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베의 <강희제 전기>
문명교류의 비밀 텍스트(4)
2017-12-01 안재원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부베(J. Bouvet, 1655~1730)의 <강희제 전기>가 탄생하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강희제(康熙帝, 제위 1661~1722) 자신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루이 14세(Louis XIV, 제위 1643-1715)가 강희제에게 보낸 서신을 아래 공개한다.
중국의 황제에게
1688년 8월 7일 파리 마를리에서 보냅니다. 가장 고귀하고 가장 뛰어나며 가장 강력하고 가장 고결한 무적의 군주여, 나의 귀하고 선한 친구여, 하느님께서 부디 당신의 권세를 행복한 결실로 높여주시기를.
군주여, 그대 곁에, 그리고 그대의 나라에 유럽의 학문에 능통한 학자들이 많이 있기를 염원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에 답해, 나는 몇 년 전 수학자이자 예수회 신부인 신하 여섯을 보내 학문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들과 파리에 세운 한림원에서 관찰한 천문학적인 발견들을 그대에게 알려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당신의 나라를 갈라놓는 바다를 오래 항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고가 나기 쉽습니다.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그래서 그대의 바람에 부응하기 위한 나의 계획은 이러합니다. 예수회 신부들이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수학자들인 다른 이들을 쉬리백작과 함께 더 짧고 덜 위험한 육로로 보내겠습니다. 이들이 그대에 대한 나의 존경과 우정의 최고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동맹이 긴밀해질 수 있도록, 쉬리백작이 돌아가는 길에 위대하고 놀랄 만한 당신의 도움으로 출판된 모든 대단한 내용의 충실한 증인이 돼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의 권세를 복된 결말로 드높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루이 14세의 계획, 대륙 횡단로를 통해 학자들을 파리에서 북경으로 파견하려 했던 계획은 물론 실현되지 못했다. 청나라와 러시아 공국 간에 벌어진 국경분쟁 때문이었다. 이 분쟁은 1689년 8월 27일에 맺어진 ‘네르친스크 조약(Treaty of Nerchinsk)’에 의해서 일단락된다. 거칠게 말하면, 유라시아 대륙의 경계는 이때 확정된 셈이다. 하지만, 루이 14세가 언급한 “출판된 모든 대단한 내용”은 파리에서 성공적으로 출판됐다. 유럽에서 소위 “중국열풍(Sinophilia)”을 불러일으킨 <중국 철학자 공자(Confucius Sinarum Philosophus)>(1687, 파리)가 바로 그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소개하겠다. 이어서,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루이 14세가 “몇 년 전에 보낸 수학자이자 예수회 신부인 신하 여섯”이라는 언명이다.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부베가 이 여섯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루이 14세가 “가장 고귀하고 가장 뛰어나며 가장 강력하고 가장 고결한 무적의 군주”라 예찬했던 중국 황제는 다름 아닌 강희제였다. 부베의 말을 아래 옮긴다.
황제가 몰두했던 것은 중국의 학문만이 아니다. 그는 태생적으로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학문을 조금 알게 되자, 바로 배우려는 굉장한 열정을 보였다. 그가 유럽의 학문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중국 내에서 최근에 있었던 박해의 장본인인 불경한 양광선과 예수회의 페르비스트 사이의 차이점이 계기가 됐다. 문제는 중국의 천문학이었다. 위선자 양광선은 중국의 천문학이 매우 정확하며 유럽의 천문학을 통해 전혀 수정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 한편 양광선은 계산할 줄도 몰랐고, 자신의 지식에 대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 황제는 유럽의 천문학이 우월하다고 판결했다. (…) 강희제는 수학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 또한 이 시기에 강희제는 우리 음악의 원리를 배웠는데, 이는 페레이라 신부가 도왔다. 페레이라 신부는 강희제를 위해 이 분야에 대한 책을 중국어로 썼고, 다양한 악기들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강희제가 이 악기들로 약간의 노래들을 연주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 강희제는 우선 우리에게 만주어로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설명하라고 했다. (…) 그는 계산과 도구의 사용법을 연습했고 논증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유클리드의 가장 중요한 명제에 대해서 자주 복습했다. 그 결과 5~6개월 만에 그는 기하학의 기본원리에 매우 친숙해졌다. 유클리드의 기본원리의 명제와 관련이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그는 어려워했으나, 이제는 즉시 명제와 증명을 기억해냈다. 또한 어느 날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12번도 더 그것을 읽었다고 한다. (…) 유약한 삶과 한가함의 적대자인 이 군주는 보통 매우 늦게 잠자리에 들면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우리가 일찍 궁에 가기 위해 꽤 서두르는데도,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자신이 했던 계산을 검토하게 하기 위해 혹은 새로운 문제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 대중은 이 두 가지 흥미로운 기구의 발명을 왕립 아카데미의 학자들에게 빚지고 있다. 