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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두 달 만에 수은중독으로 쓰러져 숨진 15살 소년은 한국 직업병 투쟁의 역사를 어떻게 바꿨나
입사 두 달 만에 수은중독으로 쓰러져 숨진 15살 소년은 한국 직업병 투쟁의 역사를 어떻게 바꿨나
  • 박서윤 안치용 노수빈 송휘수 기자
  • 승인 2021.02.2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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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죽음, 역사의 눈물] ⑰ 문송면

집안형편이 어려워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으로 상경한 소년은 온도계 공장에서 일한 지 두 달 만에 앓아누웠다. 그러나 왜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울의 대학병원에 가서도 병명을 알 수 없어 무당을 불러 귀신 쫓는 굿까지 했다. 소년은 환청을 듣는가 하면 피가 나도록 몸을 긁는 등 고통에 시달리다가 병에 걸리고 반년이 지나기 전에 숨졌다. 사인은 수은중독이었다.

살고 싶어병 다 나으면무서운 서울 떠나농사지으며 엄마랑 살자.”는 말을 5살 터울 형에게 남기고 1988721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 소년은 문송면이다. 산업재해로 어린 나이에 사망한 소년의 이야기는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이후 송면은 한국 직업투쟁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송면을 죽음으로 이끈 노동현장

 

1956년 일본 구마모토 현 미나마타 시에서 지명을 따 미나마타병으로 불리게 되는 공해병이 처음 보고된다. 미나마타 지역 공장들에서 유출된 폐수로 인한 수은 중독 사례가 알려졌다. 19565월 첫 환자가 보고된 후 6개월간 경련, 언어장애 등의 증상을 보이며 총 40명의 미나마타병환자가 발생했고 그중 14명이 사망하였다. 증상이 없는 사람의 머리카락에서 191ppm의 수은이 검출된 반면 환자의 머리카락에서는 705ppm의 수은이 검출되며, 사인은 공장 폐수 속 수은으로 좁혀졌다. 일본 정부는 12년이 지난 1968926미나마타병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 병이칫소공장(1965년 신일본질소비료가 개명)에서 배출된 메틸수은 화합물이 원인인 공해병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수은 중독으로 인한 미나마타병이 보고되고 30년이 지난, 또 미나마타병이 세계 첫 공해병으로 공식 인정되고 20년이 지난 19881월 한국의 15살 노동자는 국소 배기장치조차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수은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1971214일(주민등록상 생년월일. 형 문근면은 당시 유아사망률이 높아 주민등록을 늦게 하는 관행에 따라 자신과 송면이 2년 뒤로 주민등록을 했다고 증언했다.) 충남 서산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42녀 중 셋째로 태어난 송면은 대한민국이 6월 항쟁으로 거대한 전환을 겪은 1987년에 서산군 태안중학교 졸업반이었다.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주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주경야독을 꿈꾸며 상경한 이 학교 3학년 학생 9명 가운데 한 명이 송면이었다. 1988년 충청남도 교육통계 연보에 따르면 송면이 다닌 태안중 등 서산군의 16개 공립학교에서 2월에 4,940(2,371)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288명이 취업했고(150), 실업계로 1,500(610)이 진학했다.

 

문송면군 사진 / ⓒ일과 건강
문송면군 사진 / ⓒ일과 건강

 

송면과 같은 아이들이 당시에 학업을 지속할 방법은 고향을 떠나 대도시의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학교를 다니는 것이었다. 서울의 제조업 공장 관리직 직원들은 시골 학교를 찾아다니며 졸업반 학생 중에서 신규 노동자를 모집했다. 기숙사 제공과 야간학교 진학 지원을 약속했다.

송면 역시 진학 문제로 고민했지만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과 많은 형제를 감안했을 때 자신이 집에서 먹고 자며 주간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일찍부터 판단했다. 서울에서 공장 일을 하면서 영등포공고 야간에 진학하기로 결심한 송면은 어린 노동자를 물색하러 온 협성계공이라는 온도계 회사 직원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는 이미 취업한 큰 형 근면이 있었다.

