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1892~1971)가 남긴 ‘평온을 비는 기도(The Serenity Prayer)’는 다음과 같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번역하면 “주여, 나에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가 되겠다. 널리 인용되고 실제 기도에 사용되며, 때로 변용돼 전해지는 이 기도문은 현대 미국의 대표적 작가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의 후반부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기도문이 평온(Serenity), 용기(Courage), 지혜(Wisdom)라는 세 개의 핵심 단어로 이뤄졌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기도문의 제목에 ‘평온’이 들어있고, 니버에게서 대체로 현실주의를 떠올릴 수 있기에, 아마도 사람들은 세 가지 중에서 평온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할 법하다. 합리적인 추론이긴 하지만, 논리의 심층구조상으로는 세 가지 중에서 ‘지혜’가 가장 중요하다. ‘지혜’ 없이는 나머지 두 가지를 작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평온’과 ‘용기’ 사이의 차이를 파악해내어야 할 지혜라는 것이 행태나 실천 영역을 넘어서 형이상학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이 곤란한 지점이다.
따라서 문학은, 특히 형이상학과 직접 대면하는 대신 형이상학을 우회해 그것을 빠른 속도로 스치는 창밖 풍경처럼 보여주기 마련인 소설은, 대체로 ‘평온’과 ‘용기’의 양대진영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양대진영에 속한다는 말은, 양자택일이라기보다는 두 가지 요소의 배합비율의 차이 및 비교 우위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남성과 여성에게 각각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만이 배타적으로 분비되는 게 아니라, 두 가지 호르몬이 모두 섞여서 분비되지만 상대적으로 다른 호르몬보다 더 많이 분비되는 현상과 같다. 드물지만 ‘평온’과 ‘용기’를 배합한 텍스트의 지평 위로 형이상학적 빨대를 꽂아놓은 『제5도살장』같은 특별한 작품을 발견할 수도 있다.
평온과 용기
‘평온문학’의 핵심은 ‘받아들임(Accept)’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같은 작품에서 평온과 받아들임의 철학이 나타난다. 『이것이 인간인가』 같은 증언문학, 연구 혹은 과학의 문학을 표방한 졸라류의 자연주의 문학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큐 및 르포 형식을 취한 문학에서도 비슷한 철학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지만, 재삼 강조하거니와 ‘평온문학’과 ‘용기문학’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배합비의 우위와 구성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전형성과 계급성, 이념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은 ‘용기문학’으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베르코르의 『바다의 침묵』 같은 작품이 여기에 속한다.
이 자리에서는 ‘평온문학’의 ‘받아들임’을 중심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주제를 제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이런 형이상학적 질문은 작품에서 명시적으로 전개되지 않는 데다 현실적으로 허망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굳이 물어야 할까를 되묻게 되지만, 질문 중에는 끝까지 묻지 않아도 좋은 것과 종국에는 회피할 수 없는 것이란 두 가지 질문이 있으니, 이 질문은 후자에 속하기에 부질없음을 감당하며 차제에 묻기로 하자.
‘받아들임’을 나는 ‘버텨내기’로 바꿔 쓰고 싶다. ‘평온문학’에는 ‘받아들임’과 ‘버텨내기’가 공존하지만 실존의 본질을 조금 더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버텨내기’가 ‘평온문학’의 핵심이라고 판단한다. 평온은, 이후 살펴볼 자유와 비슷한 속성을 갖는데, 블랙홀처럼 무감각하게 무반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충돌을 수습하며 충돌 전의 원래 형태에 근접한 방향으로 상황을 지켜내려는 버텨내기의 결과이다.(물론 블랙홀 또한 흡수가 아니라 충돌일 수 있으며, 물리학의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난다고도 할 수 있지만 너무 압도적인 수준으로 진행되기에 인간이 보기엔 다른 별개의 물리학에 지배받는 듯이 보인다.)
