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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의 문화톡톡] 여성서사, 자아 탐색의 로맨스
[이정옥의 문화톡톡] 여성서사, 자아 탐색의 로맨스
  • 이정옥(문화평론가)
  • 승인 2020.12.28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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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문화 톡톡 | 이정옥(문화평론가)

 

탐색 로맨스와 낭만적 사랑의 로맨스

로맨스를 구성하는 주요 화소는 모험과 사랑이다. 모험과 사랑 중 어디에 무게 중심을 두는가에 따라 로맨스는 두 가지 갈래로 나눠진다. 전자에 치중하면 탐색 로맨스(quest romance), 후자에 방점을 두면 낭만적 사랑의 로맨스가 된다.

12세기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 발생한 로맨스는 십자군 전쟁과 관련하여 이상화된 종교적 이야기와 범상한 애욕의 이야기가 결합된 기사도 로망스로 출발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끝난 15세기 이후 기사도 로망스는 탐색 로맨스로 발전했다. 탐색 로맨스는 성배를 찾는 구도자나 개인의 영광을 성취하기 위해 모험여행을 떠나는 영웅서사와 궁정풍 사랑이 결합된 것이다.

탐색 로맨스는 근대 초기 개인의 탄생과정과 맞물려 사회·문화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자신의 성취를 위해 모험 여행을 떠나는 근대 초기 남성 영웅의 탐색 로맨스는 돈키호테보물섬등과 같은 모험소설로 발전했다. 나아가 서부영화와 히어로물, 전쟁 영화와 액션물, SF 등과 같은 대중서사는 물론 자기계발 담론과 성공신화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다른 한편, 정열이고 활기찬 개인적인 삶을 원했던 18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을 창안했다. 프랑스대혁명의 정치적 좌절을 목도한 그들은 인간의 내면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며 문학과 예술을 통한 미적 혁명을 꿈꾸었다. 이런 점에서 로망스에서나 일어날 법하다는 의미의 로맨틱(romantic)이라는 단어는 기사도 로망스가 추구한 허황하거나 비현실적인 마법을 넘어서 격정적인 감정을 통해 도달하는 창조적 상상력의 무한성을 지시한다.

그런데 낭만적 사랑의 로맨스에서 미적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내면세계로 모험여행을 떠난 주체는 남성들이었다. 낭만적 사랑은 미적 혁명을 성취하기 위한 창조적 상상력의 원동력이자 초월적 자아를 달성하려는 영웅에게 바쳐지는 숭배와 찬미였던 것이다. 그러니 낭만주의자들에게 낭만적 사랑은 남성으로서의 자아 탐구를 위한 탐색 로맨스였지만, 남성을 고양시키는 여성은 조력자로서의 heroine에 머물렀다.

이런 점에서, 남성에게 로맨스는 언제나 자아실현을 위해 모험여행을 떠나는 탐색 로맨스였던 반면, 여성에게 로맨스는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모험여행이었다. 심지어 여성들이 발명한 빅토리아 로맨스의 로맨스 유토피아조차 사랑의 성취를 목표로 삼았으니, 연애와 결혼의 성취와 동시에 여성의 성장이 멈췄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낭만적 사랑의 시대가 저물고 친밀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차 개인화 과정이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여성들은 더 이상 평생 한 사람과의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지 않을뿐더러 낭만적 사랑이라는 관념적인 구속에서 벗어나 안전하고 편안한 친밀성을 추구하고 있다. 누구의 연인 혹은 아내이자 엄마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여성으로 살아가려는 것이다.

이런 추세와 맞물려 여성서사의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다. 낭만적 사랑에서 탈주한 여성들이 자아의 재발견을 위한 모험여행을 시도한 것이다. 여성서사는 남성 영웅을 원조하고 고양시키는 heroine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hero로서의 여성 자아상을 발견·구축하려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의 탐색 로맨스다.

 

영웅서사와 탐색 로맨스

영웅서사와 탐색 로맨스의 동질성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1904~1987)에 의해 정립됐다. 그는 여러 문화권의 방대한 신화를 비교하여 신화적 영웅들의 모험담을 세 단계로 정리했다.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출발 단계, 모험의 과정에서 엄청난 시련에 부딪히나 끝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입문과정, 신비로운 모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할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귀환단계.