중학교 졸업장을 받기도 전인 1987125일 중학교 3학생인 송면은 객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가 취업한 서울 영등포구 협성계공 공장에는 60여 명의 노동자가 일했다. 44명의 생산직 노동자의 대부분은 송면 또래의 야간학교 학생이었다. 도장실에 배치돼 신나로 압력계 커버를 닦는 일을 하다가 12월 말에 송면은 온도계 부서로 옮겨가 환기 시설 없는 좁은 공간에서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하는 작업을 했다.

진상 조사단의 현장 조사에 따르면 작업장에 수은 방울이 널려있었고 겨울에 난로를 켜놓아 이 수은이 증발하여 공기 중에 확산되어 있었다고 한다. 입사 두 달이 되어갈 1988120일 송면은 불면증, 두통, 식욕감퇴 등의 증세로 회사 근처 병원을 찾아갔지만 감기니 괜찮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때 송면은 온도계 부서에서 압력계 부서로 돌아와 헝겊에 신나를 묻혀 압력계를 닦고 포장하는 일을 했다. 형의 조언에 따라 휴직계를 내고 잠시 회사를 쉬려고 하였으나 회사에서 근무 중에 생긴 병이 아니라는 각서를 요구하는 바람에 일단 통원치료를 받았다. 감기라는 진단과 달리 허리와 다리에 통증이 느껴져 3~4일 물리치료를 병행했지만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2주 넘게 병원에 다녀도 증상은 악화하였고 불면증에 헛소리까지 하기 시작하자 심각성을 느낀 송면은 28일 요추염좌 진단으로 휴직계를 냈다.

216일 송면은 설을 맞아 구로공단에 근무 중이었던 형 근면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계속 저리고 아프다라던 송면은 설 전날 아침 오랜만에 만난 가족 앞에서 전신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다음날도 경기를 일으키고 가려움증을 호소하여 송면의 부모는 갓 15살이 된 소년을 이끌고 태안군 태안읍의 근처 병원을 찾았지만 큰 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말에 설 연휴 후인 219일 서울로 올라와 고려대학교 부속 구로병원 응급실에 송면을 입원시켰다. 컴퓨터 촬영, 척수 검사, 초음파 등 갖은 검사를 진행했지만 이상 없음이라는 결과만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결과와는 상반되게 송면의 병증은 점점 더 깊어졌다. 병명을 알 수 없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정신장애, 허리 통증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검사가 더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송면의 가족은 치료비를 감당할 방법이 없어 35일 퇴원을 결정했다. 15일의 입원 치료 비용으로 80만 원이 나왔다. 당시 송면의 월급은 75,000원이었다. 주변에서 귀신에 씌었다고 하여 돈을 빌려 무당을 데려와 굿까지 했다.

하지만 정신장애가 점점 심해졌고, 고혈압 반사작용 마비 등으로 계속해서 어린 아들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39일 송면을 서울대학교병원 소아병동에 입원시켰다.

마찬가지로 처음에 제대로 된 진단이 나오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사이에 담당 주치의 박희순의 질문 환자 직업이 뭐죠?”가 실마리가 되었다. 이전 세 곳의 병원에서는 중3~1 사이 15살 환자가 수은을 다루는 노동자일 것으로 상상하지 못했다. 바로 혈액과 모발 검사를 시행하자 기준치를 넘은 수은과 구리가 검출됐다. 317일 기준으로 소변에서는 297.6/l의 수은이 검출됐다. 100ug/l 이상이면 유소견자, 300ug/l 이상에 해당하면 치료를 요하는 수은중독환자로 본다. 고려대 부속 구로병원의 소견서 및 검사 자료와 여러 종합 검사를 기반으로 1988322, 송면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수은 중독 및 유기용제(신나) 중독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은 중독을 인정하는 서울대학교 진단서 / ⓒ일과 건강
수은 중독을 인정하는 서울대학교 진단서 / ⓒ일과 건강

