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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미의 문화톡톡] 역사없는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 2
[장윤미의 문화톡톡] 역사없는 사람들의 역사 이야기 2
  • 장윤미(문화평론가)
  • 승인 2021.02.0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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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 브래넌트의 소설 <사진 신부 진이>는 낯선 땅에서 이주와 정착의 반복하며 독립된 개인이 되어가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같은 지역 출신의 여성들이 하와이 이주민들이 되어 디아스포라를 꾸리고 지속적인 연대를 해나가는 이야기다.

두 소설의 전체적인 서사 흐름은 비슷하다. 몰락한 양반 출신인 진이(원래 이름은 섭이)와 버들은 희망 없는 조선, 배움에 대한 갈망을 이유로 사진신부가 되어 하와이로 떠난다. 하와이에서의 삶은 조선의 그것보다 결코 낫다고 할 수 없지만, 조선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나간다. 그 과정에서 진이와 버들은 때로는 다른 이민자들과, 때로는 같은 조선 출신의 여성들과 연대하며 이민자로서 겪게 되는 차별과 갈등을 해결해나가고 결과적으로 성공한 이민 1세대의 삶을 구현한다.

그녀들은 무엇과 갈등하는가

두 소설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차이로 인한 원주민과 먼저 이주하여 자리를 잡은 다른 출신의 이주자들 사이에서 느끼는 이질감, 유색인으로서 겪게 되는 인종 차별, 그리고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돈과 재확립 등 이민자로서의 삶을 담고 있다. 그러나 두 소설을 가르는 지점은 바로 두 인물이 겪게 되는 갈등의 층위라고 할 수 있다.

앨런 브래넌트, [사진신부 진이]
앨런 브래넌트, [사진신부 진이]

 

<사진 신부 진이>의 주인공 진이가 겪는 갈등으로 이혼과 인종차별을 꼽을 수 있다. 이혼이나 인종차별 문제는 조선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진이에게는 굉장히 낯선 언어이자 문화다. 진이는 이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그녀 스스로 조선/여자에서 탈민족/개인으로 정체성을 전환하게 되는데 이혼은 진이에게 자유를 선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고 인종차별은 저항과 연대가 무엇인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혼의 경우 조선/여자에게 어떤 상황에도 불가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혹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건 여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여자와 아내로의 구실을 할 수 없다고 판명되었을 때 남자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혼은 여자에게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와이에서는 이혼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고 원한다면 먼저 이혼을 요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혼을 한 이후에도 나의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 원한다면 새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사실은 매력적인 욕망이 되어 진이를 움직이게 만든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의 버들이 겪는 갈등 역시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신을 여자로 봐주지 않는 남편으로 인한 불행한 결혼 생활이라면 다른 하나는 정치적 이념의 차이로 인해 균열하는 우정이다.

버들은 자신이 상상해왔던 이상적인 남성성을 태완에게 투영하는 동시에 자신 역시 태완으로부터 이상적인 아내로 인정받길 원한다. 그러나 태완이 여전히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혼 생활에 위기를 느낀다. 앞서 진이의 결혼 생활의 위기는 남편의 폭력과 도박에서 야기된 것이지만 버들의 결혼 생활의 위기는 태완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로맨틱하게 그려지는데 이러한 결의 차이는 진이가 이혼을 결심하게 만드는 반면 버들은 죽은 사람의 몫까지 더해 태완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하는 데서도 쉽게 드러난다.

그녀들은 누구와 연대하는가

진이는 폭력과 도박을 일삼는 남편으로부터 도망쳐 나와 이빌레이로 떠난다. 이빌레이는 가난한 노동자들, 매춘부, 깡패,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인데 여기서 남자아이 조를 알게 된다. 조는 원주민 출신이란 이유로 백인 아이들로부터 괴물, 깡패, 촌뜨기로 불린다. 진이는 출신을 이유로 따돌림당하는 조를 보며 동질감과 연민을 느끼게 되고 이를 계기로 그의 가족과 깊은 유대를 형성한다. 그런데 조가 백인 여성의 폭행 사건에 연루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조는 원주민/유색인/노동자/빈민자라는 이유로 범인으로 지목되어 결백을 주장하지만 소용없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백인들은 사회의 쓰레기를 처리한다는 명분으로 조를 납치하고 결국 죽인다. 조의 억울한 죽음이 알려지자 이빌레이 주민들은 분노했고 조의 장례식장은 수많은 유색인의 슬픔으로 가득 찼다. 조의 죽음은 백인이라는 ‘인종’과 ‘지위’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라는 공통의 인식이 정치적 연대를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진이는 조의 죽음과 장례식의 풍경을 보며 자신과 이들 사이를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은 누구와 연대해야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

