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다른 세상’에 대한 희망을 담다

2016-05-30     전찬일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렇게 80줄에 접어든 영국의 노거장에게 상을 안겨주며, 5월 11일 시작된 2016 제69회 칸영화제가 5월 22일 막을 내렸다. 그로써 ‘매드 맥스 시리즈’의 명장 조지 밀러를 수장으로 한 칸 경쟁 부문 9인 심사위원단은, 10년 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으로 정상을 밟았던 ‘살아 있는 좌파 영화의 전설’에게 또 한 차례의 최고 영예를 선사했다.


에미르 쿠스트리차(<아빠는 출장 중, 1985>, <언더그라운드, 1995>), 장-피에르&뤽 다르넨 형제(<로제타, 1999>, <더 차일드, 2005>) 등이 일찍이 칸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 거머쥔 감독들이다. 그러나 아직 그 영예를 세 번 차지한 감독은 없다.   
한편 한국 영화로는 <다른 나라에서>(홍상수)와 <돈의 맛>(임상수)에 이어 4년 만에 경쟁 섹션에 진출한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가 끝내 빈손으로 돌아왔다.
 박찬욱 감독은 2004년에 칸 첫 초청작인 <올드 보이>로 2등상 격인 심사위원대상을, 2009년 두 번째 초청작인 <박쥐>로 심사위원상을 거푸 받았다. 이번 출품작인 <아가씨>도 장르 영화에 일가견 있는 조지 밀러가 심사위원장이었으며, 21편의 경쟁작 중 장르적 쾌감이 워낙 압도적인 작품인 만큼, 막판까지 수상을 기대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다른 지면에서 이미 말했듯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평생 목수로 일하다 심장병으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초로의 주인공, 다니엘 블레이크(데이브 존스 분)의 이야기다. 다니엘이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재취업 교육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복잡다단한 과정을 추적하면서, 영국 복지제도와 관료주의 등의 맹점을 비판한 좌파 감독 특유의 문제적 걸작이다. 그러나 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런 유형의 사회 고발성 영화들이 빠지기 쉬운 이분법적 선전선동성으로 흐르지 않고, 걸작 휴먼 드라마로 비상한다. 밑바닥 처지에 놓이게 된 ‘시민 다니엘 블레이크’가, 어느 날 자기보다 훨씬 더 열악한 처지에 처해 있는 싱글맘(해일리 스콰이어)과 그 자녀들을 발견하고는 저 세상 사람이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가족을 도우며, 그들과 함께 난국을 헤쳐 나가는 극적 과정이 기대 이상의 정서적 감동과 깊은 지적 울림, 강렬한 교훈적 메시지 등을 두루 선사한다.   
거장은 시상식장에서 월드 스타 멜 깁슨으로부터 상을 받으면서, ‘위험한 긴축 프로젝트(The dangerous project of austerity)’를 역설(이하 스크린 인터내셔널 인용)했다.
“우리는 희망의 메시지를 줘야 하며, 또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바로 지금 위험한 지점에 있다. 우리는 우리를 거의 파국 속으로 몰아넣은 소위 신자유주의 사상에 의해 추동되는 위험한 긴축 프로젝트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 
황금종려상 수상작에 시선을 고정시키다 보면, 실상 <아가씨>의 수상 불발에 대해 당연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이 작품, <아가씨>에 대해 필자가 한 매체에 기고한 ‘전찬일의 칸 리포트’를 잠시 인용해보겠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치하의 조선을 배경으로 조실부모하고 후견인 격인 이모부 고우즈키(조진웅 분)의 보호(감시?)를 받는 히데코(김민희), 그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는 가짜 백작(하정우)과 백작의 사주로 재산 탈취에 동참하는 하녀 숙희(김태리) 네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휴먼 스릴러.”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 소설로 영미권에서 선풍적인 인기와 높은 평가를 동시에 얻은 영국 작가 사라 워터스의 세 번째 장편소설이자 그녀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의 하나로 평가되는 <핑거스미스>(2002)를 느슨하고 자유롭게 옮겼다.”

