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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돈쭐’로 증명되는 선한 영향력엔 원칙이 있다
[장윤미의 문화톡톡] ‘돈쭐’로 증명되는 선한 영향력엔 원칙이 있다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0.02.03 09: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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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게들(출처: 유투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게(출처: 유투브)

1. ‘돈쭐’을 내주러 갑시다.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저렴한 가격으로 질 좋은 상품을 제공하는 것이며, 그 생산자에게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그들의 상품을 많이 팔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자가 영리 목적과 관계없는 선행을 함으로써 지역과 사회에 기여 했을 경우에도 소비자가 돈으로 보상해주는 방식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이나 분위기는 과거에 없던 것은 아니었다. ‘기왕에 사(먹)는 거면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의 것을 팔아주자는 동네 주민들의 미덕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에 국한되었던 미덕은 온라인 매체와 SNS 덕분에 과거보다 훨씬 넓은 범위와 적극적인 소비자의 참여로 확장되고 있는데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유행어로 ‘돈쭐 내러 간다’를 들 수 있다.

인터넷 매체나 사회관계 서비스망(SNS)에서 ‘돈쭐을 내줘야 합니다.’, ‘돈으로 혼내주러 갑니다.’와 같은 표현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돈쭐’은 '돈'+'혼쭐'이 합쳐져 만들어진 신조어다. 혼쭐은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을 때 그에 대한 응징이라면 ‘돈쭐’은 좋은 일을 했을 때 그에 행동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 이 돈쭐은 특히 지역과 공간을 초월하며 이른바 ‘성지 순례’를 취미로 삼는 개인들이 늘어나면서 소비자의 영역을 넓혀 놓았는데 과거에는 동네 주민이 주요 소비자이었다면 이제는 공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잠재적 소비자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쭐’의 범위를 쉽게 짐작하거나 예상할 수 없는 경우도 일어난다. 별 볼일 없던 매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기도 하고, 자영업자 인생에 전환점을 안겨주었다는 이야기는 '주작(做作)'이 아니라 '실화'가 된 것이다.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사회이긴 하지만 이제는 많이 쓰는 것보다 어떻게 쓰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자신의 소비가 선한 영향력에 일조한다는 뿌듯함은 자연스럽게 선한 영향력자들과 연대의식을 갖도록 한다. 더불어 이와 같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 의식 전환은 생산과 소비이라는 관계 말고도 선행과 돈쭐이라는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 생산자 입장에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응징으로서 ‘혼’은 '돈'이라는 욕망의 언어로 바뀜으로써 “돈쭐 나다”는 행위는 생산자 입장에서 가장 받고 싶은 꾸지람이고 소비자에게는 가장 뿌듯한 꾸지람이 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생산자가 선한 영향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2. 선한 영향력자들의 조건

가치 있게 돈을 쓰는 것이 미덕인 시대다. 그래서 그런가 소비자는 상품을 고를 때 가격과 질은 물론이고 생산자의 철학까지도 염두하며 고른다. “비싼 브랜드가 좋은 물건을 만든다.”는 논리 대신 “좋은 생산자가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낸다.”라는 소비 논리가 탄생했고 이는 기존의 소비 패턴을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 패턴은 역발상적으로 기업의 상품의 생산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기업의 철학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좋은 생산자란 어떤 생산자인가. 최근 트렌드에 비춰보자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체들(기업 혹은 생산자)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이익 추구만큼이나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참여한다. 가장 쉬운 방법의 예로는 지역 사회의 결식아동들을 돕거나 친환경적인 생산 방식을 추구함으로써 환경오염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비자들은 이들의 행위를  모두 일컬어 선한 영향력이라 말하지 않고, 아무나 선한 영향력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진정한 선한 영향력자로 불리기 위해서는 조건을 갖추어야만 한다. 바로 자신의 분야에 대한 실력을 갖추고, 지속 가능한 (생산)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표방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행의 의도가 분명하고 투명해야 한다. 이들의 특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먼저 실력이 담보되지 않는 선한 영향력은 지속가능성이 낮을 확률이 매우 높다. 예를 들어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 좋은 취지를 가지고 소외 계층에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하자. 이 사실은 SNS와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알음알음 알려져 소문이 났고 이른바 ‘돈쭐 좀 내주러 출동해야겠다’는 사람들이 속속 생겨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한 식당의 수입은 잠시 동안 좋았을 뿐 금세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바로 음식점의 기본인 음식 맛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선행을 한다고 해도 식당의 기본인 음식이 맛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즉 실력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선한 영향력자가 되기는 아무래도 어렵다. 돈쭐을 내주고 싶어도 맛이 없으면 본전이 생각나듯이 실력이 없는 영향력자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선의가 선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형편없는 상품을 생산하면서, 질 낮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선향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모순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한 영향력의 주체가 되려면 업에 대한 실력은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는 냉정하다. 소비자는 맹목적인 후원자도, 기부자도 아니다. 다만 공익을 도모하는 곳에 동참하여 선행에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장 간단하고도 현실적인 방법인 소비로 표출하는 것 뿐이다.