캠벨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여러 문화권에서 이 영웅서사가 공통적으로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모든 신화를 아우르는 하나의 패턴이라는 의미에서 원질신화(monomyth)’라 명명했다. 아울러 자아실현을 위해 세계를 향해 모험여행을 떠나는 영웅의 모험서사와 무의식의 내면세계를 향해 진군하는 자아 탐색의 모험서사를 개인화 과정으로 규정했다.

이런 가설은 칼 융의 원형이론에 기반한 것이다. 칼 융에 따르면, 개인의 의식에 반영된 외부세계의 요구와 집단 무의식 내의 원형적 상징에 투사된 내부세계가 균형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을 의미하는 개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개인화 과정은 인간 내면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자아실현의 목표를 지향하는 발전과정이다.

캠벨은 타계 직전까지 가장 인기 있는 저술가이자 강연자로 활동했다. 그만큼 영웅서사(원질신화)20세기 내내 대중문화와 대중서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수많은 모험의 양식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단일한 원질신화로 수렴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세계와 우주를 지배하는 아들과 아버지의 모험과 투쟁, 그리고 그들이 지배하는 세계와 우주를 떠받들고 있는 어머니와 딸의 헌신이라는 위계적 관계를 토대로 남성들의 탐색 로맨스를 사회문화 전반에 통용되는 진리로 고착화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칼 융은 남성의 정신구조 속에 잠재된 여성적 속성인 아니마와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남성적 속성인 아니무스를 균형과 보완의 관계로 설정했다. 그럼에도 캠벨은 모든 문화적 신화는 남성의 경험에서 나온다고 언명하며, 방대한 신화에 존재하는 영웅은 천의 얼굴을 지닐 정도로 다채롭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에 반해 여성의 얼굴은 영웅의 정체성을 강화하거나 모험을 돕는 조력자, 또는 모험을 방해하는 적대자라는 두 가지로 국한시켰다.

이처럼 영웅의 원형을 남성 개인으로서의 선택 의지와 보편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남성적 특권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캠벨의 영웅서사는 여성 영웅의 자아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인지시켜줬다. 여성들이 해야 할 과제는 더 이상 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여성의 자아상과 새로운 여성 모델을 발굴·정립하는 것임을 일깨워준 것이다.

여신이 되느니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겠다는 다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 1985)은 가장 선제적인 대응이었다. 이 선언문에서 혁명적 주체는 분명 낭만적 사랑의 뮤즈이자 남성들의 찬미를 한 몸에 받았던 여신으로부터 탈주한 사이보그일 것이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와 기계가 결합된 포스트휴먼을 넘어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시킨 남성 담론에 침윤되지 않은 새로운 여성상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선언문의 핵심은 능동적 선택을 강조한 차라리에 있다. 해러웨이는 여신과 사이보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소극성을 벗어던지고 본격적으로 자기 탐색의 모험여행을 떠나는 주체적인 개인 여성으로 거듭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여성서사는 남성 담론에 대한 대응 담론이나 미러링이 아니라 강한 객관성에 기반하여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여성이 모험여행을 떠나는 자아 탐색의 로맨스다.

 

탐색 로맨스로서의 여성 서사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1929)에서 셰익스피어에게 극작가로서 재능을 타고난 여동생이 있다면, 셰익스피어만큼 성공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울프는 사회적 여건상 작품을 쓰지 못했을 것이며, 설령 썼더라도 출판과 공연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 답변했다. 이런 점을 근거로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최소한의 생활비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에놀라 홈즈>(2020)는 약 100년이 지난 시점에 또다시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일 셜록 홈즈에게 탐정으로서의 재능을 지닌 여동생이 있다면, 셜록만큼 성공했을까? 흥미롭게도 영화는 딸을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 여성으로 양육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어머니가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에놀라 홈즈>(2020)

<에놀라 홈즈>의 서사구조는 영웅서사의 3단계, 즉 출발과 입문, 귀환을 기본으로 하되 출발 단계 이전의 교육단계가 추가된 4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어머니로부터 혹독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어린 시절, 16살 생일에 사라진 어머니를 찾아 집을 떠나는 출발 단계, 튜크스베리 자작과 얽혀 시련에 부딪히지만 끝내 어머니를 찾아나서는 입문 단계, 선거법 개정의 성공이 어머니와 에놀라가 함께 완수해야 할 과업임을 확인하며 개인 여성으로 자립하는 귀환 단계.

