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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김주열, 죽은 채로 발견되다
17살 김주열, 죽은 채로 발견되다
  • 신다임, 안치용 기자
  • 승인 2020.11.24 14: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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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⑤ 1960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오른 김주열

1960315, 청년이 죽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타지로 간 아들이 하루아침에 연락이 끊겼다. 전라북도 남원에서 한달음에 경상남도 마산으로 달려간 어머니는 아들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그 소식은 언론을 타고 전국에 퍼졌다. 한 달 가까이 찾아다녔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하는 수 없이 어머니가 귀향하던 그 시간에 아들이 나타났다. 죽은 채로.

어머니가 애타게 찾아 헤맨 아들은 1960411일 경상남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실종된 지 27일 만이었다.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한 달 동안 어머니가 마산을 떠돌며 아들을 찾아다녔기에 많은 마산 시민이 아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김주열이었다.

 

김주열 의사의 생가와 가족 모습/ 3.15의거기념사업회
김주열 의사의 생가와 가족 모습 / 3.15의거기념사업회

 

주열은 1944107일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에서 태어났다. 성격이 온순하여 공부와 일밖에 몰랐고 친구들이 싸움해도 참견할 줄 모르는 무던한 아이였다. 아버지 김재계는 천석꾼의 부농이었지만 병환이 깊어져 가세가 기울었다. 주열은 기울어진 가세를 일으키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은행원이 되기 위해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지원했다.

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합격자 발표일은 원래 1960314일이었다. 주열은 형과 함께 마산으로 향했고 공고한 발표일인 14일엔 이미 마산에 도착해 이모할머니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1960315일 제4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염려한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하자 발표일이 16일로 연기되었다. 계획대로 합격자를 발표했다면 주열은 아마 15일 새벽에 마산을 출발해 고향 남원으로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315일의 선거는 부정과 비리, 억압으로 점철되었다.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을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3인조, 5인조의 공개투표가 실시됐다. 각 조의 조장은 자유당 후보를 찍도록 유도하고 기표를 확인했다. 민주당 지지자로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투표 통지표를 배부하지 않았다. 또 사전에 금전으로 매수하여 만든 기권과 자연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권 등을 모두 자유당을 지지한 것으로 만들어 미리 투표함에 넣어두었는데, 이게 대략 전체 유권자의 40%정도였다.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던 주열의 이모할머니는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자 종일 울분을 터트렸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 부정 선거가 들통났고, 분개한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에 와 주열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형제는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러나 형과 달리 주열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나이 17, 마산상업고등학교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둔 때였다.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시민들의 착잡한 표정-마산시민극장앞 가두/ 3.15의거기념사업회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시민들의 착잡한 표정-마산시민극장앞 가두 / 3.15의거기념사업회

 

대구 2·28, 분노의 불길이 시작되다

 

195911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장면이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15일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에 따라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없이 장면 부통령 후보만으로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을 자유당 후보로 정한 상황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공석이 되자 이승만은 사실상 대통령을 확정지었고, 따라서 장면과 이기붕 중 누가 부통령으로 당선되는가가 선거의 가장 큰 쟁점으로 바뀐다. 양 당에서는 각각 자기 당의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자유당 정권은 여당 후보의 선거운동에는 적극적으로 군중을 동원하고 야당 후보의 선거운동에는 방해공작을 펼쳤다. 자유당은 대구 유세 날인 1960227일 토요일에 청중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오후 1시로 예정된 자유당 유세 강연에 늦지 않도록 각 기관, 업소는 낮 12시까지 업무를 끝내야 했다. 반면 다음 날인 28일 일요일에 열리는 민주당 유세에는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청중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고자 하였다.

강구해낸 묘책은 일요등교령이었다.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가는 것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일요일에 각종 행사를 개최하거나 학생들을 등교시키라는 방침이 전달되었다. 경북고는 학기말시험, 대구고는 토끼사냥, 대구 상고는 졸업생 송별회, 경북대 사대부고는 임시수업 등의 명목으로 고교마다 빠짐없이 학생들에게 등교 지시가 내려졌다. 자유당 정권의 이와 같은 부당한 조치에 항거하여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궐기한 것이 바로 대구의 228 시위였다.

 

마산으로 불길이 번지다

 

대구에서 지핀 불길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번져갔다. 하지만 간헐적인 가두시위에도 불구하고 1960315일에 불법선거가 자행됐다. 선거 당일 아침, 마산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부정선거가 적발되었다. 성난 시민은 마산 시내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오전 1030, 민주당 마산시당은 자유당이 갖은 불법과 탈법 선거를 자행함에 따라 공명선거를 기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사태에 처하였음을 지적하며 전국 최초로 독자적인 선거포기를 선언하였다.

 

협잡선거 물리치자!”

 

오후 330분경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표어를 쓴 띠를 머리에 맨 채 거리에 뛰쳐나감으로써 마산 시위가 시작되었다. 오후 4시경 마산 시내 중심가에 1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시위행진에 돌입했다. 경찰과 녹색 제복을 입은 반공청년단원들이 학생과 시민들을 몽둥이로 무차별 폭행하자 1차 마산의거가 일어났다.

