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조레스 두 번 죽인 추모 100주년

2014-08-27     제롬 펠리시에

 

장 조레스는 자신이 암살된 지 올해 100주년을 맞아 곳곳에서 회자되는 대상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007년 대선 당시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한 번의 연설에서 장 조레스의 이름을 총 32회나 언급하면서 “그는 계층 투쟁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2년 후, 이번에는 극우 진영의 선거 벽보에 사회주의 사상가인 장 조레스가 등장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자에게는, 조국이야말로 유일한 재산”이라고 적으며, “조레스는 국민전선(FN)에 표를 던졌을 것입니다”라고 마무리했다. 이런 일부 정치권의 과도한 인용이 지속되어온 가운데, 1914년 7월 31일 암살된 조레스를 추모하며 올해 가장 덕을 보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당(PS)이다. 사회당은 다른 정적들을 사회당 출신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에 비교하면서 덕을 보고 있다.

조레스 연구회 회장인 역사가 쥘 캉다르는 최근 엘리제궁에서 상영된 영상 속에서 “올랑드 대통령에게서 조레스다운 면을 꼽는다면, 분명히 행동하는 역동성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장 조레스 재단 회장인 앙리 날레도 “올랑드 대통령의 선택들은 조레스가 선택했던 사항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덧붙였다. 장 조레스 재단은 사회주의 성향의 전직 장관이면서 현재 제약회사 세르비에의 임원을 맡고 있는 앙리 날레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 재단은 글로벌 광고그룹 하바스 월드와이드의 쥘 핑클슈타인이 이사장을 맡아 올해 100주년 추모행사를 조직했다. 다시 말해 전시회, 컨퍼런스, 연극, 타른 시(조레스의 출생지) 성화 봉송 행사 등 각종 기념행사에 ‘2014년, 조레스의 해’라는 문구를 붙일 자격을 가진 유일한 단체였다. 명백하게 사회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 조레스 재단은 올랑드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시작한, 전 세계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올해 펼쳐지는 ‘사회주의적’ 공연은 폴 킬레 전 장관에 의해 진행되는 “평화를 향한 하나의 목소리”라는 공연으로 베올리아, 루이뷔통 그룹, 에파주, 빈치, 오랑주 등 쟁쟁한 프랑스 대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다.(1)

장 조레스의 '올랑드화'로 정치적 이익 노리는 올랑드

사실 사회주의 일간지 <뤼마니테>의 창립자인 장 조레스와 오늘날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인 프랑수아 올랑드 사이에서 분명한 연결 고리를 찾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장 조레스는 “사회당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자본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당으로,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사상, 선전, 투표가 타락한 자본주의를 한시바삐 철폐하겠다는 목적하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2) 이는 올랑드 대통령의 생각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 올랑드 대통령은 2012년 당시 “프랑스 좌파가 15년간 정권을 잡아 왔으며, 그동안 우리가 경제 자유화를 실시했고, 재정과 민영화를 위해 시장을 개방했다”고 호언했기 때문이다.(3) 게다가 올랑드 대통령은 문화 주간지 <레 쟁록큅티블>(2012년 1월 14일자)에서 “강경주의자 조르주 클레망소가 늘 좋은 선택만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화주의자 장 조레스보다는 ‘더 강력’하고 ‘더 많은 결과’를 낳은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장 조레스와 프랑수아 올랑드, 이렇게나 다른 두 인물을 나란히 붙여놓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 먼저는 올랑드 대통령을 ‘조레스화(化)’하는 것으로, 올랑드를 보다 급진적인 인물로 하여, 사회주의 뿌리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가 자칭 조상으로 삼고 있는 조레스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할 권리”와 “모든 국민이 공동의 생산에 있어 경영하고 활동할 수 있는 각자의 몫을 행사할 가능성”을 가지도록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올랑드 대통령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신빙성을 얻지 못할 위험이 있으므로, 그는 장 조레스를 ‘올랑드화(化)’하는 편을 택했다. 조레스가 가지고 있는 사상 중 반체제주의적 측면은 전부 지우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묘기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은 그의 발언들로 장난을 쳐야 한다. 조레스가 스스로를 ‘개혁주의자’라고 칭했는가? 조레스는 ‘책임 협약’(4)에 대해 분명 찬성했을 것이다. 이 협약에 대해 올랑드 대통령은 지난 4월 23일 타른 지역 카르모에서 연설 중에 “(책임 협약은) 조레스가 당시에 가지고 있었을 정신인 개혁, 정복, 야망에 충실한 협약”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인물이 말한 ‘개혁’은 같은 의미를 가고 있지 않다. 올랑드 대통령이 ‘노동 시간 축소’를 외치는 고용주들의 의지에 굴복한 채 ‘개혁’을 진행하고 있는 반면, 장 조레스가 말했던 ‘개혁’은 “혁신, 그러나 분명히 공공재산을 위한 혁신”이며, 자본주의의 틀을 조금씩 부수어 나가는 데 방향을 두고 있었다.(5)