 

임박한 죽음, 노동부의 무사안일과 후안무치한 사업가

 

당시 구로공단에서 근무 중이었던 송면의 큰형 근면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세상은 가난한 노동자 가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직업병 자체를 몰랐으니까. 송면이는 송면이대로 고통스러워했고. 모든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이었다. 나도 하나씩 알아가면서 싸워야했다. 모든 것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경제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힘들었다. 7, 이맘때만 생각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도 같은데, 직접 겪은 가족과 나는 마음에 상처가 되어있다. 그게 울화병이라고 해야 할까? 욱 하는 화가 몸 안에 있다.

- 문송면, 원진노동자 산재사망 25주년 추모제 자료집에 실린 문송면군의 형 문근면씨와의 인터뷰

 

324일 근면은 송면의 회사에 산재처리를 요구하기 위해 면담을 신청했지만, 양제석 사장은 나오지도 않고 사장 아들이 나와서 근면에게 지금 정신없다. 기다려라.”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다음 날 그때까지 든 치료비만이라도 처리하기 위해 다시 회사를 찾았지만, 전날 서울대 가정의학과 의사를 찾아가 “(송면이 걸린 병이) 반드시 회사에서만 걸리느냐라고 물어 따진 사장 아들은 송면이 시골 출신이니 시골 농약이나 음식물이 원인일 수도 있다며 회사에서 수은에 중독되었다는 증거를 요구했다.

사업주가 날인을 거부한 산재 신청서 / ⓒ일과 건강
사업주가 날인을 거부한 산재 신청서 / ⓒ일과 건강

 

당장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 급한 상황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노동부를 방문한 근면은, 서울대학교 병원은 노동부 산재 지정 병원이 아니니 협성계공의 지정 산재병원인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서 진단서를 받아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문제는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서울대학교 병원에 밀린 치료비와 입원비 90만 원을 먼저 내야 한다는 것.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아 송면의 고등학교 진학조차 지원하지 못한 송면의 가족은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의 병원비로 80만 원가량을 감당하느라 이미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처지였다.

소를 팔고 돈을 빌려 가며 간신히 버텼지만 추가로 90만 원이란 거액을 융통하기란 불가능했다. 근면은 서울대 병원에 밀린 치료비 지급 보증을 서주면 병원을 옮기겠다고 애원했지만 노동부는 당신네 사정이지 않냐며 거절했다. 당시 근면의 메모에는, 충남 태안 입원비 10만 원, 고려대학 부속병원 입원비 80만 원, 꾼 돈 180만 원, 소 판 돈 50만 원 등이 적혀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 회사와 연락해서 328일 서울역에서 회사 과장을 만났지만 한강성심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와야 한다는 얘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노동부 역시 서울대 진단만으로는 산재처리가 되지 않으며 회사의 인정이 필요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산재처리를 위해서는 서울대병원의 진단은 의미가 없고 협성계공의 산재 지정병원인 한강성심병원의 진단과 회사(협성계공)의 날인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규정을 앵무새처럼 읊은 것이다. 송면의 이종사촌이 근로기준법상 산재 인정 여부 중재청구 절차에 관해 물으니 노동부 담당자는 그런 것 없다. 당신이 알면 당신이 그 방법대로 해라고 말했다.

