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강대국들의 무지가 초래했다!

9 ·11 그 후 14년

2015-08-31     노엄 촘스키 | MIT대 명예교수

 두 가지 전제로부터 출발해 봅시다. 먼저 2001년의 9‧11 사태는 전쟁을 제외한다면 인류 역사상 아마도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가져온 끔직한 잔혹성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목표는 희생자가 누구이건 간에, 어떻게든 이런 테러가 재발할 위험성을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두 가지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계속되는 이야기는 여러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동의한다면 다른 많은 문제들이 제기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상황부터 시작해보죠. 그곳에는 기근으로 생명이 위협받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테러 이전부터 이미 존재한 상황입니다.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은 국제 원조로 어렵게 생명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럼에도 (2001년) 9월 16일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에게 식량과 기타 긴급한 생필품을 실어다주는 호송 트럭의 운송을 중지하라고 파키스탄에 요구했습니다. 서방측도 이 결정에는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인도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수백 명 인원이 철수한 것도 국제 원조가 정상적으로 실현되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었습니다. 폭격이 시작되고 나서 일주일 후, 유엔은 겨울이 다가오면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며 이미 최소한도의 수준으로 줄어든 식량 운송이 더 어려워 질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민간 인도주의 단체와 종교 단체 그리고 유엔의 국제농업식량기구의 리포터가 공격 중단을 요청했을 때 이 소식은 〈뉴욕 타임스〉에서조차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보스턴 글로브〉지만이 한 줄의 보도를 할애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다른 주제를 다룬 기사에 살짝 끼워서 말입니다. 2001년 10월 서구 문명은 이렇게 수십만 명의 아프가니스탄 인들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앞에 언급한 서구 문명의 지도자들은 오사마 빈 라덴을 인도하는 문제에 대해 협상하겠다는 아프가니스탄의 제안에도, 궁극적으로 범인 인도를 결정하게 할 만한 증거를 제시해 달라는 요구에도 전혀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오로지 조건 없는 체포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이제 9‧11을 되돌아봅시다. 역사상 그 어떤 범죄행위도 이처럼 많은 인명 희생을 야기한 적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기는 미국이라는 ‘흔하지 않은’ 표적을 겨냥했습니다. 미국인이 느낀 고통을 진주만 기습 때와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입니다. 1941년 일본 군대가 진주만을 폭격했을 당시에는, 미국이 점유한 두 개의 식민지에 설치된 군사 기지를 폭격한 것이지 미국 본토 자체를 공격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미국인들은 200년 전부터 토착민들을 쫒아냈습니다. 즉 수백만 명의 인명을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절반을 정복했고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을 약탈했으며 아이티와 10만 명의 필리핀인들을 죽이면서 필리핀을 침략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은 방식으로 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배권을 확대해왔습니다. 그런데 전투는 거의 언제나 미국의 영토 밖에서 행해졌고 우리가 죽이는 쪽이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채찍을 들고 있는 쪽이냐, 아니면 수세기 동안 그 채찍을
참아온 쪽이냐에 따라 지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아일랜드공화국 군대(IRA)와 테러리즘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기자들의 의식이 아일랜드해(海)의 안쪽에 사느냐 바깥쪽에 사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일반적으로 오래전부터 채찍을 들고 있는 쪽이냐 아니면 수세기 동안 그 채찍을 참아온 쪽이냐에 따라 지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지 세계의 나머지 전부는 9‧11 사태 희생자들의 운명에 한 목소리로 두려워하면서도 우리가 뉴욕이나 워싱턴의 테러에 응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9‧11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는 이 범죄를 저지른 쪽과 다른 한편으로는 이 범죄가 이득을 가져다 준 다양한 배경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빈 라덴 조직에 혐의를 두었지만, 미중앙정보국(CIA)과 그 연관 단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은 이 근본주의자 조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그 누구도 더 이상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CIA)이 이 조직이 성장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카터 행정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이었던 지비그뉴 브레진스키는 당시인 1978년부터 소비에트 연방에 ‘함정’을 파놓고 유인한 것을 자랑삼았습니다. 미 중앙정보국이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당시의 무자헤딘을 부추겨 카불 정권을 공격하도록 해서 그 이듬해부터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 영토내로 진군하도록 유인하는 함정을 팠다는 것을 그가 자랑한 것입니다(1).
 