여성의 탐색 로맨스에서 핵심 포인트는 딸과 어머니, 아내로 살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여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 후 자신의 소명과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부재했던 에놀라는 아버지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다. 때문에 가부장적 사고에 침윤되지 않은 에놀라에게 어머니 유도리아가 심어준 가치관은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유도리아가 에놀라에게 심어준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립성이다. alone을 거꾸로 한 ‘Enola’라는 이름은 온전히 자신에 의지하여 세상과 맞서라는 자기 정체성이자 이뤄야 할 소명을 의미한다. 낱말 맞추기식 교육은 여성에게 강요했던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력을 길러줬다. 또한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섭렵하고, 과학실험과 무술에 이르는 전인교육을 통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오빠 셜록 못지않게 탐정으로서의 자질을 갖춘 지식여성으로 성장시켰다.

동시에 유도리아는 에놀라가 세상을 향해 모험여행을 떠나는 소명과 과제를 제시한 영적 스승이자 여성 모델이다. 추리를 가미한 여성의 탐색 로맨스답게, 유도리아는 16살이 된 에놀라의 생일 선물로 꽃말 카드와 돈(생활 자금)을 남기고 사라진다.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꽃말 카드로 풀어낸 메시지는 우리의 미래는 우리에게 달렸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너 자신이 정하는 길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뒤늦게 나타난 두 오빠, 즉 마이크로프트와 셜록은 에놀라의 모험여행에서 방해자와 조력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법적 보호자인 마이크로프트는 빅토리아시대의 보수적인 국수주의자이자 가부장적인 귀족으로, 에놀라를 기숙여학교에 보내 조신한 신부감으로 키우려 한다.

반면, 진보주의자인 셜록은 에놀라의 자기 탐색적인 모험여행을 지지하지만, 여성운동을 철없는 장난쯤으로 여기는 남성 중심적인 신사다. 그러나 세상에 가장 근접해 있는 탐정이면서도 세상의 변화를 보지 못하는 타조와 같다는 여성운동가 에디스의 신랄한 비판을 수용하여 적극적인 지지자로 변모한다. 근대적인 자유인이자 합리적 이성의 소유자인 셜록은 유도리아와 에놀라가 사회가 통제할 수는 없는 특별한 개인여성임을 인정하며, 에놀라가 튜크스베리 자작을 통해 선거법 개정에 동참하도록 적극 돕는다.

보수적 국수주의자인 할머니로부터 살해 위협에 처한 튜크스베리 자작을 구하여 선거법 개정에 성공함으로써 마침내 에놀라의 자기 탐색의 모험여행은 귀환의 단계로 접어든다. 어머니 유도리아와의 상봉을 통해 지금과 같은 세상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투쟁했지만, 너야말로 세상을 바꾼 대단한 여성이 됐다며 진정한 여성영웅의 임무 완수를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이로써 에놀라의 자기 탐색의 모험여행은 완결되고, 그간 유도리아의 미스터리한 행적과 메시지의 숨겨진 의미도 선명하게 밝혀진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에놀라는 관객을 향해 스스로 탐정, 암호 해독가, 길 잃은 양을 구하는 사람이라는 자기정체성을 표방하고, ‘자신의 자유와 목표와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개인여성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첫 장면부터 시종일관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는 에놀라의 방백은 침묵을 강요당한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한 의도된 장치다. 몰입을 방해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서사가 담아내지 못하는 새로운 여성상 정립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전달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처럼 만약이라는 가정법에 근거한 역사 다시 쓰기 방식의 여성서사는 성별 분업에 근거한 가부장적 인식과 사회제도에 짓눌려 있던 여성의 능력과 잠재력을 입증해준다. ‘여성에게도 평등한 시민권을 보장하라고 주창했던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참정권운동이 펼쳐진 빅토리아시대를 배경 삼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실존한 입지전적인 여성 영웅을 새롭게 발견하고 조명하는 여성서사는 이보다 더 큰 의의와 감동을 준다. 남성 중심의 역사에서 부재와 공백으로 남겨진 여성역사의 흩어져 있는 파편을 모아 주체적인 여성을 재구성함으로써 여성자아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재정의하기 때문이다. 마치 박물관의 지하 수장고에서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채 잠자고 있던 보물의 진가를 새롭게 발견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고 전시하는 큐레이팅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히든 피겨스>(2017)

