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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7 김성인 이달의 에세이 가작
a.m. 7:00 휴대전화에서 진동하는 스타카토 ········· ·········
10층 건물 오피스텔 826호의 전등이 켜졌다. 나는 콘크리트로 만든 표 3행 26열에서 하루하루 점멸하는 인간이다.
매일 오전 세 시간씩 영어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방값은 부모님께 받아도 밥값은 벌어서 쓰자는 게 취업준비생의 최소한의 양심이다. 요즘 학원에서는 ‘예비중등 겨울방학 내신 특강’이 막바지다. 매일 서른 개씩 단어 시험을 봐서 30점 만점에 26점 이상이면 재시험 없이 집에 갈 수 있다. 채점을 해 보면 통과하는 학생이 거의 없는 건 물론이고 대여섯 개 겨우 맞기 일쑤다. 나라면 남아서 시험 보긴 죽어도 싫어서 미리 외워 올 텐데. 의찬이는 오늘도 4점.
슬슬 배가 고파질 때쯤 일을 마친다. 평소 같으면 집에 가서 점심을 차려 먹고 도서관으로 향하겠지만, 오늘은 서울에서 스터디가 있다. 세 시간 여유가 있지만 아직 끝내지 못한 숙제가 있어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그 짧은 거리를 지나는 동안 내 눈과 발걸음을 잡아끌고 마는 곳이 있다. 신선한 샌드위치에 과육이 듬뿍 담긴 자몽 주스면 딱 좋겠다. ‘혼밥’은 역시 GS편의점.
‘포켓몬 Go’를 시작하고부터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길이 막혀 속도가 늦어질수록 환영이다. 한창 포켓볼을 쓸어담는데, 속도가 빨라지며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할 수 없이 게임을 끄고 웹페이지를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엄지손가락을 멈춘 마법의 제목 ‘산수도인 별자리운세’. 스크롤을 쭈욱 내려 천칭자리에 이르면
[이번 주는 자신을 위해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행운의 날짜: 15일, 17일 / 행운의 물건: 택배 / 행운의 장소: 편의점 / 행운의 색상: 네이비]
좋았어, 이번 주도 잘 부탁한다, 심심풀이 별자리 점.
머리에서 김이 솟을 때쯤 스터디를 마친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느새 어둑해진 밖으로 나온다. 눈에 시린 바람이 불어와 닿는다. 저녁으로 뭘 먹을지 추위를 헤치며 고민한다. 이럴 거면 정하고 나올 걸, 매 번 밖에 나와서야 후회한다. 광장에 가야 하니까 간단하게 라멘집에서 때우기로 한다. ‘라멘 좋지!’하면서도 내심 다른 데 미련이 남는다. 아, 간절하다 소주에 회 한 점.
게 눈 감추듯 한 그릇을 뚝딱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가게 밖으로 나오면 부예진 안경 너머로 흰 물결이 보인다. 시청 주변까지 가득 채운 태극기들이 천천히, 그리고 큰 소리를 내며 이동하고 있다. 매주 마주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당신들의 천국, 그 생경한 풍경에 몸이 움츠러든다. 그들은 남대문으로 향한다. 나와 내 친구들은 반대편으로 걷는다.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는 사람처럼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소실점.
띵-동. 문자 알림음이 울린다. ‘채용팀’ 세 글자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온다. 심장이 쿵쿵대기 시작한다. 꽁꽁 언 엄지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스윽 밀고는 이내 화면을 뒤집는다. ‘제발’ 두 글자를 딱 열 번 말하고 다시 휴대폰을 본다. 일시 정지한 내 주위로 작은 한숨이 새어나온다. 반반의 확률에서 나는 또 졌다. 미리보기 화면에는 뜨지 않는 ‘아쉽지만,’의 반점.
아침에 의찬이의 4점에 혀를 차던 나는 바로 그날 저녁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유레카를 외친다.
“아, 인생에는 마이너스 점수도 있는 거구나!”
패기 넘치게 등판하자마자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고졸 루키처럼 1회 초부터 대량 실점.
여덟 시 마감을 앞둔 로또 복권을 사려 사람들이 줄 서 있다. 그때 뇌리에 반짝하는 산수도인의 말씀 [행운의 장소: 편의점]
5천 원이 아까워 나는 그저 구경이나 한다(50 억을 탈지도 모르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전봇대에 대고, 수능 시험장보다 더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컴퓨터 싸인펜으로 정성스레 콕콕 찍는다, 여섯 개의 점.
세상 사람들을 둘로 나눈다면 로또를 매주 사는 부류와 단 한 번도 사지 않는 부류가 되겠다. 나는 분명 후자인데, 그럼에도 ‘만약 당신의 로또 1등에 당첨된다면?’ 이라는 상상을 종종 하곤 한다. 우선 얼마 떼서 집 사고(월세여 안녕), 그 다음 부모님께 일부 드리고(짝짝짝), 하루 정도는 카드 들고 나가서 되는대로 사보는 거다(그래봤자 예금 이자보다도 적겠지). 두세 시간의 행복한 상상은 내 지독한 현실주의에 밀려난다. 내 공은 내가 친다. 투타 겸업 4번타자, 좌측 담장 넘어갑니다~~~!!! 역전 만루 홈런. 매일 기도하는 변곡점.
광장에 서면, 꼭 나 같은 점들이 삼삼오오 모여 점멸한다. 거기 당신은 반백의 나, 또 저기 당신은 열일곱의 나. 새로 찍는 좌표, ‘나 여기 있어요’. 누군가 전해준 흰 양초 들고 자리 잡는다. 옆에 앉은 아저씨가 불을 붙여주었다. 다가오는 봄, 점점.
김성인
만26세, 인간이 백수(白壽)를 누리게 된 21세기, 미리 백수(白手)를 경험하는 얼리어댑터다. 전공이 커뮤니케이션인데 취업에는 영 통하지 않는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태평스런 성미 덕에 그럭저럭 견디고 있다. 원룸에서 외로이 명멸하다, 최근 몇 개월은 광화문에서 촛불 들고 좌표 찍는 중. 반짝반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