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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황홀한 적멸, 우주적 징후 - <그래비티>
[안숭범의 시네마 크리티크] 황홀한 적멸, 우주적 징후 - <그래비티>
  • 안숭범(영화평론가)
  • 승인 2019.11.25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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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래비티>를 보며 주인공 스톤(산드라 블록 분)의 여정에서 긴장과 공포를 느낀 이유는 몇 가지로 추려진다. 먼저 우주의 특수한 물리적 환경과 그곳의 생경한 풍경은 신비한 영화체험이 된다. 우리는 지구를 먼별처럼 떼어 두고 생활해 본 적 없다. 광활한 공간을 가득 매운 우주적 침묵을 맞닥뜨린 바 없다. 항상 지구의 중력장 안에 머물러 왔음에도 우린 그 힘의 실체를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지구의 만유인력과 자전 속도에서 오는 원심력이 생활의 조건인 셈이다.

<그래비티>의 가장 극적인 긴장은, 우리가 너무 당연해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의 존재가 어떤 신비감으로 지각되는 순간에 솟아난다. 이를테면 무중력의 시공간에서 ‘관성’이 갖는 위력을 감당해야 할 때, 우린 공포에 가까운 긴장을 느끼게 된다. 비가시적인 영적 실체처럼 산소가 삶과 죽음을 규제하며 (비)존재를 알릴 때, 공포를 넘어선 긴장을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그래비티>는 익숙한 생활세계의 모든 것을 타자화시키며 무뎌진 오감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영화다. 탈현실의 현실을 다룬 영화이면서, 무한한 공간에서의 폐소공포증을 활용하는 영화다.

이제 스톤이 감당하게 된 비참한 상황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우주를 함께 탐사하던 동료들은 죽었고, 생명 연장의 희망이 담긴 공간, 곧 산소가 남겨진 장소도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그녀의 생존을 건 모험은 산소가 있는 공간에 스스로 갇혀 있기 위한 여정과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지않아 스톤이 외롭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홀로 무한한 침묵을 유영해야 하는 스톤의 외로움. 그것은 그야말로 우주적 소외감이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무한한 우주 속 작은 이물질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쳐질 운명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알폰소 쿠아론이 베푸는 <그래비티>의 시각적인 쾌감은 절망의 감각이기도 하다. 쿠아론은 무한한 우주에 대비되는 인간의 왜소한 운명을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쿠아론이 마주하게 하는 ‘역설’의 영화체험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래비티>는 중력이 없는 세계에서 지구의 ‘중력’을 보게 한다. 산소 없는 공간에서 일상에 편재하는 ‘산소’를 만나게 한다. 그리고 스톤은 지금 딸의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지만, 그 시간은 딸과 함께 하던 삶을 오롯이 품고 있다.

 

<그래비티>가 환기시키는 궁극적인 인력이 질량을 가진 두 물체 사이의 끌어당김과 무관하다는 것을 이미 암시했다. 죽음 너머로 멀어지는 딸을 지금 여기 내 곁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스톤의 내면. 딸을 향하던 리비도를 전환하지 못한 엄마의 무의식. <그래비티>의 우주적 침묵에 깃든 절망은, 그래서 거대한 메타포다. 그녀가 감당하고 있는 산소 결핍의 상황들도 딸을 실감할 수 있는 시공간의 소멸로 치환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주에 버려진 스톤이 죽음의 문턱에서 자기 우울증과 싸우는 장면들도 불가능한 애도작업 앞에 선 어미의 순간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스톤에게 지구와 우주는 각각 ‘삶으로의 회귀’와 ‘죽음으로의 자기 포기’를 의미하는 선택지다. 스톤은 지구 귀환을 포기하고, 우주에 남겨지는 쪽을 택할 수도 있었다. 죽음 너머로 간 딸의 인력에 자신을 투항할 수도 있었다. 영화 후반의 침묵은 빈 우주정거장을 돌며 무의미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삶의 지난함과 지루함을 품고 있다. 어쩌면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바깥으로 나온 그 시점부터 스톤은 자기보존적 본능으로부터 가장 먼 쪽을 향하는 죽음 충동, 곧 타나토스에 자기를 맡겨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비티>는 새끼의 부재를 상징화하지 못한 어미의 자기 처벌 이야기로 종결되지 않는다. 스톤은 우주의 폐기물처럼 무생물로 환원되고 싶은 충동을 초인적으로 잠재운다. 이 신비한 ‘생의 의지’는 자기 실존으로부터 오는 비의적인 인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스톤의 죽음을 막은 그녀의 동료 매트(조지 클루니 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매트의 환영’은 죽음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려던 스톤을 가까스로 구원한다. 매트의 환영은 스톤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실낱같은 생의 의지가 그려낸 것이다. ‘스톤-스톤의 딸’, ‘스톤-죽음의 공간으로서 우주’, ‘스톤-전유할 수 없는 시간’ 사이에 작동하는 인력을 거스르는 정신의 힘이 불러 온 것이다. 어쩌면 그 힘은 ‘부활의 공간으로서 지구’, ‘투쟁의 방식으로서의 시간’으로부터 작동되는 또 다른 인력인지도 모르겠다.

프로이트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어떤 애도 과정도 병리적이라고 믿는다. <그래비티>는 그 고통스러운 전철을 신비한 우주적 징후로, 황홀한 적멸감으로 풀어낸 영화다. 당신이 아직 <그래비티>를 보지 못했다면 초현실적이면서도 너무 ‘인간적’인 스톤과 우주 사이의 리얼타임 대결을 추천한다.

 

 

<그래비티>(2013)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지금은 영화를 포함한 문화콘텐츠의 인문학적 기획 및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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