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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라의 문화톡톡] 완벽한 여자가 잃은 것
[이주라의 문화톡톡] 완벽한 여자가 잃은 것
  • 이주라(문화평론가)
  • 승인 2020.05.11 0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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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판 <부부의 세계>와 영국의 <Doctor Foster>

현재 JTBC 금토 드라마로 방영중인 <부부의 세계>는 영국 BBC1에서 방영했던 <Doctor Foster(닥터 포스터)>을 원작으로 삼았다. 원작은 2015년에 시즌1을, 2017년에 시즌2를 각각 5개씩의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보통 6~10개의 에피소드로 한 시즌을 완성하는 영국 드라마의 분량치고는 짧은 편이나, 강렬한 서사로 영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부부의 세계> 또한 시청률 20%대 중반을 오고가며 시청자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물론 유튜브 스타 박막례 할머니께서 <부부의 세계> 리뷰 영상을 통해 “또라이의 세계” 하차 선언을 하였지만 말이다.(박정민, 「박막례 할머니, 부부의 세계 하차 선언」, 『뉴스엔』, 2020.05.09)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 (저작권: BBC)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 (copyright BBC)

그럼에도 박막례 할머니는 본방을 하차했을 뿐이지, 재방은 욕을 하며 계속 보신다. <부부의 세계>는 이렇게 ‘욕하면서도 보는 명품 막장 드라마’로 자리를 잡았다. 영국 원작 <닥터 포스터>도 한국에서는 막장 드라마로 이미 유명했다. 실제 원작을 보다 보면, 남편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는 증오에 가득 찬 여인의 복수를 만나게 된다. 이 복수는 어떻게 보면 통쾌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미련스럽다. 배신당한 관계에 대한 미련을 버렸으면 싶은 지점들이 있는 것이다.

일상을 뛰어 넘는, 그래서 드라마틱한, 한 여인의 집착적인 분노와 복수의 감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원작의 극본을 쓴 마이크 바틀렛(Mike Bartlett)은 <닥터 포스터>의 주인공 젬마(Gemma) 캐릭터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속 ‘메디아’라고 설명한다.(Mark Lawson, "The Plot of Doctor Foster is actually 2,500 years old", RadioTimes.) 메디아는 자신을 배신한 남편 이아손에 대한 집착적인 사랑과 분노로 자식까지 죽이는 ‘마녀’로 알려져 있다. 영국 드라마 속 젬마 캐릭터가 그리스 비극 속 메디아 캐릭터와 겹쳐지는 순간, 명쾌하게 이해되는 지점이 생긴다.

그런데 <부부의 세계> 속 주인공 지선우(김희애 분)는 그리스 비극 속 메디아와도, 영국 원작 속 젬마와도 잘 이어 붙지 않는 이상한 균열을 드러낸다. 한국판 드라마는 서사의 진행은 거의 영국 원작을 따라간다. 특히 초반부 1회에서 5회는 영국 드라마 시즌1을, 6회부터는 시즌2의 서사를 따라간다. 물론 영국 드라마가 클래식 드라마의 5단계 구성(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본 따, 시즌1,2가 각각 5개씩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의 16부작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원작의 창조적 각색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는 몇 가지 부수적 이야기를 첨가한 것 외에, 주요 스토리 진행은 거의 원작을 따라간다. 다만 주인공의 캐릭터를 원작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형시켰다.

여기에서부터 <부부의 세계>는 묘한 불균형을 내재한다. 메디아에서 젬마로 이어지는 캐릭터를 한국 드라마 주인공 지선우로 바꾸면서 <부부의 세계>는 이상한 불편함을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지선우를 둘러싼 주변 인간관계도 원작과는 달라지며 감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이런 부분들이 아마도 현재 한국 드라마로 재현되는 한국의 정서를 가장 흥미롭게 보여주는 지점일 것이다.

 

2. 메데이아의 이야기 ≠ 남편을 얻고, 자식을 잃었네

한국 드라마 "부부의 세계" (저작권: JTBC)
한국 드라마 "부부의 세계" (copyright JTBC)

<닥터 포스터>의 젬마와 <부부의 세계>의 지선우는 모두 ‘완벽한 여자’다. 다만 젬마의 완벽은 완벽주의 성격일 뿐이고, 지선우의 완벽함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갖춘 여자라는 의미다. 지선우는 아름답고, 똑똑하며, 멋있다. 직업에, 가정에, 좋은 이웃까지 모든 것을 다 갖췄다. 한국 드라마에서 지선우라는 여주인공은 문제없는 인물처럼 설정된다. 비록 부모의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는 있지만, 그 문제는 남편 이태오(박해준 분)가 지선우를 무너뜨리기 위한 약점으로 이용하거나, 지선우가 극단의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줄 뿐, 지선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하지 못한다. 모두가 선망하는 아름다운 여자라는 정체성이 한국 드라마 속 지선우라는 주인공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 된다.

