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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의 문화톡톡] 2Pac: 형제들이여, 우리만 남고 말았지만, 그래도 삶은 또 흘러간다네
[이혜진의 문화톡톡] 2Pac: 형제들이여, 우리만 남고 말았지만, 그래도 삶은 또 흘러간다네
  • 이혜진(문화평론가)
  • 승인 2021.03.02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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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아이들(출처:시사저널)
서태지와아이들(출처:시사저널)

 

새로운 음악? 이상하고 어색한 음악!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힙합뮤직을 들고 한국의 대중음악 씬에 처음 등장했을 때 기성의 평론가들은 댄스와 가사를 메인으로 한 음악은 좀 이상하고 어색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평론가들의 비평을 조롱이나 하듯 데뷔 무대 이튿날부터 팬덤이 형성되는가 싶더니,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서태지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면서 현재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서태지의 등장은 한국 대중음악의 판도만 바꾸어버린 것이 아니라 10대와 20대 청년들을 대중문화의 주체로 호명함으로써 문화혁명을 선도했다는 점에서 이른바 ‘문화대통령’으로서 현재까지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지만, 정작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은 1996년 갑작스런 은퇴와 함께 불과 4년 만에 끝나버렸다.

음악에 파격적인 패션을 도입하고 록 요소는 물론 댄스와 발라드, 헤비메탈과 소울까지 다양한 장르의 네트워크로 시너지 효과를 노림과 동시에 현란한 믹싱기법과 주류문화를 공격하면서 소외된 청년세대를 대변해 주는 혁신적 가사는 단박에 청년층의 폭넓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면서 서태지는 시대와 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매김했다. 당시에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 모든 것을 이루고 있었을 때 서태지는 갓 스무 살에 불과한 청년이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록 밴드인 ‘비틀즈’ 역시 불과 20대의 청년들이 1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대중음악계에 수많은 전설과 사건들을 이루어냈다. 그만큼 대중음악은 파격성과 창의성을 무기로 삼아 주류문화를 공격하면서 소외되고 외로운 청년들을 위로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그런 탓에 10대와 20대가 지향하는 음악은 언제나 새롭고 강렬하다.
 

The Bronx is Burning (출처: Wikipedia)
The Bronx is Burning (출처: Wikipedia)


아메리카 랩/힙합의 진원지: Bronx와 Compton

일찍이 대중문화가 청년담론과 긴밀한 관련성을 갖기 시작한 것은 2차 대전 직후 전쟁으로 인해 철저히 붕괴된 가정에서 스스로 생존을 이어가야만 했던 틴 에이저들의 저항문화(Counter culture)로 소급된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진 부모와 함께 살아가면서 마약 밀매와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는 등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희망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없었던 흑인 청년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힙합뮤직이 21세기에 전 세계 대중음악의 주류를 차지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사건이라 할 만한 일이다. 즉 힙합은 흑인 청년들에게 음악 그 이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힙합문화의 형성은 첨단 자본주의 미국사회의 사회·경제적 변화과정과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었다. 1970년대 뉴욕시의 대규모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인해 급격한 슬럼화를 겪게 된 뉴욕 사우스 브롱스(South Bronx)의 흑인과 히스패닉 청년들 사이에서 언더그라운드 힙합문화가 태동했다는 것은 이러한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도시개발계획에서 배제되면서 흑인 밀집 빈민가의 게토로 전락한 브롱스는 갱단이 활보하게 되면서 대낮에도 총격사건이나 암살사건과 같은 폭력행위들이 자주 발생하고 방화와 폭동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 탓에 “The Bronx is Burning!”이라는 문구는 브롱스 지역의 특징을 대변해주는 문구로 세간에 인식되어 있었다. 브롱스의 슬럼을 배경으로 한 영화 <조커(Joker)>(2019)에서 광대 분장을 한 조커가 춤을 추며 내려오던 계단도 브롱스 167가에 위치해 있다. 영화에서 매우 인상적으로 등장한 탓에 이제 영화 팬들의 관광 명소가 되어버린 이 계단은 교통이 편리하고 상권이 발달해 있는 아랫동네와 비싼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 이주하지 못한 채 도시개발 과정에서 소외된 빈민가가 밀집되어 있는 윗동네를 구분해주는 상징적인 경계선으로 통한다.

미국 동부의 대표적인 흑인 빈민가인 브롱스가 이스트코스트 힙합의 발상지였다면, 웨스트코스트 힙합의 발상지는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에 위치한 컴튼(Compt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부의 대표적인 래퍼들의 고향이기도 한 컴튼은 1980년대 중후반 전 세계에 갱스터 랩을 유행시킨 유명 힙합그룹 N.W.A(Niggaz With Attitude: 행동하는 흑인들, 당당한 흑인들)의 전기영화 <Straight Outta Compton>(2015)에 잘 묘사되어 있는데, 이 영화는 마약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불법 총기 소지로 감옥에 가는 청소년들이 자신들에게 과잉 폭력을 일삼는 경찰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또 그런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가정을 뛰쳐나와 갱스터가 되기를 희망하는 흑인 청년들이 사는 무법지대로서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즉 힙합의 탄생 배경에는 일찍이 재즈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사회에서 흑인의 생존을 둘러싼 차별과 억압의 역사와 같은 사회·정치적인 맥락이 중요하게 자리해 있다.
 