흥행 요소 강조한 <아가씨>의 수상 불발 

<아가씨>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는 너무나도 다른 성격, 다른 지향, 다른 메시지, 다른 스타일, 다른 비전을 지닌 영화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달리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큰 사회로 나아가지 않는다. 1930년대 일제 치하 한국의 어느 귀족 집안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소수 개인들의 내·외면에 집중한다. 연출 스타일도 지독히 양식적·장식적이다. “박찬욱 특유의 B급 감성적 비틀기와 비르투오소(Virtuoso/거장)적인 영화적 완성도를 뽐내면서도”, 스릴러로서 다분히 통속적인 장르 컨벤션을 비롯해 아시아 영화 치고는 제법 적나라한 동성애 묘사 등 상업적인 성격을 확연히 드러낸다. 1백 수십억이 투하된 대중영화인만큼 당연한 선택일 것이다.
3부 구성으로 이뤄진 영화는 3부에서 박찬욱만의 독특한 영화 분위기를 물씬 풍기나 그 양적 비중이 적은 편이다. 그 비중이 가장 큰 1부에서는 주류 영화적 문법을 충실히 따른다. 2부에서는 크고 작은 영화적 비틀기를 시도하나 전체적 느낌은 3부보다는 1부에 가깝다. 감독도 인정했듯 결국은 그 상업성이 수상에 치명적 걸림돌로 작용했을 듯하다.
그래서일까, 영화에 대한 칸 현지 전문 평자들의 평가는 저조한 편이었다. 가령 칸 데일리 중 가장 널리 참고 되는 ‘스크린’에서 세계 여러 나라 평론가 11명이 평점을 줬는데, 종합 평균 평점에서 4점 만점에 2.1점을 받았다. 경쟁작 21편 중 꼴찌에서 5번째였다. 15인의 프랑스 평자들로만 이뤄진 ‘르 필름 프랑세’에서는 그보다 더 저조한 1.7점이었다. 하지만 이 평점은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스크린’을 기준으로 삼으면, 올 칸의 거의 모든 수상작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평점을 얻었다. 수상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부터가 2.4점으로 <아가씨>와 0.3점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더욱이 <아가씨>는 4점 만점도 없지만 0점도 없는데 반해,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4점도 1명, 0점도 1명 있다. 