<히든 피겨스>(2017)는 애초 미국 우주개발의 역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수학자 캐서린 고블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다. 그녀는 2015년 미국 최고의 시민상인 자유의 메달을 수여했으며, 그 이듬해 나사에 그녀의 기념관이 건립됐을 정도로 위대한 여성영웅이다. 그러나 숨겨진 인물들이라는 제목처럼 1960년대 초반부터 나사에 합류하여 미국 우주개발의 역사에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그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수학자 캐서린 고블을 비롯한 엔지니어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흑인여성 3인방을 재조명한 영화다.

이들 여성서사의 독보적인 가치는 여성차별과 인종차별이 극에 달했던 1960년대에 여성과 인종, 계급이라는 3중의 차별과 편견에 맞서 정면 돌파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성공신화는 서로서로 이끌어주고 격려하며 연대를 통해 획득한 결과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물론 소설과 달리 영화는 이런 점을 크게 부각시켜 여성 사회참여의 새로운 방식을 강조했다.

미국과 소련이 치열한 우주개발경쟁에 돌입했던 1960년대 초반, 국운을 걸었던 최초의 유인 로켓발사 프로젝트에서 가장 주요한 핵심은 로켓의 귀환지점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작업이다. 컴퓨터가 개발되기 이전이라 로켓 발사체의 궤도를 계산하는 천재적인 수학능력과 로켓의 발사체를 만드는 항공 엔지니어링, 수많은 연산을 신속하게 수행해야 하는 전산시스템은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이런 점에서 세 인물의 경력에 각각 인간 계산기’(캐서린 고블), ‘나사 최초의 여성 엔지니어’(메리 잭슨), ‘IBM을 최초로 작동한 컴퓨터 프로그래머’(도로시 본)라 붙여진 별칭은 의미심장하다. 자아 탐색의 로맨스에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에게 부여한 과업이자 이를 실질적으로 수행한 여성의 확장된 자아상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여성, 인종, 계급의 차별적 제도와 관습은 기득권의 필요에 따라 쉽게 무너질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촌각을 다퉈야 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로켓발사 프로젝트팀에게 캐서린의 뛰어난 수학실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 왕복 1.6km 떨어진 흑인 전용 화장실이나 흑인 전용 커피포트 등의 인종차별은 쉽게 무력화됐다.

또한 10년 넘게 임시직으로 근무한 도로시는 IBM 컴퓨터를 작동할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래머라는 이유로 전산원의 주임이자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동일한 이유에서 메리 역시 로켓발사에 꼭 필요한 엔지니어 학위를 따기 위한 교육과정을 인정받는 판결도 어렵지 않게 받아냈다.

이처럼 천재적인 흑인여성들의 강인한 용기와 숨은 공로를 바탕으로 미국의 우주개발사업은 소련을 능가하여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영광은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과 공학의 천재를 자처해온 남성들이 차지해왔다. 영화는 약 60년이 지난 시점에 뒤늦게 숨은 공로자인 세 명의 흑인여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재조명함으로써 미국 우주개발의 역사에서 부재와 공백으로 남아 있던 여성의 역사를 복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가 표방하는 천재성에는 인종이 없고, 강인함에는 남녀가 없으며, 용기에는 한계가 없다는 메시지는 인종, 여성, 계급이라는 세 겹의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는 여성 자아 탐색의 로맨스가 지향하는 바를 함축한다. 동시에 후대의 여성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자기의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 마음에 새겨야 할 금언이다.