어둠의 그늘에 묻힌 조레스의 참 정신

또 다른 묘기는 장 조레스를 ‘위인’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다. 올랑드 대통령의 말에 따르면 1905년 정교분리법 제정에 참여했던 장 조레스는 더 이상 단순히 ‘사회주의의 아버지’가 아닌, ‘프랑스 전체의 아버지’였다. 이는 클로드 바르톨론 하원의원장이 지난 4월 29일 연설에서 “장 조레스가 프랑스 좌파에게 언제나 영감을 안겨주는 수호신과 같은 인물이지만, 그는 동시에 국가 전체의 역사를 풍요롭게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고 말한 것과 동일선상에 있다. 역사학자인 레미 페슈는 남부지방 일간지인 <라데페슈>(2014년 3월 23일자)를 통해 우리 모두는 “클레망소와 조레스의 상속자”로, “그들이 투쟁했던 모든 사항이 오늘날에는 모두 정책 속에 녹아 들어갔다. 모든 정당이 이 위대한 인물들을 표방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 조레스는 군대를 민중의 통치 아래에 두고 싶어 했으며, 모든 계급제도를 철폐하고, 임금 노동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도대체 어떤 정당들이 이러한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말인가?

모든 언론과 정계 인사들이 조레스 사상의 이러한 면은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들을 더 강조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계층 철폐’는 이미 아웃이다. 계층 철폐에 대한 표현은 ‘조레스의 해’를 여는 올랑드 대통령의 연설에도 언급되지 않았으며, 현 사회당 대표인 장 크리스토프 캉바델리스의 연설, 국립보존기록관이 기획한 전시회 등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 성향 인물인 타른 지역 도의회 의장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 그의 ‘인간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6) 또 라데페슈 그룹의 장 미쉘 발레 대표가 “라데페슈는 조레스의 신문이었다”고까지 말했지만, 그들이 추앙하는 것은 라데페슈에 사설을 기고하던 장 조레스일 뿐, “권력과 재력의 손 안에서 돈에 매수된 언론”을 반대하기 위해 <뤼마니테>를 창간한 장 조레스를 추앙하지는 않는다.(7) “자유를 향해 끝없이 투쟁하는 노동자, 그리고 그 노동자를 자신의 종속관계에 놓으려는 자본주의자” 간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었던 정치 투쟁가 장 조레스가 아닌 타른 지역을 사랑했던 장 조레스를 기념할 뿐이다. ‘포탄과 사리사욕이 오가는 인터내셔널’을 비난했던 그의 투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채 길고 장황한 비평문만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뛰어난 연설가인 장 조레스를 기념할 뿐, 1912년 “유럽이 아프리카에 폭력을 행해 무슬림들의 상처를 들쑤셔 놓고, 이슬람이 보편적 공격에 종교적 열광과 대규모 폭동으로 응하는 것에 도대체 그 누가 격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단 말인가?”라고 말할 만큼 반(反)식민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장 조레스는 잊혀졌다.(9)

