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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시인 그리고 플랫폼
시와 시인 그리고 플랫폼
  • 이병국 | 문화평론가
  • 승인 2020.11.3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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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인작가에게 술자리 참석을 강요하는 등 위계권력을 행사했다는 논란에 휘말린 시 전문 문예지 발행인이 자신의 SNS에 입장문을 발표하고, 문예지를 폐간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지점은, 젠더감수성이나 위계에 의한 권력남용이라는 측면도 있겠으나 발행인이 자신의 잘못을 이유로 문예지를 폐간한 정황이다. 문예지를 발행인 개인의 사적 소유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발행인이 문예지를 발행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문예지를 통해 발표되는 작품들로 시단의 질적·양적 팽창을 꿈꾸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긍정적 효과를 창출하고자 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발행인과 문예지가 동일시된 상태라면, 이런 긍정은 문예지가 지닌 힘이 배태한 권력의 부정적 ‘자기애’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

이런 권력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닌 것은, 시를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시를 발표할 지면을 확보하기가 어려울 만큼 활동하는 시인의 수에 비해 현저히 적은 지면과 시 청탁제도의 문제 등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는 꾸준히 창작된다. 각 대학의 문예창작학과와 각종 문화센터와 창작교실, 전국 성인문해교육 프로그램과 SNS 등 수많은 곳에서 시가 창작된다. 시를 출간하는 출판사도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 매해 수십 명의 시인이 등단하며, 비등단 시인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추세다. 유쾌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이들만 ‘시인’은 아니니까 말이다.

2010년대부터 미디어에 노출된 시인들의 시가 대중들에게 시의 접근성을 높여준 일은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게다가 ‘SNS시’라고 일컬어지는 감각적인 시 역시 대중의 공감을 불러옴으로써 시가 ‘아우라’에 둘러싸인 것만은 아님을 알게 해 줬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덕분에 교과서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시는 미디어와 각종 온라인 플랫폼 혹은 구독 서비스 등을 통해 접할 수 있는 트렌디한 것이 됐고 시인 역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저 멀리’의 존재가 아닌, 지금 이곳의 우리와 다르지 않은 존재로 인식할 수 있게 됐다.

 

여기, 시인의 자리

그렇다면 지금 여기, 시인의 자리는 어떤가. 시와 시인의 ‘아우라’가 옅어졌다고 해도 시가 사회에서 유통되는 방식은 그리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시집을 발간한다고 해도 그것이 소비되는 시장은 협소하기만 하다. 이는 문학 시장 전반의 문제이긴 하지만 몇몇 미디어셀러를 제외하고는 아니, 미디어셀러조차도 시집 판매로 시인의 생계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10%의 인세를 받는 사정을 고려할 때,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하려면 1년에 몇 권을 팔아야 하는지 대충 계산이 나오는데, 그만큼 팔리는 시집은 없다.

시집의 판매는 대략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 전국의 문창과, 국문과 전공자의 일부 소비에 의존한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시의 소비는 결국 시를 생산하는 자에게 국한돼 발생한다. 쓰는 자와 읽는 자가 동일한 셈이다. 그런 이유로 시는 물질적 자본으로 확장될 가능성보다는 일종의 상징자본으로 인식되는 데 머물러 있다. 문화센터나 성인문해교육 등을 통해 시를 쓰는 일이 가능한 것 역시 그것이 일종의 상징자본으로 작동하며 ‘시를 쓰는 나’라는 자존감과 자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사회문화적 지위에 비해, 시와 시인의 생존환경은 열악하기만 하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인은 시를 들고 직접 독자를 찾기도 한다. 이 행위는 시대적 요구에 호응하는 정치적 행위나 SNS의 폐쇄적 커뮤니티의 말초적 흥미를 넘어 나와 너의 직접적 소통이 된다. “기성의 문학 제도의 틀을 비트는 움직임”(김태선, ‘밀레니얼 세대 작가의 삶 ― 작가의 표상과 삶, 그리고 글쓰기의 환경에 관하여’, 내일을 여는 작가 76호, 2020 상반기, 44쪽.)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 움직임은 팟캐스트와 무크지, 낭독회나 브이로그, 메일링을 통해서 이뤄진다. ‘문학의 순수성과 숭고성을 훼손하고 문학을 일종의 놀이로 격하’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순수성과 숭고성이 시인을, 시를 ‘아우라’라는 관념적 장벽 안쪽에서 죽어가게 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기성의 요구 바깥으로 나가 새로운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시와 시를 쓰는 자신을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삶을 회복시키는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의 시는 특정한 의미를 지닌 채 그것이 환기하는 말들에 의해 존재하는 장소였다. 하지만 시는 특정한 장소로 고착되지 않는다. 제멋대로 유랑하며 이리저리 떠돈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으며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부하고 상투적인 상상으로부터 떠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 점에서 시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다른 작업을 위한 플랫폼. 보다 일시적이고 자유로운 개방성의 공간. 물론, 이는 문예지라는 장소에 기입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비롯된 하나의 돌파구라고 볼 수 있다. 

