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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믿음 천국, <불신지옥>
[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믿음 천국, <불신지옥>
  • 김경욱(영화평론가)
  • 승인 2020.08.24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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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의 데뷔작 <불신지옥>(2009)은 제목만으로도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나는 ‘공포영화’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희진(남상미)은 사라진 동생 소진을 찾아 집이 있는 지방의 아파트로 내려온다. 희진의 아버지는 2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소진은 중상을 입었지만 갑자기 살아났다. 그러자 희진의 엄마는 기적이 일어났다며 기독교에 광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소진의 실종은 단순한 가출사건 같았지만, 같은 아파트 307호에 사는 정미가 ‘소진아, 미안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고, 소진을 봤다던 아파트 경비원 귀갑이 잇달아 자살하면서 기이한 사건이 되어간다. 무당인 경자와 1307호에 사는 수경의 진술에 의하면, 살아난 소진은 ‘신들린’ 상태였다. 엄마의 기독교 신앙의 결과가 아이러니하게도 소진의 신들림이라는 무속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와 무속의 대결 구도를 만들어놓은 다음, 이야기는 일종의 연쇄살인극으로 진행된다. 정미, 귀갑, 수경, 경자가 신들린 소진에게 기적을 행하도록 강요하고 괴롭혔는데, 소진의 예언대로 그들이 차례로 죽어나가게 된 것이다. 여기에 희진이 신들렸음을 암시하는 장면들(다시 말해서 범인을 찾아 헤맨 장본인이 범인이라는 설정의 변주)이 추가되면서 공포 분위기는 매우 효과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또 <불신지옥>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이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아파트, 그러나 이중 삼중의 자물쇠를 채울 수밖에 없는 불신의 공간으로서의 아파트, (한국사람 이라면) 누구나 살고 싶어 하지만 매우 비인간적인 아파트가 공포로 다가온다. 이 때 신들린 소진이 수경의 아파트 유리창에 나타나거나 희진의 아파트 창문을 누군가 들여다보는 장면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파트 공간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던 영화는 희진을 따라 지하실로 하강한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손꼽을만한 지하실의 추적 장면이다. 빛과 어둠 그리고 미세한 음향효과만으로 공포를 극대화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지하실의 추적으로 경찰에 체포된 무당까지 결국 죽고 나면, ‘이제 남은 사람은 누구지?’라는 의문이 떠오르기도 전에 형사 태환은 기도하러 교회에 갔다던 엄마가 희진의 아파트에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니까 핵심적인 인물들 주변을 빙빙 돌던 영화는 이제 곧장 희진과 소진 그리고 엄마에게로 향한다. 엄마가 아파트 옥상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지하실로 하강했던 카메라는 하늘로 상승한다. 그곳에서 희진은 엄마와 죽은 소진을 마주하게 된다. 무당/무속의 어두컴컴한 지하실 공간과 엄마/기독교의 밝은 하늘의 공간의 대립, 또는 믿지 않는 자/희진과 믿는 자/엄마의 대결. 이 마지막 장면을 위해 엄마는 사건의 중심인물이면서도 계속해서 사건으로부터 빠져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 영화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그런 조짐은 이미 앞에서부터 포석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희진의 엄마 같은 광신도라면 딸의 신들림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안수기도부터 시작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웬일인지 엄마는 소진이 성령을 입었다고 해석하고, 무속과 기독교의 대립은 사라진다. 이 사실을 엄마가 다니던 첨곡교회목사가 알려줄 때, 기복신앙에 경도된 한국 기독교의 (부분적인) 병폐는 단지 엄마 개인의 신앙 문제로 축소된다.

아파트 옥상에서 엄마는 희진에게 말한다. 소진이가 “언니가 오면 깨워 달라”고 그랬다고. 그런데 소진은 정확하게 언제 죽은 것일까? 무당과 나머지 인물들의 괴롭힘 때문에 죽은 것일까? 아니면 엄마가 바로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방치했기 때문에 죽은 것일까? 엄마는 희진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왜 바로 소진에게 데려가지 않은 것일까? 아무튼 엄마는 계속해서 말한다. “소진이 재림한 구세주이며 다시 부활할 때 세상이 끝나고 들림이 시작될 거”라고. 희진은 엄마의 말을 모두 부인한다. 이 때 신들린 상태였던 그녀는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온 것일까? (소진과 형사의 딸의 신들림이 기복신앙의 결과라면 희진의 신들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희진이 전혀 믿지를 않자 엄마는 허공으로 발을 내딛는다. 엄마는 희진에게 “믿는다면 손을 놓으라”고 말한다. 이제 정말 마지막 시험이다. 손을 놓을 것인지 말 것인지, 믿음천국과 불신지옥의 내기에서, 영화는 정면승부를 피하고 얼버무린다. 두 사람은 옥상에서 떨어지는데, 엄마가 희진을 끝까지 안고 있는 바람에, 갑작스런 지극한 모성애로 인해 희진은 결국 죽지 않는다.

공포영화에서 공격당하는 희생자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는 가해자/괴물이다. <불신지옥>에서 괴물은 엄마의 신앙인가? 아니면 엄마의 모성애인가? 아니면 소진의 신들림인가? 영화는 이 모든 요소들이 괴물이라고 전시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사실은 모두 아니라고 부인해버린다. 이것이 히치콕적인 맥거핀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다음 기복신앙 자체가 괴물이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사실은 있어도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죽어가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단순히 기도만 했는데(아이의 목숨을 놓고 어떤 위험한 거래를 한 게 아니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신들렸기 때문에 살아났다는 얘기로 기복신앙의 괴물성을 말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한 사회가 억압한 것이 귀환할 때, 공포영화는 흥미진진해 진다. 공포영화 장르의 전복적인 속성을 빌리면, 한 사회의 금기를 검열의 그물망을 피하며 보란 듯이 드러낼 수도 있다. 또는 피터 잭슨이나 샘 레이미의 공포영화처럼, 사지절단의 극한을 시각적으로 전시해 볼 수도 있다. <불신지옥>은 한국사회의 논쟁적인 소재로 흥미를 끌고 난 다음 쟁점 자체를 스스로 지워버리면서 이도저도 아닌 지점에서 멈춰버렸다. 끝까지 밀고 나갔다면 어땠을까? 지금 다시 봐도 아쉬운 대목이다.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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