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어떤 대통령이 필요한가?

2017-03-31     목수정 | 재불작가

유라시아 대륙 양극단에 있는 두 나라, 한국과 프랑스에서 대선 시계가 동시에 돌아가고 있다. 어쩌다 보니 그 두 나라에 머리와 몸을 나눠 두고 사는 사람이 돼, 양쪽으로 휙휙 고개를 돌리며, 마음과 신념을 두 나라의 선거에 투사하기 바쁘다. 5년마다 한 번씩, 프랑스가 5월 대선을 치르고 나면, 7개월 후 한국이 12월에 새 대통령을 뽑곤 하던 두 나라의 대선시계가 같은 시점에 맞춰지게 된 건, 우리의 촛불혁명이 7개월을 단축시켰기 때문.


“우지끈!” 축적된 분노와 정의를 향한 결연한 의지가 관성의 힘을 끊어내는 소리를 우리는 듣고야 말았다. 적폐를 향해 벌인 시민항쟁의 성과로 맞이한 5월 조기대선은 그 자체로 승리의 잔치여야 하겠지만, 선거의 또 다른 본질은 권력투쟁이 아니겠는가. 완연한 봄기운이 천지만물을 흔들어 깨우고 있는 지금, 민주주의 제도의 가장 화려한 이벤트인 대선은 청산, 심판, 희망, 도전 등의 단어들을 뿜어내면서 유권자들을 충동질한다. 유권자로 선거판에 불려온 사람들은 지난 대통령이 얼마나 그들을 실망시켰는지 낱낱이 명세표를 적어보고, 구악을 퇴치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며 그들이 펼쳐낼 새로운 세상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불과 한 달 전, “대한민국은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서 가장 역동적 가능성을 품고 있는 나라”라고 적은 바 있다. 질서와 존엄을 잃지 않은 시민들의 물결이 한 목소리로 죄지은 자들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한 발자국씩 승리에 다가서던 전율을 나누지 않았던가.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나라 프랑스에선 사상 최악의 대선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종주의 정당 후보 르펜이 지속적으로 지지율 1위를 차지하며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프랑스의 극우화를 증언하고 있고, 그 뒤를 이은 우파 정당의 후보 피용은 상원의원시절 가족에 대한 부당한 급여지급으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 미디어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군소후보에서 예상을 뚫고, 사회당 대선 후보로 당선된 아몽은 기본소득 공약으로 ‘몽상가’라는 조롱과 피케티의 지지를 함께 받으며 선전해 왔으나, 사회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무소속으로 단독 출마한 마크롱(로스차일드가 은행가이자 올랑드 정부의 재경부 장관을 지낸 수퍼리치)의 귀염둥이를 앞다퉈 지지하자, 배신감을 곱씹는 신세가 됐다. 오직 극좌후보 멜랑숑만이 지난 대선에서보다 한층 더 설득력 있는 대안을 들고 나와 차근차근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다. 현재 대선 구도로 보자면 프랑스인들은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다. 

그 순간, 한국인들은 4.19혁명 이후 57년 만에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제 막,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낸 수천만의 시민들보다 더 강한 사람들은 없는 법. 피를 흘리지 않은 대신, 촛불을 들어야 했던 시간은 길었고, 그 긴 시간은 시민들에게 주권자로서의 강력한 의식을 환기시키는 시간으로 작용했다. 1천6백만의 촛불시민이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정의’와 ‘진실’이었다. 그들을 넘어서는 정당성은 있을 수 없으며, 그들의 요구는 관철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개월, 모이는 사람의 수만큼 정확한 보폭으로 우리가 세상을 움직여낼 수 있음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선거가 이전투구의 장이 되는 것은 만인이 만인의 서로 다른 욕망을, 권력을 점하는 합법적 통로인 선거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촛불시민들의 힘으로 마련한 이번 조기 대선에선, 한 갈래로 일치된 요구의 충족이 모두 앞에 우선과제로 놓인다. 대한민국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실현 가능한 희망을 손에 쥔 사회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촛불시민의 구호, 바로 그것이 공약 

후보도, 유권자도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임해야 하는 이번 대선에 주어지는 뜻밖의 선물은 기본 공약들이 찾아다닐 필요도 없이 코앞에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촛불혁명의 주체들이 외쳤던 구호들은 새 정부가 실현해야 할 기본 과제이며, 이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한 목소리로 외친 명징한 요구들을 얼마나 ‘잘’ 실행할 수 있는지, 국민들이 시작한 촛불혁명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지, 그 계획과 실천 의지를 보여야 하며 우리가 선거를 통해 판별해야 할 점도 바로 이것이다. 그 밖의 과제들은 1차 필수과목을 통과한 후보들에게만 주어지는 선택과목에 해당된다.