‘영화제의 정치학’이 작용한 영화제 수상

캐나다 자비에 돌란의 <단지 세상의 끝>은 1.4점으로, 스크린 역대 최저 평점을 득한 숀 펜의 <더 라스트 페이스>(0.2점)에 이어 밑에서 2등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심사위원대상이라는 큰 상을 거머쥐었다. 12년 만에 고향을 찾은 주인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한바탕 소란을, 그리스 고전 비극을 연상시키는 연극적(혹은 실험적?) 연출이 심사위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각인시켰던 것일까. 판단컨대 그 상은 <단지 세상의 끝> 이 한 편보다는, 27세에 불과한 나이에 칸 경쟁 초청만 3번, 전작 <마미>로 2014년 심사위원상을 안은 바 있는 ‘칸의 미래’인 감독에게 안긴 것일 공산이 크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설해온, ‘영화제의 정치학’에서 내리는 진단이다. 
프랑스의 중견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퍼스널 쇼퍼>는 ‘르 필름 프랑세’로부터 고작 0.9점(스크린 평점은 2.3점)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점을 받은 루마니아 크리스티안 문주의 <졸업>과 감독상을 공동 수상했다. 시도 때도 없이 유령 이미지에 시달리며, 파리 패션 지하세계에서 유명인의 의상을 구매하는 일을 하는 한 여성 퍼스널 쇼퍼(크리스틴 스튜어트)를 축으로 펼쳐지는 스릴러. <퍼스널 쇼퍼>는 19회 칸을 찾은 내가 겪은 최악의 졸작 중 한 편이었다. 
각본상과 남자 연기상(샤하브 호세이니)을 동시에 안은 이란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세일즈맨>과, 여자 연기상(자클린 호세)을 가져간 필리핀 브릴얀테 멘도사의 <마 로사>도 각각 2.4점과 2.2점으로 <아가씨>와 비슷한 수준이다. <세일즈맨>은 이웃한 건물의 위험한 공사로 인해 부득이 테헤란 중심으로 이사를 가게 된 젊은 커플이 이전 세입자와 연루된 사건을 겪으며 삶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드라마다. <마 로사>는 마닐라의 가난한 동네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며 마약을 팔다가 남편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고, 그로 인해 가족 모두가 말 못할 고통을 겪게 되는 네 아이의 어머니 로사의 이야기다. 
심사위원상을 받은 영국 안드레아 아놀드의 <아메리카 허니>도 스크린 평점 2.4점으로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 중서부를 배경으로 낮에는 잡지를 팔고 밤에는 자기들만의 파티를 여는 일군의 청년들에 관한 로드무비성 드라마. 동어반복적 플롯 탓에 2시간 40분에 달하는 러닝 타임이 과잉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감각적인 음악 효과나 속도감 넘치는 촬영 등은 주목할 만하다. 감독은 전작 <레드 로드>와 <피쉬 탱크>에 이어 세 번째로 심사위원상을 차지해 화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칸 현지의 영화 전문가들의 평가를 토대로 평하자면, 올 칸 경쟁 심사위원들의 결정은 거의 다 ‘의외’의 선정이라고 할 만하다. 예외를 들라면 크리스티안 문주의 <졸업> 정도다. 무려 3.7점으로 ‘스크린’ 사상 역대 최고의 평점을 받으며 일찌감치 최유력 황금종려상 후보로 점쳐진, 독일 마렌 아데의 <토니 에르트만>과, 여전한 ‘건재’를 과시한 미국 독립영화계의 거물 짐 자무쉬의 <패터슨>(3.5점), 노익장의 성공적 귀환을 알린 폴 버호벤의 <엘르>(3.0점), 그리고 브라질 영화의 어떤 저력을 웅변한 클레버 멘도사 필료의 <아쿠아리우스>(2.9점) 등 상당한 호평을 받은 영화들이 무관의 수모를 당한 것이다.
물론 심사위원들의 최종 선정이 이른바 영화 전문가들의 평가와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칸의 수상 결과는 전문성 결여, 과도한 안배 등의 비판과 비난을 면할 길이 없어 보인다. 특히 <퍼스널 쇼퍼>가 3등상 격인 감독상을 공동수상한 것은, 칸 개최국 프랑스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곤란할 것이라는 심사위원들의 과도한 ‘배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프랑스 영화에 상을 줘야 했다면, ‘르 필름 프랑세’로부터 2.7점이라는 비교적 양호한 점수를 받은 브뤼노 뒤몽의 <슬랙 베이>가 더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감독 특유의 진지한 드라마 대신 코미디를 통해 인간 본성을 탐구한 시도가, 퍼스널 쇼퍼를 연기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영화의 거의 전부인 <퍼스널 쇼퍼>보다는 훨씬 더 인상적이니까. 앞서 지적했듯 자비에 돌란의 <단지 세상의 끝>이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한 것도 의외를 넘어 이변이다. 그 정도로 세계 최고 영화제 2등상을 거머쥔 것이 이해하기 힘들다고 할까. 당장 지난해 심사위원대상작인, 라즐로 네메스 -올 칸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의 <사울의 아들>과 비교해도 그 실험은 나이브하다. 감독이 제 아무리 ‘칸의 미래’라 할지라도, 지나친 애정 표시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쿠아리우스>에서 ‘신의 연기’를 선사한 60대 중반의 디바 소냐 브라가나, 연기에 있어서만은 이번 21편 경쟁작 중 그 어느 영화에도 꿀릴 게 없었던 프랑스 니콜 가르시아 감독의 <프롬 더 랜드 오브 더 문>에서의 마리옹 코티아르 등을 제치고 <마 로사>가 여자 연기상을 안은 것은 의외나 이변을 넘어 가히 ‘난센스’라 할 만하다. 아마추어적 신선함이 눈길을 끌긴 했으나, ‘칸의 여왕’으로 등극하기엔 지나치게 아마추어적이기 때문이다. 부패한 필리핀 (경찰) 사회를 추적하는 영화의 시선 또한 지나치게 단선적이다.