 

내 표를 내놔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시위대는 오후 7시 남성동 파출소를 포위하고 부정선거를 즉시 중지하라라고 외치며 돌을 던졌다. 1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개표장인 마산 시청으로 이동하면서 구호를 외치고 경찰과 대치했다.

밤이 되자 학생과 시민이 개표장인 시청에 모여들었다. 일부는 마산의 중심가였던 남성동 파출소로 향했다. 시위는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물을 뿌려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했고 시위대는 이에 대항하여 돌을 던졌다. 날아오는 돌에 놀란 소방차 운전수는 황급히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 바람에 소방차는 무학초등학교 앞 전신주를 들이받았다. ‘하는 굉음과 함께 정전이 되며 시내 전체가 어둠에 잠겼다. 오후 8시 무렵 경찰은 어둠 속에서 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자정 무렵까지 마산의 관공서, 경찰서 및 파출소, 자유당사 등을 습격하며 저항했다. 8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날 거리 곳곳에서 붉은 피를 흘린 사람 중에 주열이 있었다.

 

제1차 마산의거 당시 시위대와 경찰간의 투석전으로 어지럽혀진 마산시청 앞 광경/ 3.15의거기념사업회
제1차 마산의거 당시 시위대와 경찰간의 투석전으로 어지럽혀진 마산시청 앞 광경 / 3.15의거기념사업회

 

김주열이 돌아오다

 

1960411일 오전 1130, 마산 중앙 부두 앞바다에 시신 한 구가 떠올랐다. 오른쪽 눈에 박힌 쇠붙이가 머리를 관통한 처참한 모습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쇠붙이는 탄피가 알루미늄으로 된 직경 5cm, 길이 20cm 크기의 미제 고성능 최루탄으로 꼬리 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있고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겉면에는 Don't use on the crowd(군중을 향해 사용하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표기되어 있었다.

김주열이다!” 빡빡 깎은 머리, 시신 유기를 위해 몸에 묶은 돌. 모여 있던 사람들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봤다. 전술한 대로 한 달 동안 그의 어머니가 마산을 떠돌아다니며 아들을 찾아다녔기에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근처 다방에 있던 부산일보 허종 기자가 주열의 사진을 찍어 다음날인 12일 부산일보 1면에 대서특필했다. 이어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도 주열의 처참한 사진을 보도했다.

마산중앙부두앞에 떠오른 처참한 김주열 의사의 시신 광경 / 3.15의거기념사업회
마산중앙부두앞에 떠오른 처참한 김주열 의사의 시신 광경 / 3.15의거기념사업회

 

주열의 시신이 떠오르면서 무력진압으로 잠시 주춤했던 시위는 다시 들불처럼 타올랐다. 주열의 소식이 삽시간에 마산 시내에 퍼졌고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검시가 이루어졌으나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은 시신이 안치된 도립 마산병원으로 몰려들어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다.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학살 경관 처단하라!”

 

오후 615분 도립 마산병원 앞길에서 제2차 마산 시위가 시작되었다. 2만여 명이 참여해 1차 시위보다 규모가 컸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쳤고 일부는 마산 경찰서와 시청 등 관공서에 들어가 집기를 파괴하였다. 시위대 선두에는 주열의 친척 누이동생이 나서서 오빠의 원수를 갚아 달라며 군중에 호소했다. 마산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민주당의 집회나 시위가 아닌 일반 학생과 시민의 시위에서 이승만 퇴진 구호가 등장한 것은 2차 마산의거가 처음이었다.

애국가, 전우가, 해방가, 3·1절 노래 등을 부르며 마산 경찰서 앞에 모인 시위대는 경찰서 마당에 세워 놓은 서장 지프차에 불을 질렀다. 경찰서 무기고를 부수고 수류탄 13개를 들고 나와 그중 한 개를 경찰서 건물에 던졌다. 930분경 경찰에 카빈 소총이 지급되었다.

 

제2차 마산의거 가두 풍경-남성동파출소 앞 / 3.15의거기념사업회
제2차 마산의거 가두 풍경-남성동파출소 앞 / 3.15의거기념사업회

12일과 13일에도 시위가 이어졌다. 12일 날이 밝자 마산 시민들은 경찰서·시청·도립병원 등으로 몰려들었다. 오전 10시경 마산공고 학생들이 교문을 나섰고, 뒤이어 창신고·마산여고·마산고와 여러 여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도립병원 영안실로 행진해 가서 주열의 시신에 조의를 표한 뒤 자진 해산했다. 그러나 경찰이 전날 시위의 주동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학생·시민을 연행하자 다시 시위가 벌어졌다.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경찰서에 돌을 던졌고, 9시경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하여 밤 11시경 시위대가 해산될 때까지 총성이 계속되었다.