서울남부 노동부에서 보낸 반려 사유서 / ⓒ일과 건강
서울남부 노동부에서 보낸 반려 사유서 / ⓒ일과 건강

 

막다른 길에 다다른 근면이 찾아간 변호사 강은희는 남부지청 법률 구조공단을 추천해주었고, 329일에 사건을 접수했다. 42일 송면 동료들의 피를 검사하면 수은중독과 공장 사이의 인과관계를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서울대병원 의사의 말에 점심시간에 협성계공을 찾아가 송면의 동료 정 아무개에게 피검사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 역시 학교에 다니기 위해 공장일을 하는 힘없는 고등학생 노동자였다. 회사에서 쫓겨나면 학교를 못 다닌다며 회사에서 허락해주면 피검사를 해주겠다고 했다. 저녁까지 기다리자 양 사장이 사장실로 불러 왜 남의 피까지 뽑으려고 하냐며 영업방해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했다.

수소문 끝에 진보적인 의료인들이 모여 만든 구로의원의 도움을 받았다. 구로의원의 도움 아래 서울대병원 의사 박희순의 소견서를 첨부하고 송면의 회사 동료 정 아무개의 목격자 서명을 받은 산재 신청서를 작성해서 협성계공에 날인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회사날인이 들어가지 않은 신청서를 진정서와 함께 46일 노동부 남부지방사무소 민원실에 접수했다.

서류를 접수한 지 일주일이 지난 414일과 15, 미리 전화하고 방문한 노동부에서는 집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돌아왔다. 16일 노동부는 송면의 시골 본가에 산재 신청서 반려 통지를 보냈다. 근면은 고향에 내려가 반려된 서류를 가져와서 노동부에 다시 전화했지만, 마찬가지로 기다려라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협성계공을 찾아가 또 애원했지만 사태는 마찬가지였다. 갓 스무 살을 넘긴 근면 또한 비록 종류가 다르긴 했지만 직업병을 앓는 동생과 함께 고통과 수모를 겪었다.

 

일단 송면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송면이를 빨리 치료해서 건강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별 쌍소리를 해도 송면이가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면 눈이 뒤집힐 정도였다. 송면이가 짜증도 내고 하면, 당장 앞에서는 뒤돌아섰다가도 얼마나 아프면 그랬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빨리 치료를 해서 건강하게 해주고 싶었던 게 첫 번째였다.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 문송면, 원진노동자 산재사망 25주년 추모제 자료집에 실린 문송면군의 형 문근면씨와의 인터뷰

 

57일 구로의원 상담실장 김은혜의 소개로 근면은 시민 공익법률상담소에서 노동법 관련 법률 상담을 하는 박석운을 만났다. 박석운은 근면과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문근면이라고 송면이 형을 만났는데, 걔가 눈이 소처럼 크고 순해 빠졌어요. 날 보자 애가 말은 못 하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는 거야. 얼마나 기가 차고 힘들었겠어.”

 

박석운은 근면과 이야기한 후 이 문제가 법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을 직감하고 신문에 내자고 제안했다.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임채청을 만나 인터뷰를 한 후 511일 동아일보에 최초로 온도계 계공 근무 15세 소년, 두 달 만에 수은 중독이라는 기사가 실리며 송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

 

송면의 직업병이 처음으로 보도된 1988년 5월 1일 동아일보 기사
송면의 직업병이 처음으로 보도된 1988년 5월 1일 동아일보 기사

 

언론 보도가 나가고 나서야 노동부는 620일 직업병 판정을 하고 송면의 산재요양을 승인했다. 그때 송면은 몸무게가 14kg이나 줄어 서지도 못하는 상태였고 호흡이 약해져 응급상황에 자주 직면했다. 스스로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다 생니를 뽑고 몸이 너무 저리다며 매일같이 근면에게 몸을 밟아달라고 애원했다. 송면의 아버지는 밀린 병원비에 대한 부담과 아픈 아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신경쇠약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이듬해에 사망했다.

629일 송면은 여의도 성모병원 직업병과로 전원되었다. 응급상황 때마다 근면이 송면 옆을 지켰다. 시골에 가고 싶다고 보채는 동생에게 근면은 빨리 나서 시골에 가자고 달래주며 운동화 한 켤레를 사줬다.

