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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청춘의 포크, I’m not there
[이혜진의 문화톡톡] 청춘의 포크, I’m not there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0.01.0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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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s Square. New York City. 1960 (출처-alamy.com)

 

고도경제성장기의 1960년대와 청년문화의 탄생

2차 대전 직후 태동한 청년문화가 가장 역동적인 힘을 드러낸 시기는 1960년대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의 한 가운데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존 F. 케네디가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내세우며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민권운동, 신좌파운동, 여성해방운동, 반전운동 등 전 세계의 청년들은 앙시앵 레짐에 전면적으로 도전했던 시기가 바로 1960년대였다. 이때 미국의 기성세대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히피(hippie)로 대표되는 청년세대의 일탈과 반란(Youthquake)이었다. 2차 대전 직후 연간 10%를 웃돌았던 장기경제호황은 청년세대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여유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부모세대는 엄격한 훈육방식보다는 관용적인 교육태도를 취하고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줌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우리 중심의 시대(We Dacade)’를 살아가는 주체를 탄생시켰다.

일본의 경우 1960년대의 고도경제성장은 메이지 시대부터 줄곧 유지되어왔던 생활관습, 즉 무엇이든 함부로 버리지 않는 일본인들의 생활습관을 단번에 대량으로 소비하고 대량으로 폐기하는 습관으로 크게 바꾸어놓았다. 또 1960년대 미국 경제의 풍요는 마치 크리넥스 휴지를 쓰다 버리는 것과 같은 일회성 소비사회로 탈바꿈시켜 버렸다. 대공황과 세계 대전을 겪으며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 의존해왔던 부모세대와 물질적 풍요의 덕택으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개성을 중시하게 된 청년세대는 급격한 세대 차이를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고막이 터져버릴 듯한 로큰롤 밴드 뮤직과 몽환적인 사이키델릭을 즐겨듣고, 장발, 판탈롱, 화려한 색상의 헐렁한 옷차림, 인디언풍의 헤어밴드와 머리에 꽃을 꽂은 히피 패션, 그리고 느슨한 성 관념에 마약을 상용하는 이 청년세대는 부모세대처럼 정면에서 맞서 싸우고 극복해야 할 극단적인 경험을 겪어보지 못한 까닭에 평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이 초래한 인간 삶의 파되 등과 같이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이나 제도적인 모순을 고발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관용적 교육방식과 물질적 풍요가 1960년대의 청년세대를 버릇없고 과격하게 만들었다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이 청년들은 부모로부터 계승한 자유와 평등, 평화와 민주주의, 과학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거기에 은폐된 모순들에 대해 도덕적 감성으로 대응해갔다. 즉 이들은 자본주의가 가져다 준 생산력의 발전상에 의존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의 발전이 초래한 인간 소외 혹은 거기서 발생하는 인간 삶의 모순들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요컨대 1960년대는 전후의 평화와 민주주의에 의한 시민사회의 지배양식이 완성된 동시에 그 동안 억압과 희생을 강요당한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급진적 청년세대의 새로운 형태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항문화(counter culture)’는 냉전과 핵전쟁의 공포, 억압과 권위적인 정치·사회에 대한 반성과 저항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1960년대라고 하면 196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십년 주기로 이해하기 쉽지만, 1960년대의 시작과 끝을 어디까지로 볼 곳인가에 대해서는 문화사적 논의가 분분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1960년대와 그 전후의 시기를 연속상의 영역으로 파악하는, 이른바 ‘장기 60년대(long Sixties)’의 관점을 채택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로자 팍스(Rosa Parks) 사건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철폐 및 민권운동과 미국 평화주의자들의 반핵시위가 시작된 1955년을 1960년대의 출발점으로 보고, 또 신좌파운동을 이끈 민주학생연합(SDS)이 결성된 1960년을 경유하여 1973년 베트남 전쟁의 종결, 그리고 1974년의 오일쇼크와 닉슨의 대통령직 사임 시기를 그 종결지점으로 보는 관점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Masters Of War (출처_bandcamp)