‘평온문학’에서 (주체가) 버텨내는 대상은 야만과 폭력, 착취와 억압 같은 ‘비(非)문명’이다. 비문명은 문학에서 통상 구조화한 형태로 묘사되며 견뎌내는 주체는, 만일 주체라는 것이 파악될 수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개체로 설정된다. 도식화한다면, ‘평온문학’에서 (나아가 세상에서?) 구조화한 야만을 버텨내는 틀은 크게 두 가지이다. 먼저 구조 대 구조의 싸움을 상정할 수 있고, 다음으로 구조 대 비구조(혹은 개체)를 떠올릴 수 있다.
‘구조 대 구조’의 싸움에서 개체의 버텨내기는, 야만의 구조를 견뎌냄으로써, 그것보다 더 오래 살아냄으로써, 야만의 구조를 넘어서겠다는 전략적 판단에 입각한다. 새로운 구조를 설계하고 희망하며 버텨내는 개체의 저변에는 ‘이미’ 괄호 쳐진 구조가 존재한다. 즉 현재 작동하는 야만의 구조를 시간의 단면에서 파악한 기껏해야 공시적 구조화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야만의 구조에 저항해, 야만의 구조보다 오래 살아남아 새로운 문명의 구조로 이행케 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의 이면에서, 시간의 종면에서 파악한 통시적 구조화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이 개체는 개체를 넘어서서 종(種)의 관점을 갖게 되며 종(縱)과 횡(橫)의 유대로 문명의 새날을 열고자 고대하고 실천한다. 그 실천의 핵심이 버텨내기이다.
이런 버텨내기는 익숙한 용어로 진보를 뜻한다. 이 진보는 당대의 부자유를 버텨냄으로써 종의 관점에서 이것을 분쇄해 인간자유 혹은 자유의지의 확대를 꾀하거나, 더 많은 사람의 자유와 존엄을 모색한다. ‘종의 관점’이란 말에서 다윈주의 냄새가 난다면 ‘인류의 관점’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역사는 진보하며, 그 진보는 진보할수록 더 많은 인간을 자유에 포괄하리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진보는 휴머니즘이나 역사주의 같은 개념어보다 믿음에 훨씬 더 의지한다.
다음으로 ‘평온문학’에서 나타나는 ‘구조 대 비구조(혹은 개체)’의 싸움을 살펴보자. 이 싸움에서 개체의 버텨내기의 양상은 다양하다. 먼저 억압의 구조에 맞서는 ‘자유의 구조’(이 언명은 문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의 일원이 아닐 때, 인간이 개체로서 왜 견뎌내는가, 혹은 왜 견뎌내어야 하냐는 질문에서, 자살과 같은 ‘견뎌내지 않기’는 논의하지 않기로 하자. 자살이야말로 단연 철학의 문제이지만, 자살은 실존의 선택지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즉 존엄한 실존의 인간에게 자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 알베르 카뮈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으로 넘어가자.
그렇다면 ‘구조 대 비구조(혹은 개체)’의 싸움에서 버텨내기의 유형으로 가장 먼저 ‘자살할 수 없어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냥 버텨내기’라고 할 이 유형은 단순하고 무식해 보이지만 생의 에너지에 가장 충만한 방식으로 생명종의 자발적 파괴를 거부하는 노선을 걷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이 이 노선을 웅변한다.
“A man is not made for defeat.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그러나 헤밍웨이는 1961년에 엽총으로 자살했다. 헤밍웨이에게 버텨내기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반면 자본주의 형성기 파리 하층민의 삶을 해부학적으로 그린 『목로주점』에서 주인공인 파리의 세탁부 제르베즈는 버텨내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어떤 몰락과 어떤 수치도 그를 자살케 할 수 없었다. 시대의 아픔, 총체로서 억압자인 사회, 또는 자기존엄의 모색이나 감당할 수 없는 우울 등, 구조화한 폭력 아래서 인간을 몰락시키고 물리적으로도 죽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러나 제르베즈 같은 유형의 인간은 결코 ‘자신을 죽이는(kill herself)’ 이유로 자신을 포함시킬 수 없다. “○○○ kill myself.”에서 결코 주어 자리에 “I”를 넣을 수 없는 제르베즈 같은 인간은, 헤밍웨이식으로 말해 파괴당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
제르베즈와 달리 헤밍웨이 같은 지식인 마초는 이런 불패의 신화에 동참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파괴당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 삶은, 삶을 그렇게 정식화할 수 있는 헤밍웨이 같은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의식적인 삶이 아니라, 무의식적 삶을 살아가는 인류의 다수에게, 식상한 용어로 민중에게 그런 불패가 주어진다. 그 불패는 승리를 기도(企圖)하지 않은, 순수 불패이기에 역사성을 갖는다.