 

‘돈도 안 되는’ 시집을 내는 이유

사실 문예지는 이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로 돼 있다. 그러므로 문예지는 문학 공공재를 유통하는 공적 지위를 수행하는 한편에서 사적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특정 작가들을 호명해 상품화하기도 한다. 이를 문예지의 문학성이 작동하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특히 출판을 겸업하는 메이저 문예지의 힘은 그 자체로 특별한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의 역사와 전통을 습작기부터 내면화한 이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긴 하다. 중요한 점은 문예지로부터 호명돼 그곳에 시를 싣는 것이 그 자체로 완결된 행위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나아가 그곳에서 시집을 출간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는 일이 요구된다.

앞에서 말했듯 시집의 소비자는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 중에서도 특정 부류에 제한된 경향이 크기 때문에 그들이 소비하는 시집의 절대량은 확장성을 지니기 어렵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소수의) 대중성을 확보하게 되면, 다음 행보가 수월해진다. 이를 달리 보면, 문예지가 역사와 전통을 지닌 장소의 기능을 상실하고 단순한 매개체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곳은 시인이 도달해야 하는 혹은 도달하고자 하는 종착지가 아니다. 

시를 쓰고 발표해 시인이라는 상징자본을 획득한 시인에게 더욱 분명한 자기 증명은 시집을 출간하는 일이다. 이 시집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판매로 이어져 인지도를 높인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몇 가지의 제약 - 단순하게는 시가 좋아야 하고 사회적 의미를 지녀야 하며 비평적 평가가 따를 만해야 한다는 점 - 도 있을 수 있고, 앞에서 이야기했듯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문학 권력의 호명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무엇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시집을 출간하고자 하는 이유를 어떻게 볼 것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능동적 행위일 수도 있고, 예술가로서 자신이 세계에 기입되길 바라는 수동적 행위일 수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돈도 안 되는’ 시집을 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차라리 다른 일을 구하는 것이 좀 더 나은 행동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시인이고자 하고 시집을 내고자 한 이상, 다른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집이 상품이 되든, 제품이 되든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전유해 ‘유토피아의 조각들’을 붙잡으려는 행위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 행위가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하나는 사회적 제도 안으로 들어가 그것이 요구하는 데 복무하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제도 바깥을 상상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후자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메일링과 브이로그 혹은 팟캐스트와 유튜브 등을 통해 새로운 문학적 장소를 창출하는 데 있다.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는 이런 행위는 기성 문단의 제도로부터 탈영토화해 자신만의 영토를 재구축하려는 욕망의 발로인 셈이다. 

전자는 국가 및 단체의 지원 사업을 신청해 그들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데 있다. 이는 일종의 복지 프로그램의 일환이며 도서관과 서점 등과 연계해 진행된다. 시집 출간은 이 경우 지원을 위한 필수조건이 된다.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이때, 시집은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며 지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위계적인 제도의 시혜를 받들기 위한 도구.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또 다른 방식의 재영토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을 확보하게 한다. 

시를 써서 자신을 알릴 수 있도록 돕는 문단의 제도적 장치를 구하기 어려운 시인들에게 소통의 숨구멍을 틔워주는 셈이다. 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겠지만, 그 기회의 장소에 설 수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시인은 시집을 출간하고 이를 전유해 시스템의 제도 안으로 들어가 보다 넓은 확장성을 지니게 된다. 문학 환경의 변화가 문학을 하는 이에게 동등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중요한 일일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이런 활동들 역시 지속적으로 생계를 책임져 주지 못한다. 1회성 지원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조차 구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손에 쥔 것은 그것의 작은 조각일 따름이다. 실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바라보며 자신을 전시해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로부터 소외된 자신의 현재일 뿐이다. 

시를 쓰고 시집을 내는 것으로는 시인의 표상을 구성할 수 없는 시대다. 어쩌면 그 덕분에 더욱 분명하게 세계의 문제가 ‘나’의 문제로 투영돼 시라는 것에 투신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죽음을 전제하는 투신은 자신이 설정한 환상에 매몰될 위험이 농후하다. 시인의 표상은 시인의 현실적 행위로 인해 의미를 얻는다. 

시는 시인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심층적 경험 과정으로서 존재의 내부를 구성한다. 그것은 특정한 문화적 의미로 이미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개방적인 경험으로 향유되는 것이다. 이때의 경험은 시를 둘러싼 관계들의 총체 속에서 이뤄지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시인을 이끈다. 그러나 실재가 어떻든 시인에게 시가 생존의 강한 욕망의 플랫폼이 된 시대를 시인은 살고 있는 셈이다.   

 

 

글·이병국
시인, 문화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으며, 저서로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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