현대 사회의 소중한 가치들을 되짚어  
  
그래도 2016 칸의 어떤 경향을 짚을 순 있지 않을까? 황금종려상 등에 초점을 맞춰 올해 칸의 어떤 경향을 말해본다면,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개인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영화들이 호평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올해 칸은 현대사회가 놓치고 살아가는 크고 작은 소중한 가치들을 짚은 영화들이 대다수를 이뤘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단지 세상의 끝>, <아메리칸 허니> 등 수상작들만이 아니라, <토니 에르트만>이나 <패터슨>, 스페인 영화의 자랑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훌리에타>(2.4점) 등 무관의 수작들도 매한가지다. 이런 관점에서도 <아가씨>의 수상 실패는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아가씨>는 올해 칸의 그 어떤 경향에도 들어맞지 않는 ‘예외적 문제작’인 것이다. 수상작 중 단 한 편도 장르 컨벤션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없지 않은가.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미드나잇 스크리닝의 <부산행>(연상호) 등 <아가씨> 이외의 한국 영화에 대한 칸 현지 평가는 어땠을까? 앞서 언급한 칸 리포트에 밝혔듯, 예정 일시인 13일 밤 11시 45분이 아니라 14일 새벽 0시를 넘어 상영된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은 기대 이상의 큰 호응을 끌어낸 게 사실이다. 다음 날 애프터 스크리닝에서는 그 온도가 적잖이 차이가 나긴 했다지만 말이다. “레드 카펫을 안내한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역대 최고의 미드나잇 스크리닝이었다. 연상호 감독의 차기작은 경쟁 부문에서 볼 수 있을 것(The best midnight screening ever. Mr.Yeon must be competition next time)’이라는 (다소 성급하게 비칠 수도 있을) 찬사를 보냈다는 것이 그 결정적 증거”다. <부산행>은 “전대미문의 재난이 대한민국을 뒤덮은 가운데, 서울역을 출발한 부산행 KTX에 몸을 실은 사람들의 생존을 건 치열한 사투를 그린 재난 블록버스터”다.
<곡성>에 대해서도 호평이 쏟아지기는 했다. 그러나 18일 밤 스크리닝이 아닌 오전 11시 반 2,300석에 달하는 뤼미에르 대극장에서의 프레스 스크리닝 겸 첫 번째 공식 스크리닝에서의 반응은 ‘당혹’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면서 예의상으로라도 터져 나오기 마련인 박수가 거의 없었던 것. 박수가 나오는가 싶더니 1초도 채 넘지 않아 그치고 말았다. 영화 상영 도중 적잖이 저널리스트들이 자리를 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호응이 너무 인색해 개인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평론가 김태현도 말했듯 국내 관객들의 반응이 양분돼, 첫 번째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긴장감에 156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 타임을 잊었다’라는 반응과 두 번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난해하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는데, 칸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후자 쪽이었던 듯하다. <아가씨>와 매한가지로 영화적 완성도야 흠잡을 데 없이 빼어나지만, 문화적 배경이 다른데다 제 아무리 매끄럽게 한다 해도, 숱한 결여들이 발생하기 마련인 자막을 통해 영화를 따라가야만 한다는 현실 등을 감안하면 그렇지 않을 도리가 없을 수도.”