‘구조 대 구조’의 의식적 버텨내기와 달리, ‘구조 대 비구조’의 무의식적 버텨내기는, 역사적 전망 없는 역사성과, 자각되지 않는 진보를 구현한다. ‘평온문학’이 포착하여야 할 버텨내기는 ‘평온한 불패’이지, ‘비참한 파괴’는 아니다. ‘비참한 파괴’를 배경으로 ‘평온한 불패’의 서사를 장엄하게 써 내려간 ‘평온문학’ 작품을 ‘용기문학’의 음각화(陰刻畵)와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의식적인 삶을 사는 작가가 무의식적 삶을 사는 다수 인류의 버텨내기를 그려내면서, 비참 너머에서 불패를 찾아내 마침내 승리의 조짐까지 짚어낸다면 ‘평온문학’의 최고봉이란 칭찬을 받아도 과하지 않다.
‘구조 대 비구조(혹은 개체)’의 싸움에서 개체의 버텨내기의 두 번째 유형은 ‘그냥 버텨내기’를 견딜 수가 없지만, 그것 말고는 그냥 버텨내기를 넘어설 수 없어서 그냥 버텨내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얼핏 ‘구조 대 구조’의 싸움에서 개체의 버텨내기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구조 대 구조’의 싸움에서는 싸우는 개체가 두 개의 구조 모두를 인식하며 버텨내기를 수행하는 반면, ‘구조 대 비구조(혹은 개체)’의 싸움의 두 번째 유형에서 개체는 하나의 거대한 적대 구조에 맞선, 어느 구조에도 속하지 않은, 한없이 무력한 헐벗은 현존일 따름이다.
(적에게는) 패배하지 않을뿐더러 파괴당하지도 않아서, 물리적으로도 버텨내기에 성공했다는 증거를 잡고자 한다. 비인간화한 구조를 넘어서 인간화한 개체를 복원하려는, 이 몸부림은 언제나 안타깝다. “I kill ○○○.”에서 목적어 자리에 결코 “myself”를 넣지 않지만, 다른 무엇이든 목적어에 포함시킬 수 있다. ‘구조 대 비구조(혹은 개체)’의 싸움에서 개체의 버텨내기의 첫 번째 유형과 달리, 이 문장에서 ‘I’라는 주어는 언제나 확고하다.
그러나 주어의 확고함이 주체의 존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비인간화한 구조를 넘어서 재(再)인간화의 증거를 남기는 길이 수치로 점철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인간화한 구조를 넘어서 살아남은 자. 살아남기 위해 그는 더 비참한 비인간화한 과정을 겪어내야 한다는 숙명이 주어진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잘 드러나듯, 아우슈비츠에선 인간적인 사람이 늘 먼저 희생된다. ‘I’라는 주어를 지탱한 버텨내기는 모종의 책무 혹은 의무감을 수반하지만, 성공했을 때, 즉 모든 비인간화를 감내하며 간신히 인간임을 결과론으로 입증했을 때의 모멸감은 훨씬 더 크다.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가해사실을 입증해야 할뿐더러, 살아남기 위해 버텨낸 비인간화는 인간이기에 죽어간 다른 사람들의 버텨내지 못함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 되는 난감함이 발생한다. 게다가 가해자는 인간이 아닌 구조이기에 인간적인 추궁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추궁은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1987년 레비의 죽음을 두고 사고사냐 자살이냐 논란이 일어난 까닭은,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후 당위로는 그에게 속하지 말았어야 할, 그럼에도 현실에서 그가 참아내야 한 부당한 수치심으로 그가 고통을 겪었음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조화한 야만 앞에서 주어를 지니며 버텨내기란 지난한 일임을 레비는 말해준다. 그는 야만의 거대구조에게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이었지만, 그 구조에서 풀려난 후에 가엽게도 자신을 추궁할 수밖에 없었다.