노래의 뉴 프런티어

전통적 가치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대의를 내세운 대항문화를 창출하면서 탄생한 1960년대의 전 세계 청년들을 연결해 준 한 강력한 수단 중의 하나는 바로 포크음악이었다. 즉 이들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한 모든 권위와 억압에서 일탈하여 아래로부터의 시각이라는 새로운 자의식과 정체성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때 이들의 의식과 내면을 노래로 대변한 일등 공신이 바로 밥 딜런(Bob Dylan) 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포크록의 대부이자 대중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밥 딜런은 1960년대 시대정신의 아이콘이자 반전·저항문화의 상징적인 존재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귀 기울이고 있지 않는 눈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노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주 피력하곤 했다.

그럼에도 최고의 반전가요로 꼽히는 <전쟁의 달인(Masters of War)>(1963)이나 <신은 우리의 편(With God On Our Side)>(1963)과 같은 곡들은 양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모든 전쟁을 주도한 미국의 폭압과 살육의 역사를 고발하는 심정을 잘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밥 딜런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이 누리고 있는 평화란 결국 전 세계의 약소국들이 흘린 피의 대가라는 사실을 고발하면서 전쟁 가해자로서의 미국인의 자각을 촉구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미국 청년들을 반전투쟁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더욱이 같은 시기에 대두한 민권운동이 반전투쟁과 결합하면서 프로테스트 포크뮤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운동 세력으로 성장해갔다.

자, 전쟁의 달인들이여! 총을 만든 당신들, 죽음의 비행기를 만든 당신들! 거대한 폭탄을 만든 당신들! 난 당신들이 좀 깨달았으면 좋겠어. 난 당신들의 가면을 꿰뚫어 볼 수 있지. (중략) 당신들은 다른 이들이 총을 쏠 수 있도록 방아쇠를 죄어주지. 사망자가 늘어날 때 당신들은 뒷전에 물러나 주시하지. 젊은이들의 피가 흘러 진흙에 스며들 때 당신들은 그저 맨션 안에 숨어있지.

                                                                 - <전쟁의 달인(Masters of War)>(1963)

 

오, 역사 교과서는 말하죠, 잘도 말하죠. 기병대가 밀어붙여 인디언들을 쓰러뜨렸다고. (중략) 미-스페인 전쟁은 한물갔죠. 그리고 남북전쟁 역시 묻혀졌죠. 나는 영웅들의 이름을 기억해요. 그들이 손에 들었던 총과 함께. 신은 우리의 편이니까요. 소년들은 1차 대전 때 사라졌죠. 전쟁의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배웠어요. 긍지를 갖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사망자의 숫자는 세지 마세요. 신이 우리 편일 때는. 2차 대전 때도 사라졌죠. 우리는 독일인들을 용서했죠.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어요. 설사 그들이 600만 명을 오븐에 구워 죽여버렸다 하더라도 이제 신은 그들의 편이죠. 러시아인들을 증오하라고 배웠죠, 일평생. 만일 다른 전쟁이 일어났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들과 싸워야 했겠죠. 그들을 증오하고 그들을 두려워했겠죠. 도망가거나 숨었겠죠. 그리고 그것을 용감하게 받아들였겠죠. 신은 우리의 편이니까요.

                                                    - <신은 우리의 편(With God On Our Side)>(1963)

 

인디언 학살, 스페인 전쟁, 남북 전쟁, 양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그리고 소련과의 냉전에 이어 핵폭탄의 위협까지 끊임없이 침략전쟁과 살육을 지속해온 미국 근대사에 표현된 ‘신의 가호’에 내포된 실체란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간 마법의 일종이었음을 폭로한 밥 딜런. 1960-1970년대 그의 반전가요는 그 어느 때보다 전 세계 청년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즉 밥 딜런의 프로테스트 송은 전승(戰勝)과 같은 영광, 권력과 부를 통한 견고한 계급질서와 인종차별과 같은 낡은 관념을 고수하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의식혁명을 불러일으켜 준 것이었다. 특히 밥 딜런의 노랫말은 하루살이 수준의 대중가요 가사를 성경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될 만큼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것이었다는 사실은 대중의 새로운 감성을 자극하고 견인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줄 만큼이나 독창적인 것이었다.

