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을 겨냥한 모스크바와 테헤란의 ‘협력관계’

2018-07-31     니콜라이 코자노프 | 상트페테르부르크대 유럽대학 교

미국의 이란 핵 합의 파기 이후 본격적인 대(對)이란 경제제재가 임박한 가운데, 양국 지도자들이 설전을 벌이는 등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월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탈퇴를 선언하고, 2015년 7월 핵 합의 이후 해제됐던 대이란 경제제재 복원을 명령하면서 본격화됐다. 미국은 이란 석유부문 제재를, 6개월의 유예기간이 끝나는 시점인 11월 초에 재개할 예정이다. 이와 관련해, 이란은 격동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또다시 협력관계를 맺으려 할 것이다.

 
오랜 세월, 러시아와 이란의 관계는 결코 잔잔한 강물처럼 유유하게 흐른 적이 없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대영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이란을 양분해 자국의 정치 및 경제 세력권으로 삼았다. 1917년 제정러시아가 무너지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형식적으로는 차르의 제국주의 유산이 청산되는 듯했다. 페르시아(이란)는(1) 더 이상 러시아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비록 레자 샤 팔레비가 길란 주에서 사회주의 혁명정권을 무너뜨리기는 했지만, 소련은 이란과 1921년 2월 26일 향후 양국 관계의 초석이 될 우호협력협정을 체결한다. 소비에트 당국은 언제나 이 협정을 이란이 강대국과 맺은 최초의 ‘공정’하고 ‘정직’한 협정이라고 자처했다. 이 협정에 따라 그동안 이란은 차르 정권과 맺었던 모든 계약과 협정을 무효화했다. 또한 소비에트 당국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란 내에 러시아가 보유 중인 모든 소유지와 자산을 페르시아 정권에 넘겼다. 그럼에도 이 협정(제5조와 제6조)은 소비에트 연방에 위협이 되는 강대국이 이란 영토를 이용하려 하는 경우 이란 영토를 침략해 자국을 수호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했다. 
 
1941년 8월 25일,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상대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레자 샤 팔레비가 독일시민을 추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란을 침공하는 공식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두 강대국은 이란이 독일의 편에 서서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상황을 우려했고 자국의 국익을 보호하고 싶었기에 이란을 침공한 것이었다. 가령 영국계 이란 석유회사인 앵글로-이란석유회사(AIOC)가 보유 중인 유전과 미국의 군수물자를 소련으로 반입하는 보급로로 통하는 ‘페르시아 회랑’을 보호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9월 16일 레자 샤 팔레비가 아들 모하메드 레자에게 왕위를 물려줌에 따라, 이란은 비로소 연합국의 편에 서게 됐고,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 대열에 낄 수 있었다.
 
1945년 이후 이란은 소련이 서방세계보다 훨씬 더 큰 위협이라고 인식했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전쟁이 종식된 뒤에도 이란 북부에 계속 주둔하며 이란령 쿠르디스탄에 마하바드 공화국과 임시 정부인 아제르바이잔 인민정부가 설립되도록 물심양면 힘을 보탰다. 냉전 시대 최초의 일화로 통하는 이 사태는 결국 소련군이 석유협정을 대가로 이란에서 철수하면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이란의회는 돌연 협정을 폐기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란을 소련의 확실한 세력권으로 간주했다. 그는 이란에 공산주의 전파만 원한 게 아니라, 이란 북부 유전지대에까지 눈독을 들였다. 소련은 이란의 샤(왕)를 자국의 이익에 끌어들이려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대표적인 예가 이란 공산당 투데당(대중정당)을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었다. 친소정당인 투데당은 1951년에 이르러 민족주의자인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가 이끄는 여당과 손을 잡았다. 총리는 석유산업 국유화 등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모사데크 정권은 영국과 미국의 정보국이 모사한 쿠데타로 인해 결국 1953년 실각한다.
 
이후 몇 년간 이란의 샤(왕)는 공산당 탄압정책을 펼쳤다. 공산당원을 약식처형하거나 군대와 정보국에서 축출했다. 소련의 지원은 투데당에게 수혜인 동시에 저주가 됐다. 소련에 매우 의존적인 투데당은 1940~50년대 초 이란의 석유 이권을 보호받기를 원한 소련에 널리 이용당하면서 이란 국민들의 눈 밖에 났다. 소련이 투데당을 석유 이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 일은 오히려 이란에 석유를 국유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투데당의 위상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란은 역내 친서방 국가들이 1955년 체결한 바그다드 조약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것이 소련과의 관계증진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1960~1970년대 소련은 60건이 넘는 이란 내 대규모 사업에 참여했고, 이란의 최대 천연가스 수입국으로도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978~1979년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자 이란과 소련의 관계는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이란 내 미군기지와 도청센터 폐쇄는 소련의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란이 이념적인 이유로 소련과의 관계에 제한을 두려고 했을 때도 소련은 대화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2년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블라디미르 쿠지치킨(Vladimir Kouzitchkine)의 변절은 투데당을 큰 충격에 빠뜨렸다. 전향자가 누설한 소련 첩보원 명단 가운데는 투데당 당원도 끼어 있었다. 이 사건은 이란정부가 쿠데타를 획책했다는 거짓 혐의로 공산당원을 더욱 탄압하는 계기가 됐다. 
 
