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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가 마주친 딜레마
시리아가 마주친 딜레마
  • 패트릭 실
  • 승인 2011.05.09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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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가 추락한 뒤 튀니지는 숱한 도전에 나서고 있는 반면, 시리아의 수많은 도시에서는 지난 4월부터 권력 퇴진을 요구하는 거대한 자유의 함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1970년 자신의 아버지가 만들어낸 체제의 생존과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다. 알아사드의 최후 결정은 내려졌을까? 데라(시리아의 남서부 도시)와 다른 도시들에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체제가 폭력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원문 보기>>

“소요는 없다”던 젊은 독재자의 발포 명령
외부의 위협과 지역의 위기에 신경을 쏟았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가 다른 나라들을 휩쓸어버린 파도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난 1월 31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집트와 시리아를 비교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당신은 관점을 바꿔야 한다. 우리가 더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는데도 안정된 이유를 자문해봐야 한다. 이집트가 재정적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면, 우리는 대부분의 나라들과 단절된 봉쇄 상태에 처해 있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 국민은 봉기를 일으키지 않는다. 봉기가 필수품이나 개혁과 관계된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옹호하는 이데올로기, 신념, 대의와 관계됐다. 대의를 지킨다는 사실과 이데올로기적 진공상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시리아 사람들은 임의 체포와 경찰 폭력의 종결, 정치범 석방, 언론 자유, 바스당이 ‘국가와 사회를 지도한다’고 규정한 헌법 8조의 폐지, 바스당이 권력을 차지한 1963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다.

모든 것은 남서부 도시 데라에서 시작됐는데, 요르단과의 국경 근처에 있다. 지난 3월 어린이 12여 명이 체제에 반대하는 낙서를 해 체포됐을 때, 소요가 발생했다. 격분한 주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이 나라에 대한 가장 정확한 외국인 관찰자 가운데 한 명인 조슈아 랜디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데라는 이슬람 수니파가 거주하는 가난한 도시다. 데라는 경제 파산, 인구 폭발, 악질 주지사와 보안군의 압제 등 시리아에서 드러나는 모든 문제를 모아놓은 곳이다.”(1) 보안군의 치명적인 실수는 군중에게 실탄을 발사한 것이었다.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알아사드는 아랍의 전통적 독재자들과는 달라 보였다. 45살인 그는 겸손해 보였고, 권력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의 오만한 태도를 드러내지 않았다. 1994년 그가 런던에서 안과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의 지명 후계자인 장남 바셀이 갑작스럽게 숨지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정치판에 내던져졌다. 최근의 대량학살이 벌어지기 전까지 많은 시리아 사람들은 그를 개혁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필요한 변화를 가장 잘 이끌어갈 사람으로, 교육받은 현대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며 계속 지지했다.

6년 뒤인 2000년 그가 아버지 뒤를 계승했을 때, 시리아는 더욱 세계화되고 기술적으로 진보된 세상과 단절되고 지체됐다. 2004년 민간은행과 민간보험사가 처음 허용됐고, 5년 뒤인 2009년 3월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그는 현재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협상하고 있다. 권력은 휴대전화와 인터넷도 도입했다. 그는 수많은 인프라 시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학교와 사립대학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부분적 서구화로 되레 빈곤 심화

▲ <오리엔탈의 장> 연작, 2008-알리 하산
그런데 이런 개혁들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실업률을 증가시켰다.(2) 부패가 튀니지나 이집트에 비해 훨씬 심했다. 주민의 3분의 1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동시에 이미 한계에 이른 석유 매장량이 완전히 바닥났고, 몇 해째 가뭄을 겪으면서 밀 수입국이 되었다.

대통령은 터키와 정치·경제 동맹을 맺었고, 두 나라 사이에 비자가 면제됐다. 이 동맹은 국경 지역의 무역을 용이하게 했고, 북부의 주도인 알렙에도 많은 이익이 되었다. 오래된 도시 다마스쿠스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낡은 집들이 수리됐으며, 엄청난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수많은 식당과 호텔이 문을 열었다.

화려한 장면 위의 불길한 구름처럼, 1982년 하마(수도 다마스쿠스 위쪽에 위치한 도시)에서 발생한 대량학살에 대한 기억이 떠다니고 있다. 당시 하페즈 알아사드는 이슬람형제단의 무장폭동을 유혈로 진압했다. 이슬람형제단은 1977년 자신의 지지자들을 희생해가면서 체제에 대항해 일련의 테러공격을 감행했다. 이 그룹은 국가의 중앙에 위치한 하마라는 도시를 장악해 바스당 당원들과 정부 공무원들을 학살했다. 정부는 무자비하게 응수했다. 그 대가로 도시는 군대의 폭격을 받았으며, 수많은 주민이 살해됐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 수 없지만 1만∼2만 명으로 추산된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상당수 이슬람주의자들이 보복을 꿈꾸고 있다. 소수이면서도 권력의 지렛대를 쥔 알라위트파(시아파의 분파)는 체제가 무너지면 대량학살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종교 간 긴장은 자유에 대한 요구를 피로 물들일 수 있다.

