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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권의 문화톡톡] 당신의 침대
[성일권의 문화톡톡] 당신의 침대
  • 성일권(문화평론가)
  • 승인 2019.09.09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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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와 영화 속의 침대, 그리고 현실은...

 

에드워드 호퍼, 호텔방
에드워드 호퍼, <호텔방> - 1931

TV 광고에서 비치는 침대는 왠지 은밀하고 우아하다. 한 평 남짓한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멋진 여성이 커튼 사이의 아침 햇살에 비시시 눈을 비비며, 모닝커피를 들고 온 '조각 남성'과 사랑의 미소를 나누는 모습은 얼마나 우아한가? 또한 조명등을 켜고 침대에 앉아 책을 읽는 그림 속 여성의 모습도 아름답다. 미국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호텔방에서 잠옷 차림의 여성이 잡은 두터운 책은 어쩌면 잠 못 이루는 밤의 최고의 수면제일 수 있지만(1931), 책에 빠져든 침대 위의 여성은 지성미를 발산한다.

영화 연인, 1992
영화 <연인>, 1992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96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96

하지만 치명적인 사랑과 관능적인 욕망을 담아낸 영화들에서 침대는 그저 소품에 불과하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연인>(1992)에서는 남녀 주인공역인 양가휘와 제인 마치가 안락한 침대를 놔두고, 굳이 맨바닥에서 격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1996)에서도 폴 역의 말론 브란도와 잔느 역의 마리아 슈나이더는 우연히 만나 서로 이름도 모른 채 허름한 임대 아파트의 차가운 벽과 바닥에서 짐승들처럼 격렬하게 정사를 나눈다. 섹스가 끝난 뒤 둘은 인사도 없이 서로 모르는 남남으로 거리를 나선다.

세기의 로맨스 작품으로 자리 잡은 두 영화에서 남녀가 안락한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관객들의 기억에 남는 명작이 될 수 있었을까? 이미 만남의 시작부터 이별이 예고된 파행적이고 슬픈 사랑은 너무나 절박하고 순간적이어서 장소를 따질 만큼 여유롭지 않다.

안락한 침대는 관능적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예측 불가능한 불꽃같은 사랑을 표현하는데, 우아한 침대란 얼마나 틀에 박힌 교과서인가? <파리의 마지막 탱코><연인>이 수없이 쏟아지는 애정영화들의 교본처럼 자리 잡은 것은 사랑이란 원래 피행적일수록 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침대의 본래적 기능은 휴식과 재충전에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대중매체 광고가 침대를 사랑의 공간으로서 안락함과 우아함을 주로 표현하지만, 정작 실생활 속의 침대는 외관보다는 실용성이 중시된다. 건강을 고려해 친환경적인 목재와 황토, 자연적인 화강암과 대리석 등을 소재로 한 침대들이 출시돼 있고, 각기 침대마다 허리 디스크, , 어깨 등의 피로감을 덜어주고, 힘을 충전해주는 기능이 강조된다.

침대는 은밀한 개인 공간이자 지친 육체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다.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다가 이제 영어(囹圄)의 몸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대한민국의 최고 갑부이지만 어쩌면 곧 감옥에 갈지도 모를 삼성의 이재용 총수나, 또는 위태로운 하청건설업체의 일용직이거나 큰 병을 얻어 곧 세상과 하직할 운명의 병자라 할지라도 누릴 수 있는 권리의 공간이다. 당신이 아무리 힘이 쎈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침대를 강제로 뺏을 순 없다. 그들의 잠자리 취향이 침대가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침대 위에서 뭉기적 뭉기적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한다. 결코 친환경주의자는 아니지만, 낮은 목재 침대에 등을 대고, 보조 베개를 장딴지에 깐 채 누워 천장 위의 파리를 한참 뚫어지게 바라볼라치면, 어느새 2.3kg짜리 요크셔종 복돌이(11)가 내 복부에 뛰어올라서 나와 눈을 맞추는데, 나는 이 순간에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낀다. TV 속의 멋진 여성이 광고하는 침대처럼 결코 우아하진 않지만, 평상 2개를 나란히 붙여 조립한 내 침대는 노쇠한 요크셔가 훌쩍 뛰어오를 수 있을  만큼 나즈막하다. 나는 침대에 배를 깔고 책도 읽고, 누워서 스마트폰도 만지작거리고, 일어나서 작은 교자상에 노트북을 놓고서 글을 쓰기도 한다. 내 침대는 휴식의 공간이자 삶의 공간이며, 복돌이와 나누는 우정의 공간인 셈이다.