‘구조 대 비구조(혹은 개체)’의 싸움에서 버텨내기의 세 번째 유형은 ‘은총’이다. 현세를 내세로, 역사를 초월적인 것으로 대체해버리면 버텨내기는 저절로 이뤄진다.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구조 대 비구조(혹은 개체)’의 싸움이라기보다는 ‘구조 대 구조’의 싸움으로 보이기도 한다. ‘구조’ 관점을 취한다 해도 두 구조는 직접 충돌하지 않는다. 앞의 구조가 수평으로 존재하는 반면 뒤의 구조는 수직으로 구축돼 있기 때문이다.
여성 노예였던 블란디나는 로마의 역사가 유세비우스가 전한 기독교 초대교회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서기 177년 리옹에서 있었던 기독교도 박해에서 그는 인간으로선 도저히 견뎌낼 수 없든 고문을 받으면서 끝내 고문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으며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죽음은 자살이 아니다. 나중에 가톨릭교회에 의해 시성(諡聖)된 그의 삶과 죽음이, 니버의 기도에서 말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임에 해당하는지는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블란디나의 이야기는 아직 소재에 불과한 날것이지만, 만일 ‘평온문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해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물론 위대한 작가의 손길을 거친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야기 자체로는 수평적 구조와 수직적 구조가 서로 어긋나 있을뿐더러, 구조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블란디나라는 인물이 버텨낸 평면이 구조가 위치한 평면과는 다른 평면이기에 이른바 유기적 구성을 어렵게 만든다. ‘평온’과 ‘용기’를 배합한 텍스트의 지평 위로 형이상학적 빨대를 꽂아놓은 소설 『제5도살장』의 주인공 빌리 필그램과 역사 속의 실존인물 블란디나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다.
지혜와 ‘알파고9단’
니버는 기도문에서 평온의 영역과 용기의 영역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 즉 지혜를 달라고 신에게 간구한다. 그 지혜는 신이 ‘나’에게 준다. ‘나’가 이미 존재하기에 신이 주는 분별하는 능력이란 선물은 ‘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니버의 관점에서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기에 이미 주어진 ‘나’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었지만, 신의 창조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근대인에게 ‘나’는 궁극의 미궁이었다.
니버의 기도문은 사실 바둑에도 잘 어울린다. 바꿀 수 없는 곳에서 손을 빼서 바꿀 수 있는 곳에서 변화를 만드는 게 바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을 잘 두든 못 두든, 기사는 수읽기와 형세판단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다. 니버의 기도문에서 지혜라고 말한 것이 바둑으로 옮겨가면 수읽기와 형세판단이 된다.
2016년 3월 9~15일,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이세돌과 알파고(AlphaGo) 간의 총 5회 대국이 열렸다. 알파고는 인공지능 기사로, 당시 인류 대표인 이세돌과 대결을 벌여 4승 1패로 이세돌에게 압승했다. 대국이 열리기 전에는 승패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이제 바둑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선선히 받아들인다. 오히려 알파고가 기록한 1패를 두고, ‘알파고를 이긴 유일한 인간’이라며 이세돌을 칭송하는 분위기다. 알파고는 이후 한국과 중국 기원으로부터 9단 단증을 받았다.
나 역시 이세돌이 이른바 ‘신의 한 수’로 불리는 78수를 둔 4국을 지켜보았다. 이 4국에서 흑을 잡은 ‘알파고 9단’은 180수만에 돌을 던져, 이세돌이 불계승을 거둔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사항 중의 하나가 “‘알파고 9단’이 도대체 어떻게 불계패를 선언할까”였다. 인간 기사는 보통 말로 의사를 표시하거나, 바둑판의 모서리에 슬그머니 돌을 올려놓거나, 혹은 상대가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바둑에 패배했음을 전달한다. 알파고 9단’은?