 

With God On Our Side (출처_CDandLP)

이렇듯 의식혁명을 동반한 1960-1970년대의 포크운동은 이미자로 대표되는 1960년대 한국 트로트 열풍의 저편에서 한국 청년들의 감성을 강타했다. 값비싼 악기와 장비가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노랫말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포크송은 청바지·생맥주와 함께 ‘통기타 음악’으로도 불리면서 삽시간에 ‘한국 청년문화’의 대표 주자로 자리 매김 되었다. 1968년 미국에서 생활하며 비틀즈의 로큰롤을 듣고 히피들과 어울려 지내던 한대수가 귀국했는데, 그의 포크뮤직은 지금까지 한국에 존재해왔던 그 어떤 문화와도 완전히 다른 감수성을 보여주며 대중을 매혹했다. 한대수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 동안 번안곡 중심의 통기타 가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가운데 한국 최초의 포크 싱어송라이터의 탄생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1971년 김민기의 1집 앨범 발표는 한국 포크음악 대부의 첫 등장을 알리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한국적인 소박한 정서와 서정적이고 정직한 언어로 표현된 한대수와 김민기의 포크는 시적 감수성을 향유할 수 있는 문학성은 물론 감미로운 선율과 합창으로 이어지기 쉬운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또한 1974년 최인호 원작, 이장호 연출의 영화 <별들의 고향>이 당시의 청년들에게 새로운 멜로 감성을 불러일으키자 영화의 주제곡을 만든 이장희가 1970년대 초 한국가요계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 포크음악의 절정기는 포크운동의 몰락기와 운명을 함께 했다.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에 이은 ‘공연활동정화대책’은 이장희를 비롯한 신중현, 김추자, 윤형주 등 수많은 대중가수들을 대마초 혐의로 구속한 동시에 수많은 노래들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해방 이후에 태어나 일본문화가 아닌 미국문화의 직접적인 세례를 받은 이 시기의 청년 가수들은 이제 대마초에 취한 반사회적 잉여의 존재로 낙인찍히면서 방송출연은 물론 공연활동조차 금지당했다. 꽃을 활짝 피우기도 전에 급격히 시들어간 한국 포크음악의 자리를 대체한 것은 윤수일, 최헌, 혜은이, 이은하 등으로 대표되는 트로트 록이나 디스코와 같은 통속성 짙은 대중가요였다. 김광석이나 시인과 촌장, 어떤날, 장필순에 이르는 이른바 ‘조동진 사단’, 그리고 김현식 등 철저한 자의식에 기반한 수준 높은 한국 포크의 부활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1990년대를 기다려야만 했다.

 

출처_Selfluence

21세기의 촛불

1967년 히피 청년들을 표지모델로 내세운 <TIME>지는 ‘히피 코드의 가이드라인’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자신만의 일을 하라. 이 일을 꼭 해야 하거나 언제든 하고 싶을 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사회를 떠나라, 완전히 떠나라.

사람들 모두의 마음에 바람을 일으켜라. 그들을, 마약이 아니라면, 아름다움, 사랑, 정직, 재미로 취하게 하라.