소련은 사담 후세인 정권에 무기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이란-이라크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조심했다. 비록 이란이 자국의 공산당을 탄압했지만, 소련은 전쟁으로 어려움에 처하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된 이란과 관계를 증진하는 데 호의적이었다. 이란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에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소련이 자국 영토를 경유하도록 허용함에 따라 이란은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길이 열렸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와 그에 따른 경제 위기로, 1980년대 말 이란과 체결한 대다수 협정은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991~2012년, 러시아와 이란은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관계를 계속 이어갔다. 정치적 대화가 원활하게 이뤄지다가도, 저마다 상대국이 협정과 약속을 잘 이행하지 않는다고 탓하며 장기간 관계가 냉랭해지는 일이 반복됐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카스피해 영유권 분쟁이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이란 내 러시아 이권은 부차적인 사안에 속한다. 오히려 러시아에는 그보다 이란을 대미관계의 지렛대로 활용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가령 대미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던 2006~2009년, 러시아와 이란은 에너지 분야 등에서 협력을 재개했다.
 
그러나 양국의 협력관계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양국의 협력관계가 종식된 시기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대러리셋(재정립) 정책을 천명한 시기와 맥을 같이 했다. 미국이 대러관계를 ‘재정립’하겠다고 나선 것은 러시아가 UN 안보리 결의 제1929호 의결에 찬성표를 던진 것과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이 결의안 통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중단하도록 압박하기 위한 2010년 대이란 추가제제의 가능성이 열렸다. 또한 러시아는 이란 이슬람공화국에 S-300 지대공 미사일을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한편, 당시 러시아연방 대통령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도 개별적 차원에서 이란을 상대로 실질적인 제재조치를 단행했다.
 
2012년까지 러시아는 무엇보다 역내에 새로운 분쟁지역이 출현하고 접경지대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줄곧 이란 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역내 균형이 깨져 자국에 불이익이 돌아오는 상황만큼은 우려했기에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러시아는 만일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지금보다 캅카스나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해 훨씬 더 독립적이고 공격적인 정책을 취할 것이고, 다른 중동 정권들도 이란을 본보기 삼아 줄줄이 핵개발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란 핵문제를 다루는 러시아의 태도는 친이란적이라고도, 친서방적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는 미국·유럽·이스라엘과, 그리고 이란 사이에서 언제나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2012년 사태가 급변했다. 러시아가 돌연 이란과 좀 더 장기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겠다며 노선을 바꾼 것이다. 러시아는 다시금 중동지역의 중요한 국가로 자리매김하며 소련 붕괴 이후 잃어버린 과거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러시아의 지도층은 1991년 이후 지나치게 서방세계에만 치우친 자국의 외교와 경제 관계를 조금 더 다각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2012년 이후 러시아 정부는 핵 문제를 놓고 이란과 서방 사이에 생산적인 대화가 열릴 수 있도록 큰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상 2012년 2월과 6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거듭된 제안에 따라 시작된 협상이 단초가 돼 2015년 7월 이란과 UN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중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 미국) 및 독일(P5+1) 사이에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이 체결되는 한편, 일부 제제가 해제되는 성과를 올렸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는 이 협정이 포스트소비에트 공간 주변국의 긴장을 해소했다고 판단한다. 이란이 점진적으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됨에 따라, 러시아는 문제 국가와 동맹을 맺고 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롭게 지역 현안(시리아, 카스피해, 캅카스, 중앙아시아)을 놓고 이란과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할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는 핵 협정 체결로 그동안 자국의 야심 찬 대이란 사업에 걸림돌이 되던 경제 제재가 해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핵 협정 체결로 원자력 발전소 6기 건설과 석유개발기술에 관한 협정 체결 및 2016년을 기점으로 수출이 중단된 S300 미사일 등을 포함한 군수계약이 다시 실행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실상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이 체결되기 전 8년 동안 러시아의 기업들은 유럽의 경쟁사들이 모두 철수한 상황에서도 이란 내에서 거의 실질적인 이득을 보지 못했다.
 
2015년 말 러시아의 시리아 내전 개입은 이제 러시아와 이란이 하나가 되는 요인이 됐다. 러시아의 군사개입은 이란 당국이 오래도록 기다리던 호기다. 양국의 관계를 발전시킬 정치적, 군사적 토대 말이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시리아와 그 외 다른 지역에서 러시아와 이란이 완전한 동맹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기상조다. 대개 양국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할 때조차 각자 고유한 개별적 전략을 추구하곤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중동 외교정책은 여전히 역내 국가 간 균형 원칙에 입각한다. 각 역내 국가들이 모두 러시아의 잠재적 협력 국가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현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물론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과도 잘 지내도록 노력하며 균형 잡힌 외교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왔다. 사실상 러시아의 입장에서 이란과 전적인 동맹관계는 이와 같은 자국의 균형 정책에 위해가 된다는 점에서 언감생심 꿈꾸기 힘든 그림의 떡과 같다. 때때로 일부 사안에 대해 러시아와 이란은 비슷한 입장을 표방하지만, 그럼에도 양국의 입장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가령 카스피해의 법적지위를 둘러싸고 양국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바샤르 알 아사드가 아닌 다른 인물이 시리아를 집권하는 시나리오에 대해 관대한 입장인 반면, 이란은 알 아사드가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를 고집한다.
 
사실상 러시아와 이란이 서로 가까워진 것은 현 국제정세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양국의 관심사나 이익이 서로 엇갈린다는 점에 비춰볼 때, 러시아가 전적으로 이란과 동맹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현 수준의 협력이 양국관계의 최대치가 아닐까 싶다.  
 
글·니콜라이 코자노프 Nikolaï Kozhanov
상트페테르부르크 유럽대학 중동 정치경제학 교수. 런던에 소재한 영국왕립국제문제연구소(RIIA), 일명 채텀하우스에서 러시아-유라시아 프로그램에 객원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페르시아: 서방국가들이 사용하던 명칭이다.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란’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