한편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 버들이 겪는 갈등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두고서 서로 다른 정치 이념으로 인해 벌어지는 민족 간의 갈등이다. 버들은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는 있지만 남편인 태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적 갈등에 놓이게 된다. 태완의 경우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세운 군사학교에 다니며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로 박용만 노선에 대한 믿음과 충성도가 높은 인물이다. 실제로 1919년 국권침탈 이후 이승만이 임시 정부 수장이 된 이후 하와이 교민들의 관심과 지지도는 이승만에게 집중되면서 무장 독립운동을 주장하는 박용만과 외교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을 두고 교민들은 분열되었다. 소설은 이러한 대립을 윗동네(이승만이 세운 교회)와 아랫동네(박용만파가 세운 교회)의 갈등으로 표현하는데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갈등은 제 3국에서 이주민이 겪는 갈등이라기보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이 겪는 갈등에 가깝다. 그리고 이 부분은 <사진신부 진이>와 <알로하, 나의 엄마들>과 갈라지는 극명한 지점이기도 한데 진이가 겪는 갈등은 낯선 나라에서 이주민이 겪게 되는 문화적 차이, 인종 차별, 그리고 다른 이주자들과의 연대를 통한 사회공동체로의 편입 등과 관련된 것이라면, 버들이 겪는 갈등은 국가를 가진 국민에서 이주민으로 사회적 위치가 재설정되고, 새로운 지역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재정립과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버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백인이나 하올레, 또는 다른 출신의 이민자는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조선에서부터 함께 배를 타고 사진신부들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물론 그녀를 도와주는 조력자 역시 조선 출신의 여성들이 전부다. 진이의 연대 대상은 출신이 다른 이주민인 반면 버들의 연대 대상은 조선인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은 이 소설의 특징인 동시에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이금이,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알로하, 나의 엄마들]

 

어쨌든 버들은 남편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지금껏 연대를 유지했던 사람들과 대척점에 놓이며 위기에 봉착하는 듯 하지만 이 위기는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해결책은 바로 버들-홍주-송화의 우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 여성의 우정은 정치적 이념을 뛰어넘는다. 왜냐하면 버들-홍주-송화의 우정과 연대는 일상, 육아, 교육, 경제, 공동체 커뮤니티 등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하며 관계를 결속하고 유지하는 데 강력한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들과 홍주의 경우 각각 양반과 상민 출신으로 조선에 있었다면 연대가 불가능했을 관계다. 송화 역시 무녀의 자식으로 조선에 있었다면 버들과 홍주와의 관계를 맺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동등한 연대가 가능한 이유는 곧 이들이 하와이를 선택한 이유와도 같다. 세 여성 모두 자신이 가진 조건으로는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의병의 딸인 버들, 결혼한 지 하루 만에 남편이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된 홍주, 무당의 딸로 태어난 송화는 의병 자식 딱지, 과부 딱지, 무당 딱지를 떼지 않는 이상 평범한 조선/여성으로서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이들은 정치적 이념이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하와이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이들의 연대는 자연스럽게 정치적 입장을 뛰어넘는다고 말할 수 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이 ‘큰’ 역사 소설을 지향하는 대신 ‘작은’ 역사에 그 초점을 맞추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작가는 ‘국가’와 ‘국민’라는 정치적 개념을 포기하지는 않는데 망국을 막기 위해 저항하다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버들의 아버지의 애국심은 태완과 버들의 아들인 데이비드를 통해 자연스럽게 계승된다. 태완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을 떠나 중국으로 떠났고, 데이비드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선언한다. 물론 데이비드의 국가적 정체성은 버들의 아버지나 태완과 그 층위가 다르다. 데이비드의 경우 조선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일본 국적을 가지고 미국에서 사는 미국 시민이다. 데이비드는 참전을 기회로 삼아 미국 시민권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책임을 다하는 가장이 되기 위해서라는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대의적 명분은 결론적으로 버들의 아버지나 태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국가로 연결되는 공동체는 곧 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민자의 위치는 주어지는 것인가, 선택하는 것인가

진이는 하와이를 ‘섞은 접시’에 비유한다. ‘섞은 접시’란 여러 종류의 음식을 한 그릇에 모아 섞어 먹는 하와이의 대표적 음식인데 ‘섞은 접시’엔 어떤 음식을 넣어도 상관없다. 본연의 음식의 맛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독특한 요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요리는 하와의 이주 역사와 유사하다. 하와이는 여러 나라 출신의 이주민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권력과 자본의 핵심은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하와이의 역사와 문화를 움직이고 지속하게 만드는 주체는 원주민과 이민자,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 3세대들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이민 1세대보다 훨씬 복잡한데 <사진 신부, 진이>의 진이는 조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백인이 아닌 유색인으로 산다는 것, 그리고 이민자로, 이민자의 자식을 낳고 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자신의 아이는 하와이에서 태어나 영어를 쓰고 햄버거를 먹을 때 김치를 함께 먹는 한국계 미국인이자 하와이인일 뿐이다. 진이는 ‘조선의 피가 흐르는 국민’ 식의 프레임은 씌우지 않는다. 각자의 개성(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하나로 하나의 독특한 지역의 음식이 바로 ‘섞은 접시’인 것이다.

<사진 신부 진이>와 <알로하, 나의 엄마들>를 아우르는 서사의 틀은 유사하다. 조선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여성이 하와이로 떠나 사진 신부를 선택했지만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진이는 재선이라는 진정한 사랑을 만나게 되고 버들은 태완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또한 유색인이 겪어야 하는 인종차별과 디아스포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정치적 노선에 따른 대립을 역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데 진이는 다른 이민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그리고 버들은 교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극복해나간다. 이주민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 반드시 해결해야 할 명제는 ‘이주민으로서 나는 어느 위치에 있는가?’와 ‘누구와 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라는 울프의 말을 상기해본다면 진이는 자신의 위치를 백인/유색인, 원주민/이민자의 관계 속에서 찾았기 때문에 연대의 대상으로 자신을 포함하는 다양한 인종(혹은 민족, 국가)을 선택했다면, 버들은 하와이/조선, 이방인/조선인의 관계 속에서 찾았기 때문에 연대의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조선인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글·장윤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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