13, 해인대 학생과 마산여중고·성지여중고·마산제일여고 학생 1천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여학생들은 김주열의 시신에 덮어주겠다며 꽃다발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다. 경찰은 소방호스로 붉은 물감을 탄 진화용 물을 퍼부었다. 상가는 전날에 이어 철시했고 관공서의 행정사무도 마비되었다.

홍진기 내무장관과 신언한 법무차관은 적색마수(赤色魔手)가 배후에 개재된 혐의가 있다3.15마산의거를 공산주의자의 선동에 의한 소요로 몰아갔다. 415일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담화문을 통해 마산시위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417일 한옥신 부장검사가 공산당 개입은 속단할 수 없다고 발표함으로써 마산시위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색깔 씌우기 계획은 좌절되었다.

 

제2차 마산의거(60.4.11~13)-마산도립병원에서 마산경찰서로 향하고 있는 시위대 광경 / 3.15의거기념사업회
제2차 마산의거(60.4.11~13)-마산도립병원에서 마산경찰서로 향하고 있는 시위대 광경 / 3.15의거기념사업회

 

피의 화요일, 그러나 승리의 화요일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3.15선거를 불법으로 감행한 책임자를 이 자리에 불러내자!”

 

시위의 불길은 빠르게 번졌다. 이웃한 부산은 물론이고 전주, 청주, 인천 등지로 번져간 불길은 마침내 서울까지 올라갔다. 주열의 주검이 발견된 지 일주일이 지난 418,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대학생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시위에 나선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다가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자 분노한 대학생들은 419일 대거 거리로 나섰다.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향했다, 시위 인원은 고등학생, 일반 시민,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 합세하여 10만 명을 육박했다. 일부 사람들이 이승만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쳤지만 시위 참여자 대부분이 공유하고 반복해서 외친 구호는 아니었다. 마침내 시위대가 경무대 바로 앞까지 도달하자 경찰은 실탄을 발사하였다. 이날 서울에서만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부산과 광주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419일 이승만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5대 도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막았다.

419일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이때부터 각종 시위에서 정권 퇴진 구호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폭력을 행사한 집권세력에 책임을 물은 것이다. 마산에서도 본격적으로 이승만 퇴진을 외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424일 마산의 할아버지들이 책임지고 물러가라, 가라치울 때(갈아치울 때)는 왔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25일에는 마산의 할머니들이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대통령은 물러가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대학교수단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이때 학생과 시민이 몰려들어 이승만 물러가라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날 시위는 사실상 철야로 진행되었고, 426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시위대가 광화문과 종로거리를 메웠다. 이날 오전 1030분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하였다. 3·15 부정 선거는 한국 헌정사에서 국회 의결을 통해 정식으로 무효 처리된 유일한 선거로 남았고, 4월 혁명은 독재에 항거한 국민들이 대통령을 끌어내린 최초의 혁명으로 기록됐다.

4월 혁명은 자유와 민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시민투쟁이자,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다. 혁명의 주도세력은 주열 또래의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교문을 박차고 나와 제일 먼저 거리에 나섰고, 일반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저항의 공간을 열었다. 지도자 없이 시위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주열은 시위 전개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혹한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 최빈국에서 빵이 아닌 자유와 민주를 외쳤다.


주열은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에 안장됐다. 아울러 서울 4·19 민주묘지와 마산 3·15 민주묘지에 각각 가묘가 조성돼 그를 기리고 있다. 주열은 주검으로 떠오른 지 35년 만인 1995411일 모교인 마산상업고등학교에서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그의 장례는 50년 만인 2011411일 정부 지원 없이 후원금과 성금만으로 치러졌다.

 

 

 



신다임 ·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졸업. 살아있는 모든 것에 애정이 있지만 요즘은 특히 식물에 빠져 몬스테라 키우기에 열심이다. 글로써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는 기자 지망생이다.

안치용 ·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이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함께 진행한다.

 

 

 

참고문헌

 

1. 조운찬, “196058일 김주열 어머니의 편지, 경향신문, 2014417일자.

2. 김수자,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지배와 저항담론의 불협화음, 한국민족운동사연구64,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3. 유명철, 2·28민주운동, 3·15 1차 마산의거와 4·11-13 2차 마산의거, 4·19혁명 : '연관성'에 대한 내용 지도의 필요성, 사회과교육57, 한국사회과교육연구학회, 2018.

4. 배규성, 대구 228민주운동: 지역적 의미와 계승, 영남국제정치학회보14, 동아시아국제정치학회, 2011.

5. 정주신, 마산의 민주화운동 비교 분석: 19603·15의거와 197910·18부마항쟁, 한국과 국제사회3, 한국정치사회연구소, 2019.

6. 이완범, 4·19 전조(前兆)로서의 1960년 초봄 지역 시민운동 : '4·19''대학생-서울' 중심사관을 넘어서, 한국정치외교사논총34,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3.

7. 홍석률, 4월혁명의 다양성, 지식의 지평28, 대우재단, 2020.

8.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9. 김영현, “3.15부정선거 - 마산에서 시작된 혁명의 불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201601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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