30년 전 유혈 사태… 불씨 여전
시위자들은 정치적으로 조직화돼 있지 않고, 어떤 시위 지도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랍의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지난 수십 년의 억압 때문에 현장에는 조직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시민단체’가 몇 명의 개인으로 축소돼버렸기 때문에 누가 반대자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수니파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이지만, 드루즈족·쿠르드족뿐만 아니라 소수파이지만 상당수인 알라위트 신도(12~15%), 기독교 신도(10%)로 나뉜 이 국가에서 특정 그룹을 구별해내기는 쉽지 않다.(3) 이슬람 세력이 강력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래서 대통령도 나름의 방식으로 그 점을 인정했다. 수니파 종교인들과 회합한 뒤 니캅(눈을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는 천) 착용 때문에 축출된 여교사 1천 명이 일자리에 복귀하는 것과, 하나뿐인 카지노를 폐쇄하는 조처가 처음의 개혁안에 포함됐다. 이슬람형제단은 약화됐지만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사람들은 시위대 속에서 알라위트 신도, 몇몇 소수파, 특히 기독교 신도를 겨냥한 수많은 구호를 듣고 있다. 정권은 이런 두려움을 마음껏 이용하고 있다.

지난 3월 30일과 4월 16일 두 번의 담화에서 알아사드 대통령은 비상계엄 해제를 포함한 일련의 개혁안(정당, 언론 등에 관한 새로운 법)을 발표했다. 그러나 보안군이 계속 시민들에게 총을 발사해 이런 조처의 효과가 퇴색돼버렸다. 데라에 군대가 진입한 사실과 그 도시에서 저지른 대량학살에 대한 단편적 정보로 볼 때, 정권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고, 폭력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삼은 것 같다.

여러 해 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무감각해져 더욱 권위적인 존재가 되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가족, 특히 이동통신사를 통제하는 사촌 라미 마클루프를 통하거나 자신의 심복들을 통해 대학이나 경제뿐 아니라 미디어 등 모든 사회 부문을 통제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바스당은 서민층의 의견을 지도층에게 전달하는 대중의 참여 시스템이 되기는커녕 단순한 동원 기구가 돼버렸고, 충성파에게 보상을 내리고 반대파를 처벌하는 수단이 돼버렸다. 표현의 자유는 사라졌다. 정치적 결정은 대통령과 보안대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그룹의 전유물이 돼버렸다.(4) 게다가 알아사드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강요당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고 압력에 굴하는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일가·수하들의 축재와 전제
그가 자신의 체제를 개혁하려면 대가족의 이익, 보안대와 군대 수장들의 이익, 특히 대통령 수비대 사령관이자 체제의 강경한 인사인 동생 마헤르의 이익, 알라위트파 공동체 강자들의 이익, 권력과 가까운 다마스쿠스의 부유한 수니파 상인들의 이익을 저버려야 한다. 수적으로는 얼마 안 되지만, 강력해진 신흥 부르주아가 국가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이행하는 동안 부를 쌓게 되었는데, 이들 역시 대통령을 믿고 있다. 경찰과 보안대를 통해 사용했던 잔인한 방법을 포기할 의지가 그에게 있을까? 시리아 같은 국가에서 전제정치는 뿌리가 깊기 때문에, 반세기 전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지속된 이런 습관을 고치기는 힘들 것이다.

시리아 체제는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에 존재하는 적들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 적들에는 런던·파리·워싱턴에 거주하는 시리아 망명조직들도 포함된다. 많은 망명조직들이 미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하고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4월 17일 발표한 외교 전문에 따르면, 미 국무부가 시리아 반체제 인사들에게, 특히 런던 조직에 2005∼2010년 1200만 달러를 비밀리에 지원했다.