황제는 우리에게 이것의 사용법과 중국달력에 적용하는 방식을 설명하라고 명했다. (…)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수학 도구들뿐만 아니라 중국에 들어온 예술의 모든 작품들에 대해 현재 그가 가진 수준 높은 견해를 가지기 시작했을 때, 유럽에서 만들어진 수학 도구들에 대한 존중은 곧 황제에게서 궁정의 대신들에게로 옮겨갔다. (…) 연구에 전념하는 것과 함께 학문에 대한 강한 열정은 한 개인에 있어서는 충분히 칭송할 수 있는 점이지만, 중화제국만큼이나 거대한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에게 있어서는 아마도 칭찬보다는 비난할 일일지도 모른다. (…) 황제는 지금 제국의 초기 번영을 회복하기를 열망했고, 자신의 제국에서 학문과 좋은 기술들을 융성시키고 자신의 통치를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해 다른 이들을 장려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기하학 다음으로 황제는 철학을 배우고자 했다. (…) 우리가 참고한 고대와 현대의 모든 철학서들 중 왕립 아카데미의 뒤아멜의 고대와 현대 철학서 외에는 우리가 지닌 목적에 더 적절해 보이는 것을 찾지 못했다. 이 탁월한 철학자의 견해의 견고함과 명료함, 그리고 정확성 때문에 이 철학자의 저작은 우리가 책을 쓰는데 내용을 참조하는 주된 원천이었다.
이 시기 황제는 위험한 병에 걸렸다. 따라서 모든 이들, 특히 의사들은 건강을 완전하게 회복함에 있어 방해가 되는 연구를 그만두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황제는 철학서의 입문용으로 우리가 쓴 표면적으로 짧은 논리학서만 읽었다. (…) 신체의 부분들 간의 관계와 상호적인 연쇄작용을 보고, 이것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이 저작에 이 시대에 발견된 가장 흥미롭고 유용한 모든 것들과, 유명한 베르네와 이 분야에서 탁월한 왕립 아카데미의 다른 학자들의 성과들을 담았다. (…) 우리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2-3달 안에 여러 가지 질병에 대한 18에서 20개의 개론을 썼다. (…) 이 기회에 간절한 청원을 받아들였다. 황제는 우리의 신성한 종교가 여러 해가 지나도록 고통 받고 있는 예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그토록 기다리던 칙령을 허용했다.(…)
황제는 위중한 병에 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의 의관들의 치료법이 소용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우리의 치료법을 동원했고, 이 치료법은 그가 처한 위험에서 그를 구출했다. (…) 다행히 이 시기에 중국에 온 퐁뜨네이와 비스델루 신부가 가져온 기나나무(Quinquina)를 통해서만 황제는 나을 수 있었다. 하늘이시여, 우리는 이 일에서 당신의 특별한 도움을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하늘의 뜻은 작년에 이 황제가 우리 종교에 승인해준 자유에 대해 황제에게 보상을 주고, 이를 통해 앞으로도 황제가 더욱 더 많이 복음의 사제들을 도와주도록 하게 만들기 위한 것 같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실제로 서양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을까? 부베가 조금 과장되게 묘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희제가 서양 학문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중국에서 저술된 책들을 그 방증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서양음악을 소개할 수 있다.
<사진2>는 서양의 음악을 배우기 위해 강희제가 페레이라 신부(Thomas Pereira, 1645~1708)에게 명해 한자로 저술된 <율려찬요(律呂纂要)>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책들을 방증으로 제시할 수 있다. 강희제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12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아카데미아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고 했던 플라톤이 부활한다면 정말 좋아했을 군주가 강희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에는 강희제의 배우기 좋아하는 천성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개방적이고 열린 마음이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천주교를 정식으로 인정해 준 사건이었다. 다음 <사진3>는 강희제의 교시다.
1691년의 일이었다. 루기에리(M. Ruggieri, 1543~1607)와 마테오 리치(M. Ricci, 1552~1610)가 중국에 첫발을 내디딘 지(1583년) 100년도 더 지나 이룬 쾌거였다. 앞에서 읽을 수 있듯, 물론 예수회 신부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천주교 인정서를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사실 강희제가 이질에 걸렸을 때 서양에서 가져온 기나나무에서 추출한 약품 덕택에 완쾌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하지만 이것이 강희제가 개방적인 마음과 특히 학문을 사랑했던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흔들 정도는 아니다. “자신의 제국에서 학문과 좋은 기술들을 융성시키고 자신의 통치를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본보기로 제시해, 다른 이들을 장려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부베의 언명대로, 배우기를 좋아했고 학문의 발전이 중화제국을 융성하게 만드는 첩경이라고 확신했던 통치자가 강희제였기 때문이다. 강희제의 이런 사상적 개방성 학문적 호학성에 대한 증인은, 다름 아닌 라이프니츠(G. Leibniz, 1646~1716)다. 그의 말을 아래 옮겨 적는다.