그리고 1990년 이후 아랍인들에게는 신성한 땅으로 간주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국이 군사 기지를 설치한 이후부터 이 전사들은 미국에 대항하는 집단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제 왜 후진국의 지도계층을 포함한 나머지 세계가 빈 라덴 조직에게 전폭적인 동정을 보내는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우선, 미국은 전제적인 독재 체제를 지원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담 후세인을 지원해서 이라크 사회를 무너뜨린 미국 정책, 1967년부터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유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워싱턴의 정책 등이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테러의 여파가 한창이던 때, 〈뉴욕 타임스〉의 사설들은 “우리가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의 권리와 정교분리를 옹호하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를 증오하고 있다”는 요지의 글을 유포시켰습니다. 같은 시기에 〈월스트리트 저널〉은 은행가들과 비서구 고급관리들과의 인터뷰를 참조해 “그들이 우리를 증오하는 것”은 우리가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방해하고 폭력적인 체제, 심지어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서방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대(對)테러전쟁은 야만족들이 퍼트린 암에 대한 전쟁”과 같은 의미로 인지되었으며, 게다가 이 표현 자체와 거기에 부여한 우선순위는 오늘날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30년 전에 레이건 대통령과 그의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가 언급한 바 있습니다. 문명으로부터 타락한 적들과의 전쟁을 이끌기 위해 미국 정부는 전례가 없는 규모의 국제 테러 망을 발족시켰습니다. 이 조직은 세계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잔학행위를 저질렀으며 그중 가장 핵심적인 노력은 라틴아메리카에 집중됐습니다.
 
니카라과의 경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실례일 것입니다. 사실상 이 사건은 헤이그의 국제사법재판소와 유엔에 의해 판결이 내려진 바와 다름없습니다. 법치 국가라면 법이라는 수단에 의거해 테러행위를 처벌해야 한다는 유력한 비평가들의 논평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선례는 분명 9‧11보다 피해가 더 막심했습니다. 니카라과에 대한 레이건 행정부의 전쟁은 5만 7천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그중 사망자는 2만 9천 명이나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이 니카라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폐허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니카라과는 저항했습니다. 단 워싱턴에 폭탄을 터뜨리는 식으로가 아니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를 한 것입니다. 결국 1986년 니카라과 당국에 유리한 판정이 내려졌고 (니카라과 항구에 기뢰를 부설한) 미국이 “무력을 불법으로 사용”했다고 책망하며 이 범죄를 끝내라고 미국에 통지했습니다. 물론 중대한 손해와 피해에 대한 보상도 명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이 같은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차후로는 사법재판소의 판결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반격했습니다.
 
유엔이 대(對)테러 결의안을 표결 할 때
이스라엘과 미국은 반대투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모든 나라가 국제 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 어느 국가도 특별하게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국가를 겨냥한 것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이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날 미국은 국제사법재판소로부터 비난 받고 또한 국제법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 결의안에 반대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니카라과는 유엔 총회에 호소했으며 총회에서는 오직 세 나라 미국, 이스라엘, 엘살바도르만 반대했습니다. 그 이듬해 니카라과는 같은 결의안의 표결을 요청했으며 이번에는 이스라엘만이 유일하게 미국을 지지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니카라과는 더 이상 법적으로 호소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힘이 지배하는 세계 앞에서 모두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 전례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대학과 언론에서 얼마나 자주 언급했었던가요?
 
이 이야기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먼저 테러리즘은 성행한다는 것입니다. 폭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는 테러리즘이 약자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강대국들의 무기입니다. 대량 살상을 가져온 테러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강대국들이 문화적‧이념적 제도를 장악하고 있고 이 제도에 의해서 테러를 테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인식하게끔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결과에 도달하는 데 강대국들이 사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불편한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사건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독단적 교리와 선전의 힘은 막강해 스스로뿐 아니라 희생자들 까지도 여기에 현혹되고 맙니다. 만일 아르헨티나에 가보신다면 지금 이 말에 동의하실 겁니다. “ 아 그거요, 우리는 그걸 잊었답니다!”
 
니카라과, 아이티, 과테말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세 나라입니다. 또한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시 사실이 일치한다는 것은 반드시 우연만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서방의 지식인들이 열광적으로 요구한 이념적 배경 속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역사의 끝, 새로운 세계질서, 법치국가, 인도주의적 개입 등과 같은 자화자찬이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에 현찰과도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러는 사이 우리는 일련의 학살이 범해지는 것을 내버려 두고 있었습니다. 더 참담한 것은 우리가 거기에 능동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에 대해 말하겠습니까? 서구 문명이 이룩한 위업 중의 하나는 자유 사회에서 이러한 일련의 모순적인 행위들이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전제주의 국가에서라면 그런 재능은 없을 것입니다.
 