아들의 체제는 아버지 체제의 연장선 위에 있다. 하페즈 알아사드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쳤던 고관이나 부통령 압델 하림 카담이 아닌 바샤르를 선택하면서, 강력한 대통령에게 의존하는 중앙집권적 전제체제뿐 아니라 오랫동안 시리아 정치 전반을 결정지은 지역적·국제적 무대에서의 동맹군과 적군도 동시에 물려주었다. 중요한 내부 개혁들을 구상하고 시행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요구하는 것처럼, 우선 당면 과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함을 뜻한다. 알아사드 부자에게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외교정책은 그들의 에너지를 모두 빼앗아갈 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미국 도발 맞서 벅찬 대결
하페즈와 그 아들의 행로는 이스라엘과의 갈등에 의해 구조화됐다. 시리아는 적대적 근동의 환경에서 투쟁하고 생존해야 했다. 적대적 환경은 1967년 6월 전쟁이 발발했을 때 텔아비브가 골란고원을 포함한 광대한 시리아 영토를 점령하고, 더불어 미국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조성됐다. 이렇게 미국·이스라엘의 헤게모니가 그 지역에 자리잡았고, 그때부터 시리아는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포괄적 평화를 달성할 목적으로 카이로와 다마스쿠스가 일으킨 1973년의 전쟁은 처음에는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집트가 전투에서 발을 빼고 이스라엘과 단독 평화협정을 체결해버렸다. 그 결과 그 지역은 더욱더 이스라엘의 영향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시리아는 이란의 새로운 이슬람공화국과 협력 관계를 맺었다. 1982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파괴하고 ‘삼나무의 나라’(레바논)를 자신의 영향권 안에 집어넣을 목적으로 레바논을 침공한 뒤부터 다마스쿠스는 남부의 시아파 저항단체와 동맹을 맺었다. 이란과 시리아의 병참과 군사 지원을 받으면서 게릴라 투쟁을 벌이던 헤즈볼라가 18년간 점령당한 뒤, 2000년 5월 이스라엘군을 축출하고 그 지역을 해방시켰다. 이렇게 하여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 지역 주요 라이벌인 다마스쿠스-테헤란-헤즈볼라-하마스를 연결하는 축이 강화됐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 축을 파괴하고 이들이 억제 능력을 갖지 못하게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란은 핵 프로그램 때문에 여러 가지 제재와 군사적 위협을 받았고, 이에 대처해야 했다. 헤즈볼라는 2006년 7~8월의 전쟁을 포함해 이스라엘의 다양한 위협에 견뎌야 했다. 시리아는 협박받았고 고립됐고 미국의 제재를 받았으며, 2007년 9월 핵 시설 은닉 장소로 간주된 곳에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다.

국민의 요구는 정당하다
알아사드 대통령에게 이런 일들은 어려운 실습 과정이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여러 위기들을 해결해야 했다. 그가 국가의 안정과 안전을 어느 정도 획득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거만해질 수도 있었다. 파괴적 전쟁의 운명을 맞이한 레바논이나 이란 시민들과 비교할 때, 시리아 시민들은 자신의 운명에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4월 25일 국영 일간지 <티시린>은 “가장 멋진 형태의 자유는 조국의 안전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선언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진실 보도, 팔레스타인 지지, 미국의 간섭에 대한 반대로 유명한 일간지 <알쿠드스>의 편집장 압델바리 아트완이 지난 3월 27일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아랍의 모든 중요 국가들이 문전박대한 팔레스타인 기구(특히 하마스)의 사무총장을 환대하고 레바논 저항단체(헤즈볼라)와 연대를 맺은 것은, 시리아가 그것 때문에 상당한 대가를 치렀지만, 우리도 기꺼이 동조할 수 있는 바람직한 태도이다. 이런 태도들과 시리아 국민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다. 행여나 어떤 모순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시리아가 팔레스타인 국민과 그 대의에 대한 지지를 잠시 유예한 채, 자유를 확대하고 부패와 전쟁을 하라는 시리아 국민의 요구에 응답할 것을 더 바란다. (중략) 왜냐하면 억압받은 국민은 점령당한 영토를 해방시킬 수 없으며, 독재자의 군대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글 · 패트릭 실 Patrick Seale
주요 저서로 <시리아를 위한 투쟁>(옥스퍼드대학 출판사·1965), <아사드: 중동을 위한 투쟁>(캘리포니아대학 출판사·버클리·1989), <아랍 독립을 위한 투쟁: 리아드 엘-솔 초대 대통령과 현대 중동의 창시자들>(케임브리지대학 출판사), 프랑스판 <아랍 독립을 위한 투쟁>(파야르·파리·2010) 등이 있다.

번역 · 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각주>
(1) 그의 블로그 ‘시리아 논평’, ‘데라, 정부가 포기하다: 15명 사망’, 2011년 3월 23일 참조.
(2) 사미르 에타, <불법 아랍 노동자>, 라르마탱, 파리, 2011.
(3) 수십만 명의 쿠르드족은 국적을 빼앗겼다. 2004년 알아사드 대통령은 국적을 되돌려주기로 약속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이 약속은 최근 위기가 발생한 시점에 되풀이됐다.
(4) 주디트 카앵, ‘다마스의 봄에 대한 환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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