설명한 책”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다. 2007년부터 영화제작을 겸하며 다큐멘터리 <마르크스 재장전>(2010)을 발표했다.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