내 목재 침대가 뒤틀리는 나무의 특성상, 몸을 뒤척일 때마다 자주 삐거덕거리고 그 소리 때문에 스스로 놀라 깨어나지만, 나는 아직 내 침대를 바꿀 생각이 없다. 그만큼 내 침대에 익숙하고 편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나는 넷플릭스 플랫폼을 통해 시리즈 영화 <베르사유>를 즐기는데, 왕과 왕비의 높은 침대들을 볼 때마다 잠꼬대라도 하면 떨어져 크게 다칠 텐 데라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곤 한다. 더욱이 어울리지 않게 침대에 웬 커튼과 지붕이라니? 왕은 자신의 잠자리가 위태로워도 꿈속에서라도 왕의 품위를 지키려 침대를 높게 설치하고 지붕까지 단 듯싶다. 조르주 페렉에 따르면 18세기 말 유럽의 귀족층과 왕가에서 유행했던 이탈리아식 침대 유형은 이처럼 커튼과 지붕이 있으며 침대는 높고 세로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다. 얼마 전에 본 경복궁의 고종 침대도 어지간히 작고 높았으며, 생김새도 비슷했다. 아마도 유럽 왕실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왕과 왕비는 저 높은 침대에 자면서 천 길 낭떠러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꿈을 꾸지는 않았을까? 아마도 악몽을 꾼 날에는 왕의 광기가 도져서 백성의 삶을 더욱 더 도탄에 빠트렸으리라. 왕의 침대가 좀 더 나지막하고, 낮이면 햇살을 맞고, 밤이면 밝은 조명을 받는다면, 그래서 피곤할 땐 육신의 피로를 풀고, 또 침대에 앉아 책도 읽고, 담소도 나누며 백성의 삶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침대의 정치사회학이라고나 할까?

병원 침대
병원 침대

얼마 전부터, 개인적인 일로 노인 전문 요양병원을 자주 찾고 있다. 6인용 병실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할머니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두터운 책을 읽고 있고, 다른 할머니는 침대에 작은 교자상 위에 턱을 괸 채 뭔가 쓰느라 여념이 없다. 책을 읽는 노인은 갈수록 지워지는 기억의 주름에 언어를 채우느라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고, 글을 쓰는 노인은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금세라도 사라질까 두려워 애써 볼펜을 꾹꾹 눌러쓰는 듯하다. 이들 노인의 조립식 철제 침대는 멋진 모델이 나오는 TV광고 속의 침대처럼 우아하거나 안락하지 않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노인들의 얼굴에는 행복감과 진지함이 배여 있다.

우리는 인생의 3분의 1을 침대에서 보내지만, 어쩌면 노인이 되면 더 많은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야 할지 모른다. 개인적인 일로, 요즘 난 노인전문 병상의 보조침대에서 지내고 있다. “오랫동안 나는 이른 시간에 잠들었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귀처럼, 이곳 노인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또 일찍 일어난다. 마치 간밤에 자신이 지나친 시간들을 또다시 맞게 되리라는 기대감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기억을 잃은 노인들의 침대엔 흔히 노인들이 행여 낙상할까봐 울타리를 높이는 등 안전장치를 하지만, 노인들은 밤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과거와 현재, 더 아득한 과거와 더 불확실한 미래를 언뜻 이해하기 힘든 언어로 얘기한다. 어렴풋이 들리는 것은 이라는 단어다. 한평생 자신이 눕고, 자고, 일어나서 화투를 치고, 바느질하고, 가족들과 대화를 하던 잠자리가 있는 집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나는 작은 보조침대에 누워 맥락 없는 생각을 해본다. 침대라는 존재가 누구에게는 사랑과 안락함의 공간이고, 누구에게는 욕망과 권력의 공간이며, 또 누구에게는 지난 과거를 하나씩 지워가는 레테의 공간일 것이다. 누구든지 피할 수 없는 것은 언젠가는 거의 예외 없이 누구나 날카롭게 날을 세운 프로크루스테스’(Procurstes)'의 각진 침대에 누여질 날이 올 것이라는 점이다.

<은행나무 침대>에서 주인공들이 침대를 매개로 전생과 현세의 윤회를 오가며 사랑을 나누지만, 현실 속에서는 어느 TV 광고처럼 침대는 과학일 뿐이다. 나는 오늘도 을 찾아 비좁은 침대를 떠나려는 한 노인이 낙상할까 노심초사하며, 병실침대의 안락한 기능에도 침대 회사들이 관심을 기울여주길 기대해본다.

프로크루스테스여! 부질없는 부탁이겠지만, 부디, 우리 모두가 그대의 침대가 아닌 우리의 침대에서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살도록 도와주게나.’

 

글: 성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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