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여성혐오의 연결고리
오늘날에는 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요소들이 사람들간에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 대표적으로 지략이나 재력이 그것이다. 학술적 깊이, 목소리, 진중한 태도, 연애 상대로서의 매력, 체격, 연령이나 사회적 권위 등 무수한 기준이 있다.
승자남성과 패자남성
승패의 결정은 모든 사람들 간에 일어난다. 그중에서도 주목했던 것은 남성 간의 승패와 우열이다. 모든 남성은 승자남성과 패자남성이라는 추상적 남성성 혹은 남성상(像) 사이에 있고, 매 순간 상대적 승자와 상대적 패자로 분화하며, 이것이 성차별의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다만 패자남성에게 정말로 ‘패자’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을지는 여전히 고민스럽다. ‘남성’을 말할 때, 남성은 승자든 패자든 기본적으로 억압하는 계급으로서 남성이 아닌 다른 모든 사람(넓은 범위에서 성 소수자, 장애인, 개발도상국 국민 등. 흔히 ‘여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 패자남성은 남성 세계에서나 패자일 뿐이며, 남성이 아닌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다시 승자가 된다.
그럼에도 승자남성과 패자남성을 구분하는 일은 중요하다. 굳이 남성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 생각한 것은, 기본적으로 내가 남성이기에 남성에 대해 가장 먼저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페미니즘을 생각할 때 남성 간 승패 분화가 남성우월주의의 고착과 여성에 대한 차별은 물론, 성을 매개로 한 모든 차별의 근간을 이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 혐오가 낳은 여성 혐오, 식민지 남성성
분단과 여성혐오가 가장 강력하게 연관되는 이유는 아직 끝나지 않은 한반도의 전쟁이다. 모든 남성은 원하든 원치 않든 일정 기간 전쟁의 도구로 국가의 호출을 받는다. 앞서 전쟁으로 말미암아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이것이 여성혐오의 기원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다면 한국은 여성혐오의 기원을 매 순간 재생산해내는 공간이다.
지인이 군 복무를 하던 시절, 계급이 낮은 병사가 실수를 하면 “너 오늘부터 ‘금딸’이야”라거나 “휴가 나가서 섹스하지 마. 넌 그럴 자격도 없어”라고 질책하는 선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이 말이 진짜 심각한 잘못을 할 때는 나올 수 없는 가벼운 농담(?)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성욕금지가 처벌이 될 수 있는 것은, 섹스가 승자의 ‘전리품’이며 동시에 패자에게는 불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인의 사기를 올려주겠다고 비키니 차림의 어린 여성을 불러 포즈를 잡게 하고, 성인잡지의 유통을 일종의 산소공급처럼 받아들이고, 휴가 때 누구와 섹스를 하고 왔는지를 가장 먼저 물으며 낄낄거리는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섹스 대상으로서의)을 승자의 전리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차별도 강화된다. 남성들이 제아무리 자기들끼리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무용담을 주고받으며 의미를 부여해봐야, 막상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잘사는 모습은 군 복무를 통째로 무의미하게 만든다. 이 지점에서 군 면제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여성 등에 대한 경멸이 탄생한다. 군 면제자에 대해서는 공직자를 맡을 자격이 안 된다는 비판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는 대체복무든 지뢰제거든 무엇이라도 하라는 강요가, 여성에 대해서는 군대에 가라거나 군가산점제를 인정하라는 주장이 대두된다.
이 집단적 승자성 조장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보다 강력하다. 제아무리 강한 권력을 지녔더라도, 본인이나 자녀의 미심쩍은 군 면제에 대해서는 복지부동할 수밖에 없다. 징병제는 서구에서 시민권의 발달과 동행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한국에서 징병제는 시민권을 발달을 넘어 승자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기제다.
식민지 남성성이란 것이 있다. 구한말 이후 외세, 특히 일본에 지배당한 식민지 조선의 남성들이 한반도에서 만든 기형적인 남성성을 의미한다. 식민지의 남성은 국가 외적으로는 일본이라는 강력한 남성에 의해 패자, 즉 ‘여성’인 동시에 국가 내적으로는 여성에 비해 강력한 위치에 있는 ‘남성’이다. 승자성과 패자성이 공존하는 긴장상태에 빠져있다. ‘국가적인 여성’이라는 치욕을 해소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남성성의 핵심은 승자 지향성이 낳은 자기혐오, 자기혐오가 낳은 여성혐오다.
정희진은 식민지 남성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 남성은 보편적 주체로서 자신을 국가나 민족과 동일시한다.
②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국내 여성과의 관계에서 구성하기보다는 외세와의 관계에서 파악한다. 이때 자신은 강대국에 비해서 약자이므로 ‘여성’으로 정체화한다.
③ 하지만 자신은 ‘본질적’으로는 남성이므로 강자에 저항하거나 강대국을 ‘이용’해야 하는 중대한 업무를 띠는데, 이때 자기 옆의 여성들이 자신과 뜻을 함께하지 않고 평등을 외치는 것은 반민족, 반국가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④ 여성해방은 계급해방이나 민족해방 이후의 과제다.
⑤ 이때 여성의 역할은 강자와의 투쟁에 바쁜 자신을 대리하여 생계를 책임지고,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남성의 성적욕구를 해결해 주는 것이다. 즉 여성은 본연의 성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대의다.
⑥ 동시에 자신이 지쳤을 때는 언제나 위로와 지지와 격려를 해주는 정치적 ‘동지’여야 한다.
