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다

짐 자무쉬의 <패터슨>

2018-01-31     정재형 | 동국대 교수

시인에 대해 생각한다. 태초에 시인이 있었다. 시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영화 <패터슨>을 통해 사람들은 시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대체 시인이란 무엇인가? <패터슨>에는 시인 아닌 시인이 등장한다. 그를 통해 시인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되고 정말 시인이란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를 메시지로 남기게 된다. 시인이란 그저 시를 쓰는 사람만은 아니다. 그는 특별하기도 하면서 특별하지 않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시인을 자주 등장시킨 대표적인 감독은, 그 자신이 시인이기도 한 장 콕토다. 그의 실험영화 <시인의 피>(1932)와 시인을 소재로 한 <오르페>(1950), <오르페의 유언>(1960)이 ‘시인 3부작’이다. 콕토에 의하면, 시인은 희랍신화의 오르페우스처럼 죽음의 세계를 다녀온 자다. 그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여행을 한다. 그가 이승에서 듣는 라디오는 저승의 소리를 전해 준다. 특수한 라디오인 셈인데, 여기서 라디오는 시인의 행위를 은유화한 것이다. 류가미의 소설 <라디오>는 바로 그 중간자적 입장을 대변한다. 종교적으로 시인은 매개자이고 매개자는 무당이다. 무당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다. 그는 자신의 몸에 영혼을 받아서 산 자에게 들려주는 일을 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신령스럽다. 

현대에 와서 시인과 무당은 예술가의 상징이고, 모든 예술가들은 미디어 전달자다. 백남준은 자신을 작은 무당, 그가 존경했던 요셉 보이스를 큰 무당으로 부르곤 했다. 현실과 초현실을 넘나들며 이 세상 너머의 소식을 듣고 전해 주고 전달하는 시인과 무당은, 영지와 예지가 발달한 사람을 말한다. 시대에 따라 시인은 예언가였고 정치가였다. 고대와 중세까지 음유시인은 예언자였고 정치가였다. 구약에 나오는 예레미야, 이사야 등은 시인이며 예언가였고 선지자였다. 굴원(屈原)의 <초사(楚辭)> 역시 불의에 항거하는 서정적 정치시로 볼 수 있다. 김지하와 신동엽의 담시(譚詩)도 마찬가지다. 이문열의 소설 <가객(歌客)>을 보면 독재자가 가객의 혀를 자른 우화가 나온다. 가객의 혀가 만들어낸 정치적 올바름은 국민에게 전해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저항정치가 된다. 따라서 독재자들은 가객을 두려워했고, 그의 혀를 잘라 복음이 민중에게 전달되지 못하도록 했다. 이창동의 <시>는 시인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시를 쓰는 자세를 말한다. 여기서 시는 진실을 호명하는 도구로, 맑고 정직해야 한다. 물론 계몽적 시선을 담고 있다. 반면 자무쉬의 <패터슨>은 계몽의 기획이 없다. 그는 일상으로 복귀한 순수 그 자체의 시선으로 시와 시인을 바라본다. 
본격적으로 영화에 들어가 본다. 영화 속의 일상은 이렇다.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를 몰다가 집에 가고 개 마빈과 산책을 하고, 바에 들러 맥주를 마신 후 잠들고 아침 6시 조금 넘어 정확히 일어난다. 아내 로라에 의하면 그는 ‘시계’다. 그 반복되는 일상의 어슬렁거림 중에 시 쓰는 일이 들어가 있다. 그의 일상은 드라마가 아니다. 그저 지나가는 시간일 뿐이다. 드라마를 포기한 영화. <패터슨>은 인물 간의 갈등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일상을 어슬렁거린다. 그가 만들어내는 사건은 내면에 숨겨져 있다. 그는 표면의 사건보다 내면을 표현하고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을 응시하고자 한다. 마치 오르페처럼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왕래한다. 삶은 죽음만큼이나 지루하고 길다. 영화는 인생이 끊임없는 일주일의 연속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사건이라면 개가 노트를 산산조각으로 만든 것과 가짜권총사건일 뿐이다. 

시집을 출판해야만 시인인가?

패터슨은 뉴저지주의 도시이름이지만 시인 윌리엄스의 시집 이름이고 시인인 듯 아닌 듯한 주인공의 이름이다. 이렇듯 말장난의 대상이 된 듯한 이 이름은 주인공의 직업에 관해 사유케 한다. 그의 직업은 버스 기사다. 그는 시를 쓰지만 정식으로 시집을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인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자신도 스스로 버스 기사로 소개할 뿐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시집을 출판해야만 시인이고, 그렇지 않으면 시인이 아닌 것인가.

