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냉전’ 넘어야 북핵도 넘는다

[한국판 창간 1주년 특집] 국가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2009-10-06     김연철|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위기가 깊으면, 해법도 근본적이 되어야 한다. 북핵 문제의 상황은 과거와 다르다. 북한은 두 번의 핵실험을 했다. 과거보다 핵 능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구조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다행스럽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이후 한반도는 다시 대화 국면으로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다.

세 번째 북핵 위기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에서 다시 협상 국면이 무르익고 있다. 그동안 한반도에서 두 번의 대타협이 있었다. 1차 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1994년의 제네바 합의는 클린턴 행정부 당시 여소야대 상황에서 지지부진을 거듭하다, 결국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파기되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이라는 두 번째의 대타협 역시 미국의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로 비틀거리다 시간을 잃고, 동력을 상실했다.

세 번째 위기는 세 번째 대협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 3차 핵 위기는 미국의 정권 교체 국면에서 발생했다. 북한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상황 악화를 방지할 수 있는 적극적 중재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구조가 정비되고 북한 역시 적극적인 대화 자세로 돌아서면서, 위기 국면은 대화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 국제사회의 대화를 향한 발걸음도 분주하다. 3차 핵 위기의 끝은 어디인가? 과거의 실패한 외교의 반복인가? 아니면 새로운 동북아 질서가 나타날 것인가?

꿈틀거리는 새로운 동북아 질서

동북아의 20세기는 끝나지 않았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돼, 1991년 종말을 고했다는 의미에서 ‘짧은 20세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반도의 냉전 구조가 지속되는 한, 동북아의 20세기는 계속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여전히 북한의 미수교 국가이다. 적대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남북한의 냉전 구조 역시 2000년과 2007년의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남한에서 ‘우리 안의 분단’은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동북아에서 퇴행의 의지와 미래를 향한 상상력이 충돌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동북아 질서를 향한 거대한 발걸음이 희미하게나마 들려오고 있다. 무엇인가? 중요한 변수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북한의 전략적 초조감이다. 북한은 2012년을 강성대국의 해로 설정했다. 목표 시점을 설정했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다.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도 변수다. 최근 김정일 위원장은 클린턴 전 대통령, 현정은 현대회장, 그리고 다이빙궈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의 면담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데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김정일 위원장과 협상해야 한다”는 태도는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에 기대하는 일부의 ‘북한 붕괴론’적 사고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여전히 후계 체제는 불명확하다. 최근 들어 셋째아들 김정은의 후계 체제 구축이 확인되고 있지만, 공식 지명 절차와 과정은 여전히 과제다.

북한은 서두르고 있다. 적극적인 대화 국면 조성에는 강화된 핵 능력도 작용하고 있다. 북한 처지에서 ‘억지 능력의 확대’는 적극적 협상의 내적 자신감이기도 하다. 북한은 과연 핵을 포기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핵을 포기할 상황이 되면, 포기한다”. 그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체제 안전과 경제발전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둘째는 오바마 행정부의 협상 필요성이다. 이미 ‘핵 없는 세계’를 주요 외교 목표로 설정했다. 2010년 3월 ‘글로벌 핵정상 회의’, 5월에는 ‘핵확산방지조약(NPT) 검토회의’라는 중요한 외교적 일정도 잡혀 있다. 물론 ‘오바마 이니셔티브’는 핵보유국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미국의 처지에서 더욱 필요한 것은 비확산의 성공 모델이다. 북핵 문제 해결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비확산 레짐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것이다. 오바마 외교의 우선순위에서 북핵 문제는 후순위다. 그러나 ‘정책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높아질 수밖에 없다.

셋째, 일본 민주당의 달라진 동북아 외교다. 하토야마 정권은 동북아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동북아 협력의 걸림돌로 작용해왔던 과거사 문제도 풀어나가겠다는 태도다. 북핵 문제의 적극적 중재 역할을 하는 중국의 처지에서 일본의 새로운 외교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중-일 관계의 새로운 정립은 동북아의 질서를 점차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일본 외교가 오바마 행정부를 ‘동맹의 덫’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제공해줄 것이라는 점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비판하면서, 동맹국과의 협력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그동안 한·일 양국의 보수적 태도는 미국 협상파의 발목을 잡아왔다. 일본의 새로운 동북아 외교는 오바마 행정부가 적극적인 대북협상에 나서게 하는 계기이며, 한·미·일 3국의 협상 구조도 변화시킬 것이다.