“AlphaGo resigns”
화면에는 불계패를 선언하는 의미로 “AlphaGo resigns”라는 말이 떠 있었다. 나는 “resign”에 붙은 s에 주목했다. 알파고가 스스로를 3인칭으로 인식했다면, 화자가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인간의 어린아이가 자신을 종종 ‘나’가 아니라 3인칭의 고유명사로 부르듯 알파고란 프로그램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한 결과일 수도 있고, 프로그램이 복잡하게 구성돼 말하자면 다중인격이어서 바둑 두는 기능을 맡은 부위와 “resign”과 같은 의사결정 및 표현을 맡은 부위가 다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기계어로 전달받은 결정을 알파고 운영팀이 “AlphaGo resigns”로 번역해 단순하게 모니터에 띄운 것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알파고는 1인칭이 아니었다.
‘알파고 9단’은 바둑을 기준으로 세상 최고의 지혜를 지녔지만 ‘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지혜를 행사하는 주체와 ‘나’의 분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자신을 찾느라 골몰한 근대인의 여정, 혹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근대인의 최종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했다.
내기와 은총 사이에서
르네 데카르트(1596~1650년)는 근대인을 탄생시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근대인의 존재론이었다. 인간을 신의 피조물에서 확고한 주체로 격상시킨 데카르트의 ‘코기토’의 철학은 근대적 사유에서 말하자면 지적 하부구조를 형성했다고 평가해도 과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코기토’는 선험적 비약이며 근거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줄곧 노출됐다. ‘나’는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강건하지 않으며, 또한 ‘나’의 존재라는 게 그렇게 분명하게 또한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 있지 않다는 견해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알파고 9단’의 불계패에서, ‘코기토’에서 존재가 유실되는 풍경을, 그리고 그 무너져 내린 흙더미 속으로 데카르트가 파묻히는 광경을 보았다. 알파고는 데카르트의 돌이킬 수 없는 좌초를 보여주는 결정적 물증이었다. 알파고는 (인간의 방식으로) 사유하고 행동했지만 (인간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데 실패했다. 가정해 만일 정상의 바둑기사가 불의의 사고로 신체를 잃고 두뇌만 남아 컴퓨터의 형태로 살아남게 됐다면, 그는 신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물론 인간에게 몸은 사활적으로 중요하다.) 자신을 ‘나’로 인식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소재를 다룬 영화들에서 그러하듯, 알파고에게는 부재한 ‘나’가 인간에겐 그렇게 뚜렷하다.
실존주의에서는 역설적으로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나’를 말한다. 엄밀히 말해 ‘나’에게 대상화한 자아야말로 진정한 주체이며 주어진 주체는 ‘나’의 대상일 뿐이다. 즉자의 자아에서 대자의 자아로 발전함으로써 자유의 존재가 될 가능성을 확보한다. 이때 대자의 자아란, 무엇인가에 구속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주어진) 주체로서 ‘나’는 판옵티콘의 중심에서 원형으로 만들어진 외곽을 바라보지만, 진정으로 ‘나’를 보기 위해서는 중심에 있는 ‘나’를 외곽에서 보아야만 한다. 존재를 무너뜨리고 무화(無化)함으로써 다른 것에 구속되고 그리하여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논리가 판옵티콘의 비유를 통하면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 여전히 문제가 남는다. ‘나’가 진정한 ‘나’가 되기 위해서는 중심과 외곽에 동시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자유로운 자유는 허상이며, 불행히도 우리에겐 구속된 자유만이 자유로 허용된다. 성경의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구속된 자유가 아니라 자유로운 자유는 오직 신에게만 가능하고 인간에겐 주어지지 않았다. 신만이 스스로 말미암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사실은 근대의 신의 죽음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나마 그런 인간적인 자유마저 쉽지는 않은 데서 문제가 중첩된다. 오랫동안 많은 철학자들을 괴롭힌 이 문제를 요약하면, 즉자적인 자아에서 대자적인 자아로 전개됨에 있어서 즉자성과 대자성을 구분해 판정하는 제3의 주체를 설정하지 않으면 전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난관이다. 그렇다면 이 난관에 봉착해 뚫고 나가지 못한다면 인간은 자유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에서는, 전개라고 한다면 전개라고 할 난관을 뚫어낸 그런 전개가 자연스럽게 목격된다. 소설의 실제 저자인 보니것에서 극 중 소설가 욘 욘슨과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램로 연결되는 ‘3자 구도’가 이런 전개를 가능케 한다. 소설의 실제 작가인 보니것은 이 구도에서 최종심급이다. 극 중 소설가 욘 욘슨과 소설 주인공 사이의 전개를 결정하고 구분짓고 변화를 판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세 인물은 하나의 소설과 드레스덴 폭격이란 사건을 통해 본질을 공유한다.