하지만 젬마의 완벽함은 주변 사람들을 질리게 만든다. 젬마가 남편 사이먼의 외도를 알게 되고, 주변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할 때, 이웃집 애나는 말한다. 젬마의 완벽주의 성격 그리고 주변을 완벽히 자기 의도대로 통제하려는 성격이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에 대해서. 아들 톰 또한 젬마의 성격을 이렇게 표현한다. “엄마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터미네이터처럼 변해.” 이야기 초반부터 드러나는 젬마의 성격적 결함이자 특징은 젬마가 왜 사이먼에 대한 복수에 집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이먼과 그의 새 가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증오 섹스’의 덫을 놓을 만큼, 젬마는 남편에 대한 복수에 집중한다. 그러면서 젬마는 점점 자신의 일상 또한 망가뜨린다. 젬마는 점점 이상한 여자가 된다. 

<부부의 세계>의 지선우 또한 남편 이태오에 대한 복수에 집중한다. 그러나 이태오가 고산으로 돌아온 이후, 즉 원작의 시즌2에 해당하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지선우의 캐릭터는 젬마 캐릭터와 확실하게 다른 노선을 선택한다. 이혼 후 2년이 지나서, 성공한 남편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영국 남편 사이먼은 젬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3년 전 옷 그대로군, 남자도 안 만나나 봐." 젬마는 남편과 헤어지고 워커홀릭으로 지내면서 정서적으로, 성적으로, 피폐하게 지냈다. 이와 달리 한국 남편 이태오는 지선우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한다. "여전히 멋있군." 지선우는 배우 김희애를 통해 이루어지는 화려한 패션쇼를 완성시켜야 했기에, 회차마다 시청자들의 쇼핑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수십 벌의 옷을 갈아입으며, 아름답게 살아간다. 간호사들은 부원장 지선우의 남편이 돌아온 것을 알자, 오히려 이렇게 수군거린다. "부원장님 메이크업 너무 힘 준 것 아니니."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은 제작 환경 상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선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름다운 여자로 그려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는 언제나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한국판 드라마가 영국 원작과 가장 다른 지점은 바로 김윤기(이무생 분)의 존재이다. 영국 드라마에서는 여성 동료 시안이 아들 톰을 상담해 주는 의사로 나온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에서는 그 역할을 돌싱 연하남 김윤기가 맡는다.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한 여주인공이 언제나 능력 있는 연하남을 만나 남편에게 상처받은 삶을 보상받는다는 한국 불륜 드라마의 클리셰가 그대로 재연된다. 그래서 차가운 바다 속에서 남편에 대한 처절한 복수를 결심하고 여전사처럼 홀로 걸어 나온 젬마와 달리, 지선우는 김윤기의 품속에 안겨서 구출된다. 심지어 지선우는 전남편의 사랑도 받는다. 영국 드라마가 아내 젬마의 집착과 분노를 다루었다면, 한국 드라마는 남편 이태오의 집착과 미련을 보여준다. 이태오는 아들을 핑계로 계속 지선우를 찾고, 서로의 미련을 확인하는 섹스를 맺은 후, 계속 지선우만 찾는다.

모든 남자의 사랑을 받는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 지선우는 이제 복수의 화신 메디아가 아닌, 아름답지만 남편에 의해 상처를 받은 무고하고 불쌍한 피해자로 남게 된다. 지선우가 불쌍하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공감 포인트가 되며, 이 여자를 무조건 도와주고 지지해 주는 든든한 김윤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안심 혹은 희망 포인트가 된다. 젬마의 복수는 처절하다. 자신을 망가뜨리면서까지 남편을 넘어뜨리려 한다. 술에 취해 밤거리를 전전하며,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해 급하게 남자친구를 만들며, 남편의 가정을 깨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섹스를 유도한다. 이런 젬마에게 사이먼은 '불쌍하군 혹은 비참하군(pathetic)'이라고 말한다.  젬마에 대한 증오로 끝까지 젬마를 비참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하지만 지선우는 시청자에게는 불쌍할망정, 극중 모든 남자들에게는 여전히 사랑받는 여자로 남는다. 김윤기도, 이태오도 지선우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지선우는 남자들의 사랑을 얻었다. 이 점이 지선우가 메디아인 젬마 캐릭터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러나 결국 자식을 잃는 것은 똑같다. 완벽한 여자이자 사랑받는 여자인 지선우가 가지지 못한 유일한 것은 엄마라는 역할 같다. <부부의 세계>는 제목과 달리 ‘부모의 세계’가 더욱 중요한 작품이다. 원작에서도 젬마의 집착적 복수로 인해 아들이 어떻게 망가져 가는가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한국 드라마 속 아들 이준영(전진서 분)은 '완벽한 엄마'로 인해 망가져 간다. 지선우는 아들만을 생각하는 헌신적 엄마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실상 지선우는 아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끌고 가지 못한다.