 

"일찍 기상한 편. 상태는 계속 안 좋다. ·대변은 다 싼다. 점심 먹이고 노동 사무소 가서 신청서 가지고서 누이네 가서 라면 먹고 병원에 오니 5. 저녁 먹임. 상태가 왜 이리 안 좋은지. 새벽 2시에 토하고 쓰러지고 일어서지도 못하는군. 새벽에 잠깐 2시간 눈 좀 붙임."

- 문근면씨가 쓴 1988630일 일기 중에서

 

71일 밤 또 위급한 상황이라고 병원에서 전화가 와 근명은 자정 무렵 병원에 도착했다. 누워있는 송면의 가슴에 호흡을 용이하게 하려고 관이 꽂혀있었다. 새벽 235분 송면은 병 다 나으면 무서운 서울 떠나 농사지으며 엄마랑 살자라는 말을 형에게 남긴 채 15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송면의 사망 진단서, 사인은 수은중독증이라고 기재되어있다 / 노동건강연대
송면의 사망 진단서, 사인은 수은중독증이라고 기재되어있다 / 노동건강연대

 

 

송면의 장례와 원진레이온

 

송면의 죽음은 사회문제로 비화하였다.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 장례위원회가 꾸려져 7416개의 단체 연서가 포함된 1차 성명서와 호소문을 발표하고 회사와 1차로 협상했지만, 협성계공은 공개사과를 거부하고 1억 원의 배상 요구에 2,000만 원을 제시하는 등의 현격한 입장차이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76일 기자회견을 열어서 30개 단체 연서의 2차 서명서를 발표하고 낮에는 회사 앞마당에서 항의 방문단이 농성을 하며 항의 집회를 열었다. 793차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유족 등 10명이 노동부 남부지방사무소를 방문했지만, 전경이 막아서 방문이 이뤄지지 못했다. 다음 날 고 문송면군 살인방조 노동부 장관 처벌 촉구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문송면군의 장례 소식지 3호 / 노동건강연대
문송면군의 장례 소식지 3호 / 노동건강연대

 

11일 노동부는 남부지방사무소장을 직위 해제하고 근로감독관 2명을 파면했다. 협성계공은 손해배상 합의금으로 유족에게 7,130만원을 지급했고 17일 사과문을 발표했다. 1988717일 오후 9시 송면은 마석 모란공연 묘지에 안장됐다.

송면의 죽음과 함께 펼쳐진 장례위원회의 활동은, 이후 의사의 진단서 없이도 노동자 자신이 직업병을 주장할 때는 국비로 진단 치료 조치하고, 산재 환자의 휴업 급여를 1989년부터 기존 60%에서 67%로 인상하여 적용한다는 노동부의 발표를 이끌어내었다.

 

협성 사과문 / 노동건강연대
협성계공 사과문 / 노동건강연대

 

72~1716일에 걸쳐 진행된 송면의 장례 투쟁은 직업병 투쟁의 시발점이 되어 원진레이온 투쟁의 불씨가 되었다. 송면이 죽은 해인 1988년에 보도된 원진레이온 사건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총 229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943명의 환자를 발생시킨 국내 최대 직업병 사건이다. 원진레이온 투쟁으로 전문적인 산재 직업병 전문 의료기관인 녹색병원이 설립되었고 이황화탄소 중독에 관한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이 마련되었다.