대화의 국면은 조심스럽다. 그러나 동북아의 질서는 급변하고 있다. 북한의 전략적 초조감과 오바마 행정부의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외교 일정은 이번 협상의 시한이 정해져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대담판’의 배경이기도 하다. 일본의 새로운 동북아 외교 역시 중국의 적극적 중재 역할과 어울릴 것이다.

북핵 문제 포괄적 접근, 어떻게?

북핵 문제의 유일한 해법은 포괄적 접근이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도, 2005년의 9·19 공동성명도 역시 포괄적 접근이었다. 그 핵심은 무엇인가? 한반도의 냉전 구조를 해체해야만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점이다. 북한을 둘러싼 적대관계가 청산되지 않고, 한반도 평화 체제가 형성되지 않으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억지 필요성은 계속될 것이다.

우선적으로 미국과 일본, 양국의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가 필요하다. 그것은 전후 질서의 청산을 의미한다. 그동안 북핵 역사에서 북한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 문제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제네바 합의가 동력을 상실해가는 과정에서, 2005년의 9·19 공동성명이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유명무실해진 이유도 관계 정상화 약속의 파기가 작용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관계 정상화를 북한에 주는 선물이 아니라, 비핵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협상 수단이라 인식해야 한다. 북한 역시 한꺼번에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잠정적 과정인 ‘연락사무소’ 개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북-일 관계 정상화도 중요하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역사적 방북 이후 북-일 관계는 여전히 ‘납치 문제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악화된 이미지도 일본 민주당 정권이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전후 외교를 청산하고, 새로운 동북아 공동체를 향해 적극적 역할을 하려 한다면,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를 피해갈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북한의 태도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남북 관계의 교착 상황에서 일본 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미국과의 협상 환경을 조성하고, 남한 보수 정권에 대해 유리한 협상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는 과감하고 전향적인 대일 접근을 고려할 것이다. 다시 말해 향후 북-일 관계는 북한의 적극적 움직임과 일본의 새로운 동북아 외교가 어울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

포괄적 접근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 체제다.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재래식 군비 경쟁 또한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래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을 하면, 곧바로 한반도 평화 체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세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의 태도다. 이미 휴전선 관리권이 유엔사령부에서 한국군으로 많이 이양되었다. 한-미 양국 간에는 2012년을 목표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반도 평화 체제에 대한 논의는 남북한과 미국, 중국의 4개국이 할 수 있지만, 실질적인 군사적 신뢰 구축과 군비 통제 등은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한국이 한반도 평화 체제에 소극적 태도를 가진다면 논의가 진전되기 어렵다. 결국 그것은 북핵 문제 해결의 결정적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도 원칙은 포괄적 접근이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국제사회는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 체제, 그리고 에너지 경제 지원을 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이행의 동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이다. 너무 세부적으로 단계를 구성하면 불신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동력을 얻기 어렵다. 단계를 구분하되, 그 과정을 압축적으로 신속하게 이행할 수 있는 의지가 중요하다.

평화에 대한 상상력

평화는 한반도의 오랜 꿈이다. 동북아의 미완의 과제이기도 하다. 동북아의 평화는 북핵 문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 체제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오래된 희망이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평화의 꿈’이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미래는 꿈꾸는 자들의 것이다. 물론 여전히 동북아에는 과거 냉전시대의 향수에 젖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북핵 문제를 둘러싼 기술적 협상의 전망 역시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그러나 장기적인 목표가 없다면, 단기적인 협상의 기술도 발휘되기 어렵다. 과거의 실패한 외교에 대한 기억도 있다. 상대에게 책임을 넘기기보다, 자신의 협상 전략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평화에 대한 꿈, 희망 그리고 상상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럽은 ‘문명에 대한 구토’라고 표현한 두 번의 세계대전의 역사를 뒤로하고 통합으로 나아갔다. 동북아의 끝나지 않은 20세기에 이제 안녕을 고할 때가 아닌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0년이 되었다. 모든 장벽은 언젠가 무너질 것이라는 소망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한반도에서 냉전의 벽이 무너지면, 북핵 문제도 해결된다. 비무장지대에도 작지만 질긴 협력의 길이 나 있다. 철조망의 벽, 그리고 더욱 중요한 마음의 장벽도 언젠가 무너질 것이다. 그것은 평화를 상상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글·김연철
정치학 박사,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저서로 <북한의 산업화와 경제정책>(2001), <냉전의 추억>(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