다음으로, 자신만의 생산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일례로 ‘원 웨어(Worn Wear)’를 기업 철학으로 내세운 의류 회사 파타고니아를 들 수 있다. 원 웨어란 ‘낡은 옷’, ‘헌 옷’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일종의 대안적 의류 소비 방식이다. 이 기업은 원 웨어를 표방하며 오래된 옷이 주는 가치와 지구를 살리는 소비 의식을 기업 철학으로 삼는다. 2015년부터는 의류 무상 수선 서비스를 제공하는 '원 웨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해당 기업 제품뿐만 아니라 타 브랜드 제품에 대해서도 무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파타고니아에서 진행한 원 웨어 이벤트(출처: 파타고니아 홈페이지)
파타고니아에서 진행한 원 웨어 이벤트(출처: 파타고니아 홈페이지)

유행의 속도는 올리고 그 간격은 최단화하여 되도록 많은 의류를 소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적인 의류업계에서 소비자에게 신상을 제공하는 대신 고쳐 입는 것을 권하는 방식은 쉽게 내세울 수 있는 철학은 아니다. 그럼에도 “필요하지 않으면 사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그들의 당당한 기업 철학은 소비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동시에 상품 구매 동기와 명분을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줄 뿐만 아니라 충성도까지 높여준다. 소비자가 이 기업의 제품을 구입했다는 것은 곧 그 회사의 철학과 이념을 함께 구입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소비자들은 단지 가격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소비 철학에 따라 돈을 쓰고 그 철학에 부합하는 기업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런 소비 생태계는 앞으로도 지속, 확장될 것이라는 의견에는 이견이 없다.

결국 선한 영향력자가 되고 싶다면 실력을 갖추고 외부의 조건에 따라 자신의 철학을 바꾸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그 일을 오랫동안 해내야 한다. 즉 ‘오랫동안’ ‘자기 철학’을 지닌 실력자만이 진정한 선한 영향력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이것한 과정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결과물이 바로 신뢰라고 할 수 있다. 이 신뢰는 선한 영향력의 결과인 동시에 대중의 참여와 연대를 이끄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017년 자국의 불합리함을 내세워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실행에 옮긴 트럼프가 2020년 1월에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나무 1조 심기’에 동참한다고 해서 그가 선한 영향력을 도모한다거나 친환경론자로 전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환경 문제와 관련한 드라이브 노선에 미루어 본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환경문제를 사업적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도모한다는 의심만 키울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 인가도 매우 중요하다. 최근에 기업들은 상품을 광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업 자체를 광고하는 데 많은 돈을 투자한다. 기업이 만드는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자체를 파는 것이 목적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기업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한번 구축해 놓으면 고객의 충성도는 더욱 견고해지게 마련이고 이것은 곧 기업의 이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가가 성공을 위한 영업 수단으로 선한 영향력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꽤나 오랫동안 그 수단을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담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소비자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줄곧 선한 영향력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굳혀왔던 기업이 갑자기 전향하여 앞으로는 선향 영향력을 선도할 것이라고 공약한다고 해서 소비자들이 쉽게 기업 이미지를 전환하거나 호의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실제로 수많은 기업들은 기업 이미지 쇄신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공익을 위한 사업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셀프 광고를 하는 등 여러 방법을 도모한다. 그러나 그들이 목적이 단지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있다고 믿는 순진한 소비자는 많지 않다. 기업은 어디까지나 최고의 수익을 1차적 목표로 둔다. 기업이 사회 성장에 적극 동참하거나 또는 후원한다고 주장해도 그것이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윤 창출을 앞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따라서 소비자는 어떠한 선한 영향력을 펼치겠다는 기업의 공약만큼이나 그 선언을 한 기업이 누구인가를 관심에 두게 된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 기업을 가려내기 위함이다. 트럼프의 예처럼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공약은 목적을 은폐한 것 아니면 소비자 기만일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엘리트 독식 사회>에서 하버드 경제학자인 로드릭은 이렇게 말한다. “공약이 얼마나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공약이라면 유권자는 그들이 자신의 관심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이 공약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1] 여기서 유권자를 소비자로 바꾸어도 맥락은 동일하다.

몇 년 전부터인가 인식조사 또는 설문조사라는 명분을 이용해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한 후 난민 혹은 소외 이웃에 대해 정기적 후원을 제안(요구)하는 단체들을 쉽게 마주치곤 한다. 막상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이들이 정말로 비영리를 목적으로 구호단체인지, 아니면 기금을 모아 그 돈으로 이익을 창출하고 부수적인 수입으로 후원 사업을 하는 것인지, 최악의 경우 둘 다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생긴다. 무엇보다 설문 조사를 가장한 그들의 기금 모금 사업 방식은 그 목적을 은폐했다는 면에서 선한 영향력은커녕 오히려 불쾌감만 준다고 느끼는 건 소수만이 아닐 것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 혹은 단체가 선한 영향력을 영업의 또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다.

유감스럽지만 선한 영향력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신뢰하기 어렵다. 아무리 그들의 숨은 의도가 결과적으로 선을 유도한다고 할지라도 진심으로 보이지 않는다. 누가 말하느냐 또는 누가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선한 영향력이 될 수도 있고 개인의 성공을 위한 비즈니스가 될 수도 있다.

 

3. 선한 영향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

돈쭐을 낸다는 행위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에 대한 약속이자 보상이라는 방식에 대해 혹 천박한 자본주의의 모습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의 핵심이 곧 돈이라면 돈쭐은 가장 확실하고 현실적인 보상 방식이다. 선한 영향력과 그 연대의 결과가 단지 돈이라는 이유로 물질만능주의로만 환원화해버리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돈은 성공의 다름 이름이고, 현실적으로도 성장을 위해서 돈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선한 영향력자들이 받고 있는 ‘돈쭐’이 우리 모두의 성장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의 개인적 성공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내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 주체들에 대해 행사하는 '돈쭐'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연대의 표시인지 단순한 호기심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선한 영향력에 대한 보상을 부(富)로 갚아준다는 식의 사회적 분위기는 생산자와 소비자 관계를 매우 간단하고 경쾌하게 정의 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도 만만하지도 않다.

 

*참고문헌

[1] 아난드 기리다라다스, <엘리트독식사회>, 생각의 힘, 354쪽.

 

글: 장윤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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