지선우는 아들의 성적과 학원 걱정만 하고, 김윤기가 아들을 위해 시간을 가지라고 했을 때도, 돈이 있어야 아들을 제대로 키울 수 있다면서, 직장 생활을 우선시한다. 지선우가 아무리 '아들, 아들' 해도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지선우의 아들 사랑은 JTBC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나오는 엄마들의 목적론적 사랑에 맞닿아 있다. 지선우는 고산을 떠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할 때, 모든 것을 준영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하면서(사실 이 장면도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이라기보다, 복잡한 문제의 결정을 아들에게 책임 전가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정작 준영이가 해강과 문제를 일으켰을 때는 학교폭력위원회로 문제가 넘어가는 것을 막겠다는 일념 하나로 ‘아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해강 부모님 앞에서 일방적으로 무릎을 꿇어 준영을 부끄럽게 한다. 이 장면에서 불륜녀 여다경(한소희 분)이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지선우는 세상 불쌍한 ‘여자’가 되었지만, 준영에게는 세상 끔찍한 ‘엄마’가 되었다.

지선우는 사랑받는 여자이지만, 실패한 엄마이다. 이 모든 것은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에서 비롯되었다. ‘남편의 불륜-비참한 이혼-조강지처의 각성-조강지처의 통쾌한 복수’로 이어져야 하는 한국 불륜 드라마에서 조강지처가 이혼의 과정에서 느낀 여자로서의 절망감을 보상하기 위해 조강지처는 능력 있는 연하남을 만나 미모를 회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혼 이후의 생활 속에서 청소년 자녀들이 겪는 혼란과 문제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한국 드라마에서 청소년의 문제는 여전히 교육열 과잉의 부모와의 불화 정도로만 다루어지는 것 같다. (특히 JTBC는 교육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스카이 캐슬> 외에도, 학원물 <열여덟의 사랑>에서도 갈등의 핵심을 교육으로 잡았다.) 그렇기 때문인지 불륜 드라마의 사랑받는 여자의 클리셰를 수행하는 지선우 캐릭터는 현명한 엄마로서 아들을 대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아들이 대화를 하려고 다가와도 학원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서 아들이 마음의 문을 닫게 한다. (어쩌면 이게 한국의 현실 속 중2 부모의 실제 모습일 수도 있겠다.)

<부부의 세계>는 원작의 메디아 캐릭터를 벗어나서, 한국적 정서에 맞춰 사랑받는 여자,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로 지선우를 재정립하였지만, ‘아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제를 이해하는 폭이 좁다. 자녀와의 대화는 교육 문제에 한정되고, 자녀를 위한다는 행동은 자녀의 일탈과 반항에도 무조건 희생하고 헌신하는 구세대적 어머니의 모습에 멈춰 있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드라마가 만들어 놓은 전형적인 클리셰의 단순한 반복이 아닐까, 라는 의문도 든다.

 

3. 여성혐오의 이야기: 사랑을 얻고, 친구를 잃었네

다시 원작의 의도로 돌아가 보자. 원작 작가 마이크 바틀렛은 앞선 인터뷰에서 <닥터 포스터>의 젬마를 메디아 캐릭터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작가가 메디아 캐릭터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 핵심은 바로, ‘광녀(mad women)와 마녀(witches)에 대한 여성혐오자(misogynist)의 생각을 업데이트’하고 싶었다는 데에 있다.

<닥터 포스터>는 우선 마녀로 알려진 메디아인 젬마의 내면에 공감하며 그녀의 복수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자신을 배신한 남자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그 부정적 에너지가 계속될 동안 이어지는 집착, 그로 인한 자신의 파괴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아들의 파탄을, 괴물처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완벽주의자이자 경쟁심이 강한 한 인간의 내면적 결함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메디아인 젬마는 일상 속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는 인간일 뿐이다.

더 나아가 젬마는 그런 성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웃과 친구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처음에는 젬마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던 애나도, 젬마가 이혼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결국 젬마를 이해하고 돕는다. 젬마에게 사이먼의 외도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동료 여의사도 젬마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가식 없는 수다를 떨며 진심으로 소통하고 교류한다. 결정적으로 아들 톰이 엇나가기 시작했을 때, 톰의 상태를 알려준 것은 새로 온 동료 의사 시안이다. 시안과 젬마는 처음에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안 또한 이혼을 하였다는 사실, 젬마가 톰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는다. 젬마는 사이먼이 돌아와도 지역 사회에서 배척당하거나, 홀로 고립되지 않는다.