<프록시마 프로젝트>(2020)

다른 한편, <프록시마 프로젝트>(2020)는 여성서사와 SF적 상상력의 결합을 통해 여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렇다고 생물학적인 결정론을 거부한다거나 젠더 차별을 몰아내는 등의 젠더 유토피아를 꿈꾸는 전복적인 상상력을 구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개인여성으로서의 꿈과 7살 딸을 키우는 싱글맘으로서 모성애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성서사다. 때문에 우주비행사로서 선발되어 혹독하게 훈련을 받는 과정에서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차별과 어린 딸을 떠나 1년 동안 우주에서 생활해야 하는 엄마로서 갖는 내면적 갈등이 세밀하게 그려진다.

물론 조애나 러스가 주장한 대로, SF적 상상력은 영웅적인 전투와 미개척지로의 모험, 세속적인 야심과 의기양양한 성취, 파멸할 운명을 향한 시인의 매혹적인 자기희생 등과 같은 남성 영웅의 서사를 전복하고 해체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가정된 법칙에 따라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고 변화를 만들어내는 SF는 대체적인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성찰하는 대안적인 서사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우주 비행사는 주로 남성의 전유물이거나 성취 지향적인 여성 영웅들이었고 성취해야 할 업적과 목표를 향해 우주를 여행하는 영웅서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와 달리 <프록시마 프로젝트>에서 사라는 어린 딸 스텔라를 사랑하는 엄마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주 비행사로서의 꿈을 성취하는 여성이다. 사라가 우주비행사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함께 동승한 미국과 러시아의 남성 우주비행사들과 달리 수많은 준비과정과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유럽 우주국에서의 선발과정과 러시아 스타시티에서의 혹독한 훈련과정에서 겪는 여성에 대한 차별대우는 말할 것도 없고, 화성탐사를 위해 프록시마 행성에 머무는 1년간을 대비하는 개인적인 준비과정 역시 기본이다.

가장 큰 어려움은 어린 딸을 돌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여러 가지 과정에 있다. 별거 상태에 있는 남편에게 그리고 보모교사에게 어린 딸을 안심할 수 있을 정도로 맡기는 절차가 길게 이어지고, 무엇보다 어린 딸에게 엄마가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만큼 이 영화는 현실적으로 여성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모험여행을 떠나는 것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세세한 터치로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자신의 꿈을 향해 떠나는 사라의 여성서사는 여성들에게 깊은 울림과 동시에 감정적 동일시를 안겨준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의 감동적인 대목은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엄마를 원망하던 7살의 어린 딸이 점차 우주비행사로서 꿈을 이뤄나가는 엄마를 응원하는 의젓한 딸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사라가 어린 시절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테레시코바를 모델 삼아 우주비행사의 꿈을 키웠던 것처럼, 어린 딸 스텔라 역시 엄마 사라를 모델 삼아 우주비행사의 꿈을 꾸며 자랄 것이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엄마 사라가 우주선을 타고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스텔라의 담담한 표정과 엄마가 보낸 편지를 찬찬히 읽고 난 후 차장 밖에 줄을 지어 달리는 말을 바라보는 황홀한 시선이다. 엄마의 꿈에 자신의 꿈을 일치시켜 마음 속으로 응원을 보낼 만큼 성장한 스텔라의 의연한 모습과 결연한 태도는 울먹이는 아빠와 대조를 이룬다.

이런 점에서 별을 의미하는 스텔라(Stella)라는 딸의 이름이나 태양 외에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인 프록시마(Proxima)라는 제목은, 비록 딸이 머물고 있는 지구와 엄마가 머물고 있는 별의 물리적 거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딸과 엄마가 함께 같은 꿈을 꾸는 심리적인 거리의 밀착성을 상징한다. 사라가 어렵사리 떠난 우주비행사로서의 꿈을 향한 자아 탐색의 로맨스는 개인 차원에서는 주체적인 삶의 실천인 동시에 여성의 한계를 규정짓는 사회인식을 바꿔나가는 적극적인 대안이다.

 

 

글·이정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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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네이버와 구글

 

* 참고문헌

· 다나 J. 해러웨이,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민경숙 옮김, 동문선, 2002.

· 리타 펠스키, 페미니즘 이후의 문학, 이은경 옮김, 여이연, 2010.

· 조지프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윤기 옮김, 민음사, 2018.

· G. 융 외, 인간과 상징,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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