이런 인식 때문인지 아내는 그에게 시집을 출판하자고 했고, 최소한 복사라도 해 놓자고 했다. 영화는 세속적인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시 쓰는 사람이 시인일 것인가를 질문한다. 그의 존재감은 개가 그의 시집을 찢어버리는 순간 사라진다. 그는 출판된 시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시작(詩作)에 대한 행위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는 그동안 시인이 아니었고 시작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마저도 존재감이 없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실존적 딜레마에 빠진다. 잘살고 있는 사람에게 어느 날 누군가 다가와서는, “너는 살고 있는 게 아니다”라고 했을 때 갑자기 그의 존재감이 상실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의 시집소멸 행위로 그는 졸지에 시를 쓰지 않은 사람이 됐다. 

 
존재증명의 상황에 놓이게 됐다. 그가 시를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내와 자신밖에 없다. 하지만 다시 질문한다. 그걸 증명해야만 시를 쓰는 것이고 아니면 시를 쓰는 것이 아닌가? 에밀리 디킨슨 역시 일생 시를 2,000편 썼으나 시집은 내지 않았고 익명으로 몇 편 발표했을 뿐이다. 사후에 그녀의 시가 시집으로 묶여 나와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어쩌면 진정한 시인은 시집을 출판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 아니라 그저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영화는 주장하는 것이다. <오르페>에 오르페가 저승의 판관 앞에 서서 질문을 받는 장면이 있다. 직업이 무엇이냐는 판관의 질문에 오르페는 시인이라 대답한다. 그러자 판관이 명부책에 당신의 직업은 작가라고 돼 있다고 되묻는다. 그러자 오르페는 시인이란 작가가 되지 않고 시를 쓰는 사람으로 정의한다. 작가는 세속에서 말하는, 직업적으로 글 쓰는 사람을 말하고 시인이란 시를 일상 속에서 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패터슨의 중요한 행위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시민을 사랑한다. 자연을 사랑하고 맥주를 사랑하고 개마저도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드라마 없는 일상의 풍경은 불교적 선의 세계를 닮아있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아침 밥 먹었느냐? 제자가 답했다. 네. 스승이 말했다. 그럼 그릇을 씻어라. 제자는 문득 깨달았다.”(1)  

불교 위파사나의 법은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이다. 시계처럼 정확하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다시 하루를 마감하며 그렇게 일주일을 매일 똑같이, 하지만 약간의 변화를 준 미니멀리즘의 세계 속에서 패터슨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구조이고, 그의 일상이 곧 시이며 그는 시를 쓴다기보다 ‘시를 호흡한다’고 표현한다. 패터슨이 존경하는 고향의 시인 윌리엄스와 비교하면 더 재미있다. 

“패터슨시에서 일생을 보낸 윌리엄스는 일상에서 시를 봤다. 하지만 패터슨은 시의 개념을 한 발 더 내딛는다. 우린 그걸 즉각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의 일상 그 자체가 시여서 우린 패터슨의 나날의 구조를 읽고 매일 기만적으로 질식시킬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다. 후일 노트에 적는 시에서 패터슨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지켜보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2)

윌리엄스에게 일상은 시의 소재이지만 패터슨에게 일상은 시의 일부이다. 윌리엄스의 시는 일상과 거리감이 있다. 하지만 패터슨에게 시란 부수적이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 자체다. 현대미술가 요셉 보이스가 베를린 시에 나무를 심었던 행위를 자신의 미술작품이라고 말했던 것과 같은 차원이다. 우리가 본 패터슨의 일주일 그 자체가 그가 쓴 시였던 것이다. 윌리엄스는 시인이었고 패터슨은 시 자체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노트에 적었던 시가 사라졌다 할지라도 진정 그의 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자신이 지상에서 완전히 소멸되기 전까지는. 노트가 없어진 후 잠시 실의에 빠져있던 그는 한 일본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덩달아 우리도 이 영화의 주제를 명확히 알게 됐다. 모든 행위가 시였던 그의 삶이 지향하는 시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시를 쓰는 일이란 소박하고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길이 아니고 무엇인가.

고로, 나는 ‘시’다. 


글·정재형 
동국대에서 영화이론을 강의하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2015)과 한국영화학회 회장(2009~2010)을 지냈다. 

(1) 중국 조주(趙州)스님의 선문답 일화.
(2) David Wiegand, “Thrilling cinematic poetry of Jarmusch’s ‘Paterson’”, San Francisco Chronicle, Jan. 5,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