이 책은 현재 중국을 통치하는 왕의 초상과 <전기>입니다. 그의 신체와 정신에 못지않게 그의 업적이 이 책에 섬세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책은 예수회 소속의 요아힘 부베 신부가 불어로 지은 것으로, <중국의 최신 소식들(De Novissima Sinica)>의 재판에 추가하기로 했고, 라틴어 번역은 부베 신부의 친구이자 가장 박식한 이에 의해서 이뤄졌습니다. 부베 신부는 불란서 출신의 예수회 소속 다섯 신부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실수학자라는 호칭을 받고 중국에 왔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최근에 돌아온 부베 신부는 이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작년 10월 18에 폰테벨라퀘움에서 보낸 편지를 통해 다른 탁월한 작업에 대한 희망을 적어 보내왔습니다. <중국의 자연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베 신부는 중국에서 왕실 도서관으로 약초에 관한 책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의 서문은 의약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조만간 출판될 것입니다. 이제 부베 신부는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선교를 위한 보충 지원단을 이끌고 갑니다. 출발하기 전 루펠 항에서 보낸 편지에서 그는 기꺼이 다음과 같이 약속했습니다. 그가 우리의 것들을 그들에게 가져다주듯, 그에 준해 어떤 것이 됐든 그가 대조할 수 있는 한에서 중국의 과학과 학문들을 유럽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일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성장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도록 그의 뱃길이 안전하고 순항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이가 다른 나라의 것들을 깎아내리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불란서의 것들을 높이는 것이 작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종종 그런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있기에 하는 말인데, 특히 다른 사람의 작업을 바꾸거나 훼손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 나의 원칙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해당 주제와 관련해 중국의 것들이 제대로 출판됐고, 그것을 우리가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 모든 것들이 설득할 것입니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이 책이 거의 비교할 수 없는 군주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책은 이미 널리 퍼졌습니다. 언젠가는 죽는 것이 운명인 인간들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을 줄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희제는 필요한 자질을 빠짐없이 갖췄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자질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운명이 왕에게 부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강희제를 깊게 살펴본다면, 유럽의 왕들은 그의 이런 모습을 살펴볼 것이고, 자신들은 만주의 왕이 가진 능력과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록 못마땅하지만, 이 사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만큼 관대함을 보이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의 작품이 인간사에 아주 귀하고 아주 유익한 경쟁의 기회를 행여 제공하게 된다면, 이 자체만으로도 나의 노력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이 될 것입니다.
(부베의 <강희제 전기>서문)
이 글은 부베가 루이 14세에게 헌정한 <강희제 전기>(1697, 파리)를 라이프니츠가 라틴어로 옮겨서 유럽 전역에 퍼트린 번역본의 서문이다. 강희제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서문은 특히 철학자가 아닌 정치사상가로서 라이프니츠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기에 눈길을 끈다. 참고로, 라이프니츠는 17~18세기에 유럽의 왕실을 휩쓸었던 계몽군주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실천자였다. 그가 프로이센의 왕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왕들을 위해서 활동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국가발전을 위한 토대로서 학문을 진흥하기 위해서라도 도서관을 만들고 학술원(Academia)을 조직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설득은 성공적이었다. 러시아에서부터 포르투갈에 이르는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도서관이 건립됐고, 학술원이 조직됐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라이프니츠가 라틴어로 <강희제 전기>를 번역한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름이 아니라 유럽의 왕들에게 강희제를 군주의 모범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소위 18세기 서양에서 유행한 계몽군주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됐다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점은, 이 프로젝트에서 볼 수 있는 유사한 현상이 조선 정조의 통치방식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규장각의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18세기 전 세계에 걸쳐 유행했던 소위 계몽군주 프로젝트는 유럽만의 국지적인 현상이 결코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부베는 <강희제 전기>를 도대체 왜 썼을까? 물론 라이프니츠의 요청도 한 몫 거들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일까? 부베의 <강희제 전기>는 당시 유럽대륙을 휩쓸었던 마키아벨리(N. Machiavelli, 1469-1527)의 <군주론(Il Principe)>에 맞서기 위해 저술된 대응물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글·안재원
서울대 서양고전학 협동과에서 석사(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나타난 호메로스의 수용과 변용 연구)학위를 받은 뒤 독일 괴팅엔 대학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의 수사학자인 ‘알렉산더 누메니우의 <단어-의미 문채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키케로의 <수사학>(2006), <Hagiographica Coreana 2> (2012), <인문의 재발견>(2014),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공저, 2016) 등의 저술과 <교황 요한 22세가 보낸 편지에 나오는 Regi Corum은 고려의 충숙왕인가?>(2016), <서양고전문헌학과 동양고전문헌학의 만남> (2017)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