『제5도살장』의 구도를 빌리면 우리 인간이란 욘 욘슨 같은 존재다. 자유롭고 존엄한 존재가 되기 위해 빌리 필그램이란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의 스토리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앞서 쓴 말을 다시 쓰면 한 마디로 욘 욘슨은 빌리 필그램에 구속된다. 또는 더 대중적인 용어를 활용하면 욘 욘슨은 빌리 필그램에 참여한다.
결국 인간의 자기인식과 자기존엄은 욘 욘슨에서 빌리 필그램으로 이어지는 전개, 구속, 참여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밖에 없는데, 결국 호기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데카르트의 논의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한 형국이다. 소설과 달리 인간에선 보니것이란 최종심급이 오리무중이기 때문이다.
『제5도살장』의 독자로서 우리는 보니것을 한눈에 알 수 있지만, 소설 속 작가 욘 욘슨은 빌리 필그램을 통해서 자신의 실존에만 혹은 자신의 존재와 존엄에만 신경 쓸 뿐 후방의 최종심급을 짐작조차 못 한다. 다시 확인해 우리는 소설 『제5도살장』의 독자일 때와 달리 인생에서는 그저 욘 욘슨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욘 욘슨이 전방으로 빌리 필그램에게 존재의 앙가주망(Engagement)을 걸쳐놓았다면 존재의 후방으로 커트 보니것에도 걸쳐놓을 수 있을까. ‘앙가주망’에 들어있는 ‘gage’는 불어로 내기를 뜻한다. 존재의 전방과 후방을 모두 식별하고 양자에 모두 앙가주망을 걸쳐놓으리란 희망은 내기에 가깝다.
성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내기. 그래도 우리는 인간이므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알파고 9단’과의 대국 중 제4국에서 이세돌이 둔 78수를 ‘알파고 9단’이 볼 확률은 0.007%였다고 한다. 바둑계에선 이 한 수가 ‘신의 한 수’로 회자된다. 물론 ‘알파고 9단’이 훨씬 많은 ‘신의 한 수’를 뒀겠지만 우리는 인간이 둔 ‘신의 한 수’에 더 주목하고 열광한다. 그렇다면 순환논법에라도 귀의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마침내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지 혹은 자신이 인간인지 알기 위해 내기를 걸 게 아니라 은총에 기대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기 아니면 은총.
글·안치용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장으로 영화평론가로도 활동한다. 지속가능성과 CSR을 주제로 사회활동을 병행하며 같은 주제로 청소년·대학생들과 소통·협업하고 있다.
편집자주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는 “르몽드 북클럽 ‘금오문향’(금요일 오후, 문학의 향기에 빠지다)-안치용과 함께 하는 죽어서도 꼭 읽어야 할 세계문학 100”의 매과정 결과물을 정리해 격월로 연재됩니다.
100권의 세계문학 명저를 읽는 르몽드 독서스쿨 “금오문향”은 2달에 6권씩 모두 17개의 2개월짜리 과정으로 구성돼 34개월에 걸쳐 진행됩니다. 매주 한 권씩 미리 정한 책을 읽고 금요일 오후에 모여 토론회를 진행한 뒤 7번째 주에 특강을 듣는 ‘6+1’ 방식으로 각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안치용 한국CSR연구소장이 독서길잡이 겸 인문학멘토로서 함께 합니다.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 4]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기인식과 자기존엄에 도달하는 내기 혹은 은총?은 ▲분노의 포도(존 스타인벡) ▲인간의 조건(앙드레 말로) ▲바다의 침묵(베르코르) ▲이것이 인간인가(프리모 레비) ▲목로주점(에밀 졸라) ▲제5도살장(커트 보네거트)을 참고했습니다.
‘르몽드 북클럽_금오문향’은 18년 11~12월에 5과정(멋진 신세계)을 진행 중이며 19년 1~2월엔 6과정(위대한 첫사랑과 세월의 거품)을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