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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지의 문화톡톡] 1일1깡의 세계가 말해주는 것
[이은지의 문화톡톡] 1일1깡의 세계가 말해주는 것
  • 이은지(문화평론가)
  • 승인 2020.06.01 09: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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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깡팸이 될 수 있다

가수 비가 2017년에 발표한 노래 <깡>이 얼마 전부터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뮤직비디오가 노출되어서다. 그러나 이 관심은 긍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조롱이나 비아냥에 가까운 것이었다. 허세 가득한 노랫말과 우스꽝스러운 안무는 웃음거리가 되기에 충분해 보였고, 사람들은 노래에 대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롱하는 댓글을 투척하였다. ‘옆에서 조언해주는 사람이 없는 게 신기’, ‘만렙 찍었는데 세이브 안한 느낌’, ‘몇년만 일찍 발표했어도 김태희와 결혼 못했을 듯’ 등등, 간결하게 정리된 ‘현웃’ 터지는 댓글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점차 더 많은 이들이 <깡>의 뮤직비디오를 보러 몰려들기 시작했다.

 

〈깡〉 뮤직비디오. 출처: 유튜브
〈깡〉 뮤직비디오. 출처: 유튜브

누군가는 <깡>의 안무를 커버한 영상을 올리고, 다른 누군가는 아예 레전드 댓글만 추출하여 <깡>의 무대 영상에 오버랩한 영상을 몇 회에 걸쳐 올리기도 했다. 메이저 기획사의 품을 떠나 직접 프로듀싱하면서 대중의 안목을 파악하지 못하고 허우적거린 결과물을 향한 창조적인 조롱들은 어느새 그저 웃고 즐기는 놀이가 되어버렸다. ‘이념대립도 성별대립도 없는 이곳이 유토피아’라는 어느 댓글이 말해주듯이 <깡>을 놀리며 노는 이들의 거대한 물결은 오직 유머와 놀이만이 지배하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1일1깡을 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깡팸이고 깡토피아에 입성할 수 있다!

일종의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좋을 깡토피아는 창작자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수용자가 노래를 소비하는 방식과 방향으로 노래의 성격이 재규정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디지털 미학이 추구하는 상호작용성의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인터넷이 발명된 직후에 대두되었던 것은 하이퍼링크를 활용한 텍스트나 익명의 다수가 참여하는 공동창작 등, 수용자의 능동적 참여를 적극 활용하는 디지털 문학에 대한 기대였다. 이러한 기대는 오래지 않아 수그러들었는데, 수용자가 언제나 능동적이고 창조적일 것이라는 잘못된 전망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수용자의 능동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장치들 또한 창조적인 즐거움으로 이어지기보다는 피로감을 불러일으키기 일쑤였다.

수용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상호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정보를 습득하고 이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며 관조하는 수동적 수용의 과정에 있다. 작품과 충분히 거리를 둘 수 있는 이러한 수동성이 전제되었을 때에야 수용자는 자신의 관점에서 작품에 참여할 여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즉 상호작용에 대한 유도가 부재해야만 수용자는 비로소 능동적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깡> 현상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비의 <깡>은 한때 가요계의 정상까지 올랐었던 자신에 대한 도취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진 노래다. 자신의 멋짐에 집중하느라 그것이 외부에 어떻게 비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자신에게 과도하게 몰두하는 이 노래의 꽉 닫힌 만듦새는 역설적으로 수용자들이 이를 관조하고 냉정하게 품평할 수 있게 하였고, 저마다 더 참신하고 더 센스 넘치게 평가하는 데 몰두하게 하였다.

 

상호작용의 매개로서의 플랫폼

그러나 <깡> 현상은 어디까지나 유튜브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일단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수에게 노출된 영상이나 자신이 시청한 것과 유사한 영상을 자동으로 추천하는 시스템 덕분에 <깡>은 더 쉽고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또한 해당 영상에 대한 2차 창작물을 제작하고 업로드하는데도 제약이 없다. 우리는 <깡> 현상의 중심에 <깡>이라는 노래가 아니라 유튜브라는 매체를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작품에 대한 수용자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창작자의 의도된 장치가 아니라, 창작자와 수용자를 결집하고 매개하는 플랫폼이다.