우리에게 칸의 의미는 무엇인가

문득 밀려드는 의문! 대체 칸은 우리에게, 나아가 세계 영화계에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일까? 날로 상업적으로 치달으면서 여기저기서 맹공을 당하기도 하는, 지극히 귀족적이며 진입 장벽이 높은, 세계 최고의 (경쟁) 국제영화제라면서도 올해의 <더 라스트 페이스>나 <퍼스널 쇼퍼> 등처럼 수준 이하의 졸작이나 태작들을 적잖이 초청하기도 하는 모순의 영화제. 세계 3대 영화제라면서, 왜 그렇게들 베를린도, 베니스도 아닌 칸에 목을 매는 걸까? 흔히 세계 최대 규모 및 최고 권위 등을 자랑한다지만, 막상 그곳에서 조우하는 영화들이 크고 작은 실망감을 안겨주는 사례들은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여타 영화제들에도 해당되는 바지만, 칸영화제는 오락 및 산업으로서의 영화의 도저한 질주 앞에 무력해져가던, 예술·문화·소통·교류 등으로서 영화의 위상을 사수하고, 제고시키기 위한 유의미한 시도였다. 20세기 전반을 관통하며 미국 영화에 밀려 영화 종주국으로서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진 프랑스가 그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한, 다분히 유럽중심주적 몸부림인 감도 없지는 않았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작가주의’는 그 시도, 그 몸부림의 보루요 수단이다. 본말이 전도돼 그 자체가 목적이 돼버리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기는 해도 말이다.  
이 땅의 일반 관객의 눈으로 보면 할 말은 더 많아진다. 칸 진출은 말할 것 없고 영예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 한들 현실에서의 영향력이란 미미한 것이 현실이다. <올드 보이>의 흥행은 칸과는 무관하지 않았는가. 외국 영화의 경우는 특히나 더 그렇다. 당장 2007년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루마니아라는 영화 변방의 존재감을 뚜렷이 증명한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4개월 3주···그리고 2일>을 떠올려 보라. 얼마나 초라한 흥행 스코어에 그쳤는가. 
그렇기에 칸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그 의미를 과장하려는 갖은 사대주의적 처사는 당장 중단돼야 한다. 그리고 지양돼야 한다. 칸에 비판적인 목소리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무작정 칸의 의미를 폄하하거나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양보한다 해도 그런 부정적이고 비관적 입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내 개인적 경험에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영화 역사라는 구체적 맥락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베니스, 베를린과 더불어 칸은 세계 영화 지형도를 그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주지하다시피 일본 영화가, 아울러 아시아 영화가 서구 일변도의 세계 영화 역사에 등장해 남다른 주목을 끌게 되는 것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안으면서였다. 장 이머우와 중국 제5세대 영화들이 세계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전격적 계기는 <붉은 수수밭>이 1988년 베를린 황금곰상을 차지하면서였다. 
칸의 사례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20세기 후반의 세계 영화사에 초점을 맞추면, 칸의 역사가 곧 세계 영화사였다고 해도 과언만은 아니다. 그 역할은 그만큼 절대적인 것이다. 현대 영화(Modern Cinema)의 분수령인 ‘누벨 바그’의 기념비적 계기가 1959년 칸영화제였다는 것은 상식이 된지 오래다. 모던 시네마의 두 거목인 이탈리아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페데리코 펠리니가 <정사>와 <달콤한 인생>으로 영화의 문법을 다시 쓰며 그 존재감을 선명히 각인시킨 것도 1960년 칸에서였다. 앤드류 새리스가 프랑수아 트뤼포의 ‘작가 정책’을 작가주의로 탈바꿈시키며 훗날 영화 연구의 학제화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는 것도 1961년 칸 체험을 통해서였다. 영화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왕가위가, 그리고 박찬욱이 세계 영화계의 스타 감독이자 명사로 으뜸 서게 되는 것도 칸을 통해서였다. 단언컨대 ‘감독 박찬욱’은 ‘올드 보이 이전’과 ‘올드 보이 이후’로 나뉜다. 
그렇다고 칸이 목적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사구시적 실용 노선이다. 칸의 현실적 영향력, 명성, 권위 등을 냉철하게 인정하면서, 최대한 활용하는 것! 우리 영화의 존재감을 세계만방에 알리는데 있어, 칸영화제보다 효과적인 윈도우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글·전찬일
영화 평론가, 부산국제영화제 연구소장, 프로그래머로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전격 합류했으나, 아시아필름마켓 부위원장을 거쳐 지난해부터는 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다. 특유의 ‘오지랖 정신’으로 영화를 포함한 문화전반에 걸쳐 ‘글로컬 커넥터’의 삶을 걷고자 애쓰고 있다. 저서로 평론집 <영화의 매혹, 잔혹한 비평>(2008)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