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정신이 인문학의 가치

2014-08-27     성일권

20세기 중엽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을 포획했다면, 21세기의 신자유주의는 지식인과 대학을 굴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20세기, 노동자들이 순치된 상황에서 국가-자본주의-기술문명-대중문화로 이루어진 사각의 링에 대한 탈주가 주로 교양층, 특히 지식인들의 저항이나 학생들의 운동을 통해 전개되었다면, 21세기의 교수들은 신자유주의의 집요한 공세 앞에 “SCI급 저널들”에 영어로 된 논문들을 쓰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으며, 학생들은 각종 대중문화에 포획되어 버렸다. “돈이 안 되는” 인문학은 설 땅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다.

대학은 더 이상 사회적 담론을 생산하고, 사유하고, 실천하는 학문의 장이 아니다. 남을 짓밟고 출세하는 테크닉을 전수하는 곳으로 전락된 지 오래다. 대학 교육이 계층상승의 통로로 인식되는 것도 문제지만 지금은 그 반대로, 계층을 재생산하는 도구가 돼 버린 형국이다. 삼성관, 포스코관, LG관 등 재벌 연수원을 방불케 하는 연구실과 강의실의 화려함은 대학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자본의 돈맛에 길들여진 대학은 기업 입맛에 맞는 주문형 인재양성을 위해 ‘친기업적-친자본적 커리큘럼’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글로벌 인재양성이라는 깃발 아래! 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비판하고, 대안 마련을 위해 고심해야 할 대학에서는 더 이상 사유와 비판과 실천의 학문을 가르치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혹여 대학이 인문학을 커리큘럼에 넣는다면, 인문학 리더십 강좌나 글쓰기 강좌 정도로 취업용이나 교양용 스펙 쌓기에 불과한 정도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학의 암담한 현실과는 달리, 인문학이 재벌 소유의 ‘백화점 인문학’과 ‘CEO 인문학’ 등으로 부흥기를 맞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학생들의 인문학 수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대학들조차도 돈벌이 잘 되는 ‘CEO 인문학’ 강좌를 개설할 정도다.

언론의 표현대로, 인문학의 르네상스가 다가온 걸까? 우리는 인문학이 본연의 사유와 비판과 실천 정신을 거세당한 채 ‘가진 자들’의 기름진 교양주의의 지적 장식물로 전락한 오늘의 현실을 응시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멋진 수사를 내세운 백화점 및 CEO 인문학 강좌는 인문학마저 스펙 쌓기나 인맥 만들기 및 이윤창출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 순치된 인문학은 결코 참된 인문정신을 담아내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의 정신과 심성을 왜곡시키고, 나와 이웃의 끈을 꼬이게 만든다. 외제차 몰고 나타나, 강의시간에는 내내 졸다가도, 기수모임을 만들어 골프 치고 해외 여행하는 게 CEO 인문학 강좌의 풍경이 되다시피 했다. 말이 좋아 인문학이지, 실제로는 인맥 쌓기 속성프로그램과 다름 없다.

프랑스 철학자 라캉(1901~1981)의 지적대로, 인문학은 결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인 페르소나(Persona)를 분칠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인문학적 정신, 즉 사유와 비판과 실천의 정신이 고양되어야 한다. 화려함 대신 수수함, 높음 대신 낮음, 닫힘 대신 열림, 속성 대신 진중함, 순응 대신 저항의 인문학이어야 한다.

창간 이후 줄곧 우리 사회의 반(反)지성에 맞서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이 기획·출간하는 <르몽드 인문학>은 한국 지성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은 거창한 꿈을 갖고 있지만, 현실의 암담함에 대해선 냉철한 시각과 진단을 잊지 않는다. 흔히 <르 디플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세계 석학들과 더불어, 오늘날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세계화의 야만성과 물신성을 드러내고 인간성 회복의 인문정신을 줄기차게 강조해왔다. 세계화한 지구촌에선 무역·자본 자유화의 추진으로 재화·서비스·자본·노동·사상 등의 국제적 이동 증가로 인한 각국의 통합화 현상이 나타난다. 세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사적 개념과 이데올로기적 개념을 동시에 살펴봐야 한다. 우선은 세계화가 각 지역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미쳤는지에 대해 서사적으로 직시하고, 여기에 함축된 이데올로기적 맥락들도 함께 음미해봐야 한다.

이 같은 대의적 맥락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2008년 10월 창간) 발행 이후 세계화 개념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혜안의 지혜를 보여준 세계 석학 30명의 글 40편을 묶어서 이번에 <르몽드 인문학>을 펴내게 되었다. 세계 석학들의 시대적 고뇌를 담은 이 책자가 ‘인문학’ 관련 책 목록을 한 줄 추가하는 걸로 그치는 게 아니라, 어느 연구서보다도 더 강고하고 튼실한 교양도서로서, 냉철한 이성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지식인들의 인문학적 수첩(手帖)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린다.

 

글‧성일권

 

*이 글은 <르몽드 인문학>의 서문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싣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