 

역사는 진보하는가

 

6월 항쟁으로 민주사회의 첫 걸음을 내디딘 1988년 대한민국은 서울 올림픽으로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산업재해와 직업병에 대한 인식은 미미했다.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 장례위원회에서 언론에 수은 중독의 의학적인 부분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한 김록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만 해도 수은 중독 같은 직업병을 진단할 수 있는 의료계의 능력이 모자랐습니다. 의과대학에서 산업의학을 거의 몇 시간밖에 가르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직업병의 진단을 꺼리는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냉전, 반공사상 때문에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취급되었고, 직업병 진단을 하여 노동자를 도와주는 것은 의료인들에게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송면이 근무한 노동현장 역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198874일 장례위원회가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노동부는 이미 1988126일에 협성계공의 수은주입실 노동자 6명 전원이 유소견자이고, 그중 4명은 치료를 필요로 하는 수은중독환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중 3명은 송면과 비슷한 17~18세의 노동자여서 회사는 근로기준법의 연소근로자의 유해위험 중금속직업장배치'에 관한 규정을 위반한 상태였다. 그러나 노동부는 427일 협성계공에 임시건강진단 실시만을 지시했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노동부와 협성계공은 심지어 당사자에게 알리지 않고 계속 작업을 시켰다.

당시 산업재해병원 역시 문제가 많았다.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 장례위원회에서 활동한 박석운은 한 인터뷰에서 송면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7일간 이어진 장례 투쟁 / ⓒ일과 건강
17일간 이어진 장례 투쟁 / ⓒ일과 건강

 

아마 서울대학병원에만 있었어도 송면이는 안 죽었을지 몰라요. 전원하면서 세심한 관리가 안 된 것 같아. 서울대학병원에 있을 때만 해도 송면이가 기자들한테 말도 걸고, 가렵다고 긁어달라는 말도 했다고 해요. 병이 중하긴 했지만 그렇게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서울대에서 꾸준한 관리가 이뤄졌거든요. 우리가 그때 여의도 성심병원에 문제를 제기할 생각도 있었는데, 자칫 투쟁의 방향이 훼손될까 봐 그냥 넘어갔어요.”

 

실제로 산재 지정병원인 한강성심병원은 1988428일 송면의 병에 대해 업무 관련 없음으로 회신하였지만, 53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는 수은 중독증 소견서와 함께 업무 관련 있음으로 회신했다. 성명서에 따르면 성심병원은 수은 주입실에 근무한 다른 두 노동자가 정상이라는 것을 근거로 들었지만, 그들의 건강진단기록에는 수은측정 결과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심지어 두 노동자 모두 다른 의료기관에서는 유소견자로 나타났다. 당시 산재 지정병원에서 직업병이 발생하면 자기 병원에 책임이 돌아가는 구조여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송면이 죽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노동현장은 안전한가. 선뜻 긍정적인 답을 하지 못하는 까닭에 그때 송면의 죽음이 더욱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박서윤ㆍ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3학년.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살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이성적인 사람을 동경하지만, 정작 팍팍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

 

안치용ㆍ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ㆍ문학ㆍ신학 공부에 힘쓴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년의죽음역사의눈물'을 함께 진행한다.

 

노수빈ㆍ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있다.

 

송휘수ㆍ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어렵고 머리 아프지만 글을 쓰고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참고문헌

 

남종영, “원진레이온의 자살행렬은 끝나지 않았다”, <한겨례>, 2013,06,28

산업재해 피해자 문송면 사건 관련 기록, 1989 [데이터 세트]. 고 문송면 산업재해 노동자 장례위원회 [연구수행기관]. 한국사회과학자료원 (KOSSDA) [자료제공기관], 2010-03-02, B1-1989-0001, V 1.0,

이상훈, “세계 첫 공해병 미나마타병의 시작과 경과”, <우리문화신문>, 2018.12.19.

이지홍, “생명의 반딧불이, 산업재해 피해자 문송면 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12.03.

5) 최규진, “2016년 메탄올 중독 사건을 보며 1988년 문송면을 복기하다“, <뉴스민>, 2016.05.10.

6) 이정환, “17살 내 동생의 붉은 소변, 회사는 협박하고 나라는 외면했다“, <오마이뉴스>, 2018.07.22.

7) 이현정, “꽃다운 나이에 죽은 '문송면'을 아십니까?”, <오마이뉴스>, 2012.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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