<부부의 세계> 속 지선우는 언제나 혼자다. 그리고 언제나 적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남편 이태오도 있지만, 이혼녀를 둘러싼 지역 사회의 궂은 소문들도 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한국판 드라마는 굳이 ‘여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지선우를 괴롭힌다. 지선우는 이태오에게 복수하기 위해 여다경이 속해 있는 여우회에 애를 써서 들어가지만, 사실 여우회는 지선우에게 어떤 복수의 기회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여다경의 배포를 보여준다. 그리고 총을 든 전사 지선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기도 하였다.) 여우회는 지선우를 공격하는 온갖 소문들을 물어다 나르는 역할만 한다. 여우회는 남편과 권력 있는 아버지라는 배경을 가진 여다경과 아무 것도 없는 지선우의 대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근본을 파고들면, 남편 있는 여자와 남편 없는 여자와의 대립 구도가 기저에 깔려 있다. 남편 있는 여자들의 텃세와 거기에서 희생당하는 싱글녀와 이혼녀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우회의 보수적인 세계에서 배제당하는 싱글녀와 이혼녀는 그렇다면 함께 나아갈 수 있는가. 아니다. 직장 동료 설명숙(채국희 분)은 처음부터 지선우를 질투하고, 부원장 직을 놓고 지선우와 대립한다. 이웃 고예림(박선영 분)은 자신의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한 지선우를 증오한다. 병원 원장의 아내는 늦은 시간에 자기 남편과 이혼녀 지선우가 단둘이 술을 마셨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며 지선우를 공격한다. 지선우를 둘러 싼 여자들은 모두 지선우의 적일뿐이다. 지선우를 질투하고, 그녀의 몰락을 즐긴다.

이후에 설명숙과 고예림이 지선우와 함께 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것이 설명숙과 고예림이 자신이 원했던 것을 모두 잃은 뒤라는 점, 즉 설명숙은 부원장 직을 얻지 못할 거라는 현실에 직시하고, 고예림은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한 이후라는 점, 소위 정상적이라 불리는 지역 사회 관계망 속에서 밀려 났을 때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는 결국 여성들의 연대는 무언가를 박탈당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특히 싱글녀 설명숙은 권력이 있는 남편을 가진 여자들과만 친하다. 물론 그녀의 이런 행동 방식은 생존의 문제로 설명된다. 결혼 안 한 여자는 부원장이 될 수 없다는 원장의 보수적인 한 마디에, 설명숙은 여성비하를 하지 말라는 사이다 발언을 하며, 남편과 자식이 없기 때문에 싱글녀는 돈을 더 벌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설명숙의 이런 진취적 발언이 그간 설명숙 캐릭터가 행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상황에 맞춰 행동하고 발언하는 인물형일 뿐이다.

그렇다면 <부부의 세계>는 모든 남성의 사랑을 받는 지선우가 모든 여성들에게 공격 받는 드라마가 된다. 전형적인 여성 혐오의 세계이지 않은가. 현재 로맨스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여성 혐오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기 위해 진보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하지만 ‘명품’을 내세운 한국 불륜 드라마의 문법 속에서는 여전히 남성의 보호를 받는 여성, 여성을 공격하는 여성에 대한 클리셰가 잔존한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맞춰 불쑥 불쑥 여성의 카리스마, 여성비하에 대한 사이다 발언, 남성들의 이기심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다. 이것이 서사에 잘 녹아들고 있지 않아서 어색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연애’를 그린 로맨스에서는 남녀 관계의 진취적 변화가 잘 그려지지만, ‘가정’을 그린 불륜 드라마에서는 아직 그게 어려운 지도 모르겠다.

마녀 메디아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통해 여성의 우정과 연대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는 한국 속 <부부의 세계>로 정착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그리고 무엇을 얻었는가. 한국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는 영국 원작 속 메디아의 현대적 재해석, 한국 불륜 드라마의 클리셰, 페미니즘 리부트로 변화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현실 등이 불완전하게 결합되어 공존하고 있다. 이 불편한 공존 속에서 시청자들은 공감하며, 욕을 하며, 뜨겁게 호응하고 있다. 이 호응은 아마도 이 드라마의 전형성이 주는 익숙함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이 드라마가 던져 놓은 문제적 캐릭터들의 균열적 세계가 제공하는 논란에 대한 집중이 아닐까 한다. 이 불편한 드라마에 대한 논란과 논쟁이 바로 한국의 현재와 현실을 적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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