⑦ 자원이 부족할 때는 자국 여성에게 적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 먹을 것을 얻어 오라고 강요한다. 그러면서도 남성은 이런 상황에 대해 우울해하거나(대표적으로 이상, <날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혐오한다. 환향녀(화냥년)라는 낙인을 찍어 공동체에서 매장한다(안정효, <은마는 오지 않는다>) 혹은 중산층 여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인해, 피해여성을 진정한 민중으로 숭배하거나(김기덕, <해안선>) 분노로 인해 스스로 미친다(남정현, <분지糞池>).
⑧ 손상된 자신과 아버지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어머니와 누이’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하거나 “이 영화를 아버지에게 바친다”(이광모 감독, <아름다운 시절>).
⑨ 좌파 민족주의 진영은 가해국(일본)과의 투쟁에서 “우리에겐 ‘위안부 카드’가 있다.”며 외세 협박용으로 삼거나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죄 대신 경제협력이나 군사원조를 받아낸다. 강대국에게 군사력이 협상할 힘이라면, 한국 남성에게 그 자원은 여성이다.
⑩ 자신의 이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기 성찰이나 강자에 대한 저항이지만, 강자는 멀리 있거나 강대국 자체도 균질적 존재(여성도 흑인도 있다)가 아니므로 ‘도리가 없다’. 결국 술을 마신다. 무기력, 자기 연민, 고뇌하는 자기도취 상태에 있다.
식민시대는 끝났다, 분단국의 남성성은?
식민시대는 끝났다. 한국 남성 위에 명시적인 승자로 군림하는 타국은 없다. 경제적 강자와 약자가 있을지 모르나 승패가 나뉘는 것은 아니다. 현대 한국남성은 일제에 복종했던 식민지 조선의 남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식민지 남성성의 주요 특성인 승자성과 패자성이 공존하는 긴장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인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 남성이 겪었던 승자성과 패자성의 마찰은, 승자성과 패자성이 각각 국외와 국내에 있으면서 국외가 국내가 경합하는 차원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오늘날의 남성은 승자성과 패자성 간의 갈등을 국외와 국내에 각각에서 모두 경험한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단국 남성은 아직 승자도 패자도 아니다. 분단은 남성을 국제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승자와 패자 사이에 있는 어중간한 인간으로 남겨놓았다. 국제적으로는 북한에게 아직 완전히 승리하지 않았다. 승자도 패자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과 패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두려움은 더욱 극심하다. 국내적으로도 마찬가지로, 분단의 폐습에 의해 승자남성과 패자남성의 갈등과 혐오가 더욱 심화되었다.
식민지 남성성의 구조를 차용해 분단국 남성성을 정의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① 보수파, 개혁파를 막론하고 남성은 보편적 주체로서 군 복무를 통해 자신을 국가나 민족과 동일시하고 국내외의 모든 전투에서의 승자가 되고자 하며 그 핵심적인 기준은 군 복무 여부다(승자지향성).
②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외세(북한)와의 관계에서 파악할 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승자도 패자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성별을 명확히 정체화하지 못한 잠재적 ‘남성’인 동시에 잠재적 ‘여성’이다(“북한의 군사력이 막강해 승리를 점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필요하다”).
③ 하지만 자신은 ‘본질적’으로는 남성이므로 남북경쟁에서 승리하거나 전쟁을 평화적으로 종결해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띠는데, 이때 자신과 뜻을 함께하지 않는 것은 반민족, 반국가적 행위라고 생각한다(빨갱이, 종북 / 수구꼴통, 적폐).
④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국내 ‘여성’과의 관계에서 파악할 때 승자남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모든 자를 ‘여성’ 즉 패자의 범주에 몰아넣는데 자신 또한 그 다양한 굴레 속에서 잠재적 ‘남성’이자 잠재적 ‘여성’이다(승자남성/패자남성).
⑤ 하지만 자신은 ‘본질적’으로는 남성이므로 남성임을 증명하는 수많은 기준에 한꺼번에 달성하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려고 애쓰는데, 이때 이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 기준을 무시하며 평등을 외치는 것은 반사회적 행위라고 생각한다(“여자도 군대 가라”, “나는 비양심적이라 군대 갔냐”).
⑥ 여성 해방이나 소수자·약자 권익 보호는 승전이나 종전 이후의 과제다.(해일과 조개)
⑦ 이때 여성의 역할은 승리를 위한 투쟁에 바쁜 자신을 응원하고 보좌하며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즉 여성은 성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이 지쳤을 때는 언제나 남성의 편에서 위로와 지지와 격려를 해주는 정치적·군사적 ‘동지’여야 한다.(‘12.19 투표하세요’, ‘나와라 정봉주’)
⑧ 자원이 부족할 때는 자국 여성에게 동맹국의 ‘성적 노리개’가 되어 먹을 것을 얻어 오라고 강요한다(기지촌 여성, 기생관광). 양갈보나 기생 호스티스라는 낙인을 찍어 공동체에서 매장한다 혹은 피해 여성을 진정한 애국자(민간 외교관)로 숭배한다.
⑨ 손상된 자신과 아버지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어머니와 누이’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한다(군가산점제)
글·추재훈
이 글은 시민단체 ‘바꿈(세상을바꾸는꿈)’이 지난달 25일, 서울시 NPO지원센터에서 ‘국가와 사회적 이분법에 대항하는 페미니즘 공론장’을 주제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추재훈 동국대 학부생(북한학과)이 발표한 ‘분단국 남성성: 자기혐오와 여성혐오’ 중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