조레스의 위대한 이름 속에 숨은 정치인들의 무능함

오늘날 기념의 대상으로 떠오른 장 조레스 덕분에, 20세기 초 증오와 욕설, 위협, 풍자의 대상이 됐던 장 조레스는 숨겨졌다. 민족주의자를 비롯해 투기꾼, 성직자, 식민주의자, 반유태주의자, 군국주의, 외교관, 언론 등 모두에게 끝없는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인물로서의 조레스는 감춰진 것이다. 조레스는 1913년 의회에서 이들 모두에게 이렇게 호소하기도 했다. “당신들의 신문마다, 기사마다, 당신을 지지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암살하라는 끝없는 촉구가 들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 말 듣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조레스가 그의 평화주의 때문에 죽음을 맞은 것이라고 설명해왔다. 캉바델리스 사회당 대표는 그가 “전쟁으로 인해 암살당했다”고 말했고, 올랑드 대통령은 “광신도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의 작가, 의원, 언론부터 레몽 푸앵카레(1860~1934) 전 대통령의 측근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전체가 그가 죽기를 바란다고 외치고, 속삭이고, 적어 내려갔던 상황에서라면, 어떤 한 개인의 행위를 비난하기로 하는 편이 더욱 쉬웠을 것이다. 복수를 중요시 여기는 나라라는 프랑스가 조레스 암살 사건에 대해 1919년 내린 판결이 총을 쏜 범인을 풀어주고 그의 아내에게 고작 소송비용 부담을 물리는 것뿐이었다.(10)

그러나 역사의 바람이 방향을 바꾸었다. 그가 죽고 10년이 지난 1924년, 에두아르 에리오 정부는 좌파의 하나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일환으로 그의 유해를 팡테옹(국가에 공헌한 위인들이 묻히는 국립묘지)으로 이장시키기로 결정했다.(11) <뤼마니테>지는 이것이 “매일 매일 노동자들이 거는 희망을 기만하는 그들의 무능력함을 조레스의 위대한 이름으로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고, “타락한 종교의 사제들이 자신들의 불꽃이 꺼지고 그들의 신앙도 사라짐에 따라, 속아 넘어온 신자들을 이용해 성스러운 이미지를 쌓고 있을 뿐이다”고 덧붙였다. 조레스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장한 후 9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듯하다.

글·제롬 펠리시에 Jérome Pellissier

극작가

브누아 브레빌 Benoit Bréville

파리1대학 20세기 사회사연구소 연구원 겸 캐나다 몬트리올 퀘벡대학 교수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문과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20년 전, 폴 킬레는 조레스와 그의 주변에 대한 내용을 다룬 연극 ‘소리와 빛(son et lumière)’을 상연한 바 있다. 세르주 알리미, ‘La tranquilité perturbée de Jean Jaurè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4년 9월호 참고

(2) 프랑스 릴, 1900년 9월 26일. 본 기사에 인용된 모든 조레스의 발언은 인터넷 사이트 www.jaures.eu를 통해 열람 가능하다.

(3) <르몽드>, 2012년 2월 29일자

(4) 프레데리크 로르동, ‘기업이 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3월호

(5) ‘Etudes socialistes’, Cahiers de la quinzaine, 파리, 1901년

(6) ‘Entretien avec M. Thierry Carcenac’, <라데페슈>, 2014년 2월 8일자

(7) ‘샹바르(Chambard)’ 재판 당시의 변론, 1894년 11월 4일

(8) 프랑스 릴, 1900년 11월 26일

(9) ‘L'ordre sanglant’, <뤼마니테>, 파리, 1912년 4월 22일자

(10) 소송 비용을 전체 또는 일부를 부담하도록 하는 판결

(11) Paul Nizan, ‘Tous au Panthé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4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