 

과도한 ‘노오오오오력’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향해 매진해가야만 하는 오늘날 청년들의 삶의 태도와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느슨하고 심지어 방만해 보이기까지 한 이 히피 코드는 냉전체제를 배경으로 한 미국 사회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전쟁을 근원으로 하는 국가의 권위에서 일탈하기 위한 목적에서 제출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당시의 히피들은 국가에 대한 청년 파업과 유사한 감성을 동력으로 하면서 자유로운 공동체적 행동양식과 니힐리즘의 분위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힘없고 빈곤한 청년들에게 주어진 몇 안 되는 선택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 미국의 히피와 동질의 성격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의 청년그룹이 있었으니, 이들은 1940년대 후반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로서 현재 일본의 전체 인구 중 5.4%를 차지한다. 특별히 ‘단카이(團塊)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이끈 주역들로서 그 동안 새로운 경제의 소비 동력으로 주목받아 왔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히피와 일본의 단카이 세대들이 기성세대가 된 시점에 이르자 이들이 모두 미국과 일본에서 광범위한 중산층을 형성하면서 경제 성장의 호황기를 이끌어간 동시에 정치적으로 점차 보수화되어갔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데, 현재 한국 정치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이 포크세대는 ‘헬조선’의 ‘흙수저’ 청년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대상이 되었다.

국가 이데올로기와 전쟁 폭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청년세대가 훗날 기성세대가 되면 또 다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바꿔버리는 이 낯익은 행위는 지극히 오래되고 익숙한 관습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까. 1960-1970년대의 밥 딜런은 세계정세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포착하지 못하면서 안락하고 평온한 생활에 안착해버린 위정자와 그런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시민들이 만연한 사회를 최악의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인들은 스스로 침묵함으로써 권력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리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지만 잘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관심을 가지려 하지도 않는다. 이건 옳지 않다. (중략)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따위의 오래를 만드는 이들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러나 세상에는 사랑과 섹스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지금 그것들이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쳐다보지 않고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 만약 실현되도록 노력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는가”

 

Steve Jobs 4 Macintosh (출처_egloos)

1960년대의 밥 딜런이 당시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의 정치적 무의식을 조롱했던 것처럼 21세기의 청년들은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 반전과 민권운동의 촛불이 청년 저항의 시작이었듯이, 한국 청년들이 손에 쥔 촛불은 세상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조용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아이돌과 힙합을 동시에 좋아하고 기성의 질서에 냉소적이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소극적인 현재의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어색한 동거를 지속하면서 점차 이 시대의 주류를 형성해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계는 변하고 또 그 세계의 중심은 청년세대로 교체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21세기 한국의 청년들은 다음 세계에서 또 어떤 청년들의 저항에 부딪히게 될까. 변화와 혁신으로 전 세계를 일깨운 스티브 잡스가 1984년 매킨토시를 세상에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밥 딜런의 곡을 들고 나와 화제가 되었던 <시대는 변하니까>(1964)를 여기에 소개한다. 밥 딜런의 이 가사는 1964년에 쓰였고 스티브 잡스는 1984년에 이 가사를 환기했지만, 2020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세계도 여전히 관통하는 내용이지 않은가.

지금의 패자들이 곧 승리하리니 시대는 그렇게 변한다. 국회의원들아, 정치인들아, 우리들의 부름을 경청하라. 문을 막지마라, 홀을 차단하지 마라. 상처를 입는 것은 문을 잠그는 자들이다. 외부와의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머지않아 너희의 창문을 흔들고 벽을 두드리리니. 시대는 그렇게 변한다. 지금은 느리지만 다시금 빨라지리니, 현재는 다시 과거가 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고 지금 정상에 있는 자들이 곧 마지막이 되리니, 시대는 그렇게 변하는 것이다.

                                      - <시대는 변하니까(The Times They Are a-Changin')>(1964)

 

<참고문헌> 

황혜성, 「미완성의 모자이크」, <서양사론> 제99호, 2008.
유종순 지음, 「노래, 세상을 바꾸다」, 목선재, 2015, 56쪽.

* 이 글은 계간 <문학과의식>(2017년 겨울호)에 게재했던 글을 수정한 것임을 밝힌다.

 

글: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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