테러리즘이란 무엇인가? 미국 군사 교본에는 정치적 혹은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 폭력, 위협, 협박, 강요 혹은 두려움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가 지닌 문제점은 언급된 모든 종류의 폭력의 사용을 필요로 하는, 소위 미국이 저강도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확하게 포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1987년 유엔 총회가 대테러 결의안을 채택할 당시 온두라스 한 나라가 기권했고 미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만 반대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식민지 체제나 군사적 점령에 대항해 싸우려는 국민의 권리는 제외로 한다는 결의안의 한 문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미국의 동맹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외적으로는 수십만 명의 사망자와 600억 달러에 달하는 막심한 피해를 가져온 (나미비아와 앙골라를 비롯한) 이웃나라들의 침략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테러리스트’라고 분류한 아프리카민족회의의 무장군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1967년부터 팔레스타인의 일부 영토를, 1978년부터는 레바논의 일부 영토를 불법으로 점유해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레바논의 남부 지역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테러단체라고 규명한 헤즈볼라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테러리즘에 대한 분석에 있어 이런 종류의 정보나 해석은 통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문의 분석이나 기사가 소위 공신력을 가지려면 줄을 잘 서야 하는 것, 즉 보다 화력이 센 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1990년대에는 인권에 대한 가장 심각한 타격이 콜롬비아에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를 제외하면 콜롬비아는 미국의 군사 원조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였습니다. 1999년까지는 터키가 두 번째로 군사 원조를 많이 받는 나라였습니다. 1984년부터 미국은 터키에 매년 더 많은 양의 무기를 인도했습니다. 왜 이 해부터일까요? 터키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연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소비에트 연합은 이미 해체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터키가 막 시작한 쿠르드 족에 대한 테러공격을 지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97년에 미국이 터키에 준 군사 원조량은 냉전시대인 1950년부터 1983년까지 터키가 받은 총량을 추월합니다. 군사 작전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2-3백만 명의 피난민과 10만 명의 사망자가 생겨나고, 350개의 마을과 도시가 파괴되었습니다. 박해가 가속화됨에 따라 미국의 무기 인도 주기도 빨라져 터키 군은 사용한 무기의 80%를 공급받게 됐습니다. 이런 경향은 1999년에 와서야 변했습니다. 앙카라 당국이 “대테러”라고 간주한 군사 테러가 그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경우에 테러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주 사용자는 현장에 있는 강한 쪽입니다.
 
미국이 터키에 군사원조를 한 것은 헛수고가 아니었습니다. 워싱턴은 터키에 F-16을 인도했고 터키는 이를 터키 국민을 압살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앙카라는 1999년 세르비아를 폭격했습니다. 그 다음에 9‧11 사태가 발생한 며칠 후, 뷜렌트 에제비트 터키 총리가 빈 라덴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과의 굳건한 연합에 동참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해 터키는 미국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빚이란 터키가 “반테러 전쟁”을 수행할 당시 워싱턴이 보내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쿠르드에 대한 앙카라의 전쟁을 지지한 다른 나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는 나라도 미국만큼 열성적인 그리고 효과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 지지에 대해서 세간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미국 식자 계층의 비굴함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미국은 자유 국가입니다. 쿠르드족 거주지의 상황에 대한 인도주의 기구들의 보고서는 공공 영역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당시 우리는 그 잔학 행위에 일조를 했다고 비난받는다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탈레반 체제를 끝장내기 위해 현장에 개입한 연합군 측에는 엄선된 새로운 신참도 있었습니다. 국제시사 문제를 주로 다루는 신문 중에서 제법 명성이 있는 신문 중의 하나인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기자였습니다. 그는 미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몇몇 국민들이 미국을 더 존중하기 시작했고 특히 테러와의 전쟁에 만족스러워 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아프리카 전문가인 이 기자는 이러한 급변의 예로 알제리를 언급했습니다. (기자가 그런 말을 할 정도이니) 그렇기에 이 나라가 실상은 자기 국민을 상대로 테러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2) 러시아가 벌이고 있는 체첸에서의 테러 전쟁(3),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이라고 간주해서 중국이 벌이고 있는 잔혹한 박해 등도 마찬가지로 미국의 명분을 답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글·노암 촘스키(1928-)
MIT 공대에서 언어학 교수를 역임하며 우수한 이론들을 내놓았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지배질서에 대한 비판의 글들을 써 오며 세계적으로 반항하는 지식인의 상징이 되었다. 저서로는 〈테러리즘의 해부. 911 테러와 세계질서〉,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비밀, 거짓말, 그리고 민주주의> 등이 있다. 본 텍스트는 2001년 10월 18일 MIT에서 한 강연에서 발췌한 것이다.
 
 
번역·이진홍
파리7대학 불문학박사
 
 
1) ‘유감 Regrets’,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01년 10월.
(2) 알제리 내전은 1991년 시작되어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15만 명의 사망자와 수천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편집자 주)
(3) 2009년 4월, 러시아는 “대테러 작전”과 조그만 코카서스 공화국의 예외적인 체제가 마감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편집자 주)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지식인으로 꼽히는 노암 촘스키는 2001년 ‘9‧11 사건’이 터지자, 그로부터 한 달 뒤 10월 18일 MIT대학교 강연에서 “강대국들의 무지가 비극을 초래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슬람국가조직(IS) 세력의 확산에 즈음해 그의 통찰력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