10월부터 3월까지, 전국에서, 전 세계 70여 개 도시에서 한국 사람들은 외쳤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우병우를 구속하라”, “이재용을 구속하라”, “세월호의 진실을 규명하라”, “한상균을 석방하라”, “재벌을 해체하라”,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새 대통령의 첫 과제는 물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모든 관련자들을 엄중하게 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관용 없는 법 처벌을 받게 하고, 섣불리 화해와 통합의 이름으로 사면이라는 선물을 하사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노태우가 사면돼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광주시민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 통한으로 남은 정치적 과오였다. 죄 지은 자를 단죄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며,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당위가 박제된 진실이 아님을 입증할 때, 비로소 법치국가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단 한 올의 의혹도 없이 밝혀내고, 그 모든 책임자들을 단죄하는 것, ‘이명박근혜’ 시절에 벌어진 권력주도형 비리들을 파헤치고 거기서 생겨난 모든 범죄수익을 국고로 환수하는 것. 이미 백해무익한 것으로 밝혀진 사드 설치를 철회하는 것, 권력과 결탁해 부당 이득을 취하고, 시장 질서를 어지럽혀 온 주범 재벌 체제를 확실히 뜯어 고치는 것. 노동자가 존중 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촛불대통령이 걸머져야 할 의무다. 촛불시민들과 함께 거리에서 호흡했던 후보라면, 당연히 잘 알 수밖에 없는 의무들. 그래서 쉽다. 긴 혁명의 시간이 조기 대선의 과제를 아주 쉽게 만들어줬다. 질문도 답변도 모두 나와 있다. 이제는, 가장 절실한 의지와 빛나는 지혜로 그 과제를 수행할 사람은 누구인지를 판별하는 것만 남았다.
 
경계할 것은 ‘복종의 관성’

그러나 인간사에는 언제나 예기치 않은 변수들이 뛰어들게 마련이다. 선한 의지가 언제나 선한 결말을 낳지는 않는다. 

2010년 겨울에서 2011년 봄, 아랍세계에는 일련의 혁명의 일어났다. 아랍의 봄이라 불리던 당시의 시민혁명 중 일부(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는 부패한 정권을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으나, 지금 그들은 하나같이 한층 엄혹한 겨울을 지나고 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도 왕정복고와 쿠데타를 거듭해오다 19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안정된 공화국의 형태로 자리 잡은 케이스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같은 경험이 반복됐다. 4.19혁명의 과실을,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가 잠식했고 87년 6월항쟁의 눈부심은, 노태우 정권의 수립으로 빛을 잃었다. 세상에 태어난 그 많은 혁명들이 새 시대의 문고리를 잡지 못한 채 스러져 간 것은, 그람시의 통찰을 빌자면 “오래된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이 아직 탄생하지 못했기 때문”. 

혁명은 불꽃처럼 순식간에 타오르는 것. 그 열기에 흥분해 우왕좌왕 하는 사이, 혁명을 채가려고 아가리를 벌리고 서 있는 자들에게 혁명은 쉽게 투항해 버리곤 했다. 그러나! 2016~2017년 촛불시위의 호흡은 길었고, 그 속에서 우리의 신념과 요구는 견고하게 다져졌다. 아무도 우리의 구호를 모른다고 말할 순 없을 만큼 수백 번, 수천 번 허공을 향해 외쳤다. 우린 거리를 점령했고, 아버지 박정희의 유산을 껴안은 딸 근혜를 ‘폐위’시켰다. 폐위라 했다. 박근혜를 끌어내리는 일은 마치 한 왕조의 자손이라도 된 듯, 궁궐에 틀어박혀 은밀한 삶을 구가하며 때때로 만인 앞에 미소와 악수를 시전하던 시대착오적 인물을 끌어낸 일이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권좌에서 제거함으로써, 우린 수구 미디어의 농간과 ‘종북’딱지 붙이기라는 권력의 토끼몰이도 어느 정도 떨쳐낼 수 있었다. 그런데, 강 너머 보이는 새 세상으로 가는 길에 한 복병이 눈에 들어온다. 다름 아닌 ‘자발적 복종’을 행하는 자들이다.

박근혜가 아버지 박정희의 망령까지 뒤집어쓰고, 무대에서 사라진 후, 우린 오열하고 발작하는 일부 신도들을 봤다. 박사모. 정치인을 종교지도자처럼 의심 없이 추앙하고, 그 앞에 무릎 꿇는 자들의 출현은 비단, 극우 진영에서만 일어났던 일은 아니다. 세상 그 어떤 나라보다 극성맞은 종교들이 들끓는 한국사회에서, 어떤 영역에서든 만인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들은 쉽게 숭배의 대상으로 등극한다. 이런 현상은 온전히 이성의 힘을 작동시켜 판단해야 할 정치인에 대한 평가에조차 팬덤이 조직적으로 자리 잡게 했으며, 정치인들은 그것을 적극 활용해 왔다.

복종을 향한 관성은 끈질기게 우리 몸에 배어있다. 촛불혁명을 실행한 위대한 시민들마저도, 그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지만, 복종의 굴레에 오래 길들여졌다면, 갑작스런 자유는 두려움일 뿐이다. 잠시 자유를 누리는 홀가분함을 즐기다가도, 그들은 무릎을 굽혀 복종을 바칠 대상을 찾는 것으로 안정과 위로를 얻는다. 그것이 ‘자발적’ 복종이기에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착각하면서. 그러나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지지’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우상 숭배이며, 군주를 향해 충절을 맹세하는 복속의 태도인 것이다. 그런 곳에선 민주주의의 싹이 자랄 수 없다. 

우리의 의지를 단련시키고, 집단 지성을 훈련시키던 광화문 거리의 촛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촛불시민의 위대한 승리를 믿는다.  


글·목수정 
동숭아트센터 기획팀장, 국립발레단 기획팀장,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을 지냈다. 현재는 파리에 거주하면서 칼럼리스트, 작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저서로는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야성의 사랑학>,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스테판 에셀 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