전문 플랫폼을 통해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웹소설의 경우 이는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웹소설은 초기의 일정 분량을 무료로 연재하는 동안 독자들의 반응을 십분 끌어올려야만 후반부의 유료 연재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특성상 웹소설의 작가들은 서사의 방향이나 완급조절, 캐릭터나 사건의 개연성 등 작품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철저히 독자의 흥미와 주목도에 따라 작품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는 이러한 구조는 일견 혹독하게 여겨지긴 하지만, 해당 장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독자들이 습득해온 미적 판단력을 작가가 학습하고 작품에 반영하는 등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엽편소설집을 여러 권 출간한 김동식 작가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2018년 첫 소설집 『회색인간』 출간 당시 그의 이력은 여러 언론에서 화제가 되었다. 등단은 고사하고 문학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그는 낮 동안에 주물공장에서 일하며 머릿속으로 떠올린 이야기들을 밤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고, 독자들의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독자들은 맞춤법이나 이야기 구성 등에 대한 조언을 댓글로 달았고 작가는 이를 반영하여 이야기를 고쳐나갔다. 그렇게 축적된 수백 편의 이야기는 작품집으로 엮여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김동식 소설 〈회색인간〉. 출처 : 예스24
김동식 소설 〈회색인간〉. 출처 : 예스24

위의 사례들에 공통되는 것은 수용자가 작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만 결코 그것이 필수적으로 요청되거나 강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에 댓글을 달지 그냥 지나칠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다. 웹소설 플랫폼의 독자들은 자신이 정주행하는 작품에 대해 원하는 경우에 한해 자발적으로 피드백을 올린다. 독자의 호응이 곧 검증 기준이 되는 웹소설의 특성상 처음부터 매끄럽게 완결된 작품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은 자신이 즐겨 읽는 작품의 부족한 부분이 개선되기를 바라거나, 장기간의 연재에 지쳐 일정한 기량으로 창작하기 어려운 작가의 기를 북돋우기 위해 댓글을 달기도 한다. 만일 플랫폼이 독자의 피드백을 필수적인 사항으로 강제한다면 이러한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는 불가능할 것이다.

 

참여 혹은 간섭 그 사이에서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등 대중문화의 경우에도 수용자들이 피드백을 보내며 그 형식이나 내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오늘날에만 관찰되는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과거에도 높은 시청률의 드라마를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해달라는 둥 시청자가 작가의 서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경우는 종종 있어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개입은 주로 수용자가 서사에 완전히 몰두한 상태로부터 제기되는 것이었던 반면, 최근에는 서사의 흐름이나 맥락을 고려하기보다는 수용자 자신의 개인적, 정치적 성향이 충족되지 않은 경우에 대해 제기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최근 수용자들의 개입이 문제적인 까닭은 그것이 관조가 아닌 감시의 성격을 강하게 띠기 때문이다. 창작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이란 어디까지나 작품을 매개로 영향력을 주고받는 것이다. 수용자의 능동성이 미더운 것으로 여겨질지라도 수용자가 창작자의 펜대까지 대신 쥐고 흔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앞서 언급했던 디지털 문학 사조가 저지른 실수를 거꾸로 반복하는 것과도 같다. 디지털 문학을 실험하면서 각종 장치를 통해 참여를 의도적으로 강제했을 때 오히려 수용자의 능동성은 저하되었다. 상호작용에 대한 유도를 포기해야만 수용자가 능동적일 수 있듯이, 창작자 또한 수용자의 간섭에 휘둘리도록 강제되지 않아야만 창조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깡토피아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조롱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신드롬이 되어 가수 비는 공중파 예능에까지 출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깡>에 대한 조롱-놀이에 흔쾌히 합류하며 이 놀이의 흐름을 가속화하였다. 그가 무수히 쏟아지는 댓글에 의기소침해져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댓글의 조언을 십분 받아들여 <깡>의 노랫말이나 안무를 송두리째 바꿔버렸다면 어땠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의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과 같은 현상이 똑같이 벌어지기보다는 흥미가 한풀 꺾였을지도 모른다.

여러 플랫폼을 중심으로 모두가 즐기고 참여하는 크고 작은 축제는 앞으로도 언제든지 불쑥 출연할 수 있다. 축제가 축제일 수 있기 위해 모두에게 요청되는 것은 사안을 관조할 수 있는 일정한 거리 내지 여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가수 비가 자신을 조롱하는 모두를 향해 의연하게 보여준 보살 같은 관대함은 그러한 관조의 한 모습이지 않을까? 창작자와 수용자 간의 상호작용을 작동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동인으로서의 ‘자율성’은 플랫폼이건, 예술작품이건, 대중문화이건 간에 일관되게 요청되는 미덕이자 에티켓으로서 존중되어야 한다.

 

글 : 이은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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