 

투팍 아무르 샤커(Tupac Amaru Shakur-출처:나무위키)
투팍 아무르 샤커(Tupac Amaru Shakur-출처:나무위키)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투팍(2Pac)

1970년대 뉴욕 북부의 브롱스에서 자생한 힙합이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을 이어가다가 1990년대 주류 음악 씬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전 세계 대중음악의 왕좌를 차지하게 된 흐름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흑인 청년들의 비주류 음악이었던 힙합이 오늘날 전 세계 대중음악의 주류로 재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난한 동네의 청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놀이문화이자 단순한 댄스와 파티음악에 불과했던 언더그라운드 힙합뮤직이 어떻게 자생적으로 전 세계의 주류 음악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살펴볼 때 1990년대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갱스터 래퍼였던 투팍(2Pac)은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한국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에 출연한 많은 청년 래퍼들이 하나 같이 힙합과의 우연한 만남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고 증언할 때 거론되는 아티스트가 바로 투팍인데, 힙합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0년대에 두 장의 다이아몬드 앨범을 달성한 투팍은 1996년 26세에 요절했음에도 현재까지 미국 힙합 씬을 대표하는 최고의 랩퍼로 손꼽히고 있는 만큼 그의 영향력과 음악적 파급력은 대단한 것이었다.(미국 내 앨범 판매량 천만 장 이상을 다이아몬드 앨범이라고 부르는데, 힙합 역사상 두 장의 다이아몬드 앨범을 달성한 것은 2000년대의 애미넴과 투팍 뿐이다.)

래퍼의 역량을 가늠하는 것은 무엇보다 가사의 질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아프로 아메리칸의 대물림되는 지독한 가난과 흑인 하층민의 엄혹한 삶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도 자신의 철학을 밀도 있게 접목시켜간 그의 시적인 가사는 미국사회에 경종을 울릴 만큼 강렬한 사회적 메시지로 확대되면서 많은 청년들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등 그의 랩 작사 실력은 역대 최고로 손꼽히고 있으며, 파티음악의 화려함과 솔직하고 거친 갱스터 랩까지 그의 작곡 스펙트럼은 매우 섬세하고도 폭넓은 것이었다.

일찍이 제프 폴락 감독의 농구 영화 <Above the Rim>(1992)과 흑인 청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Juice>(1994)에 출연하여 배우 활동을 시작했던 투팍은 욕설과 독설로 가득한 서부 힙합 최고의 갱스터 래퍼로 훨씬 더 유명세를 떨쳤지만, 그가 쓴 시들은 세상에 대한 냉소와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서로 가득 차있다. 그는 흑인 청년들의 거칠고 난폭한 행위에 대해 정당한 이해와 공감을 표하면서도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것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 쓰레기와도 같은 게토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깨어있어야 할 것을 당부하는 가사를 통해 흑인 청년들을 위한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일에 몰두했다. 단순한 파티음악으로 시작된 힙합뮤직에 사회의 억압과 차별 속에서 간신히 생존을 이어가는 흑인들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대정신을 토해내고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가사에 반영하는 사회운동가의 역할을 했던 투팍의 갑작스런 사망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 그의 음악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현재까지도 전설로 남아있다.

<정부 보조금 혹은 내 영혼>

사냥꾼에게 고기를 나눠 달라고 하는 / 표범같은 꼴이라니 / 고등학교 중퇴자라 해서 모두 / 무지한 것은 아니다 / 실업자라고 해서 모두 / 게으른 것도 아니다 / 나는 그 얼마나 많은 날을 굶주리며 지냈던가 / 하지만 미국 정부에 내 영혼을 빼앗길 바에는 / 차라리 굶주리며 거리를 배회하리라

<올바른 삶을 위하여>

난 Strictly Dope 친구들하고만 어울려

‘그래서’ 난 모두가 생각하는 그 목표를 넘어섰거든

‘뜨거워’ - 나는 흘러내리는 촛농보다 뜨거워

‘쟤는’ - 나랑 같이 책하는 친구 록이다

‘가사’ - 지식 진리 그리고 이해를 나 맘속에 가득 담아

‘취미’ - 랩만이 나의 유일한 레크레이션

‘은퇴’ - 지금 제정신이야?

‘왜’ - 마이크 쥔 손목은 절대 풀려날 수 없는 수갑으로 채워져 있어

‘마약’ - 올바른 길을 가려는데 이건 절대 안 되지

‘섹스’ - 언제나 사랑하는 그녀하고만 단 둘이

‘아기’ - 콘돔을 사용하니까 불가능

‘지루함’ - 바쁘게 사는 내 인생엔 느껴질 리 없어

‘스크레치’ - 디제잉은 Dizz에게 맡겨

‘Dizz?’ - 그는 나의 디제이야, 최고 중의 최고지

‘그래 그래’ - 아냐, 이렇게 말하라고 나한테 돈 먹였어

‘정신은’ - 갈고 닦으며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

‘고마워요’ - 천만에요, 저의 영광입니다

1990년대의 흑인 힙합이 기존의 대중음악과 차별되는 점이 있다면 아마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가정에서 간신히 버터야만 했던 청소년기의 암울한 감정을 날것의 언어로 토해낸 음악 예술이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갱스터 랩이 ‘리얼리티 랩’으로도 불리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실업자가 된 아버지, 마약과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매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던 유년기, 그리고 흑인사회에 만연되어 있었던 사회적 차별과 패배감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청소년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형벌이었다. 지옥과도 같은 자신들의 삶을 날 것의 언어로 뱉어내면서 새로운 공감과 연대를 형성하며 희망을 밝혀준 래퍼 형들은 절망과 좌절에 함몰되어 있던 흑인 소년들에게 더 없이 멋지고 존경스러운 존재로 비춰졌다.

랩은 이런 흑인 청년들의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 적합한 장르라는 것을 깨달았던 투팍은 자신의 랩에 성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존엄성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과 교육의 결합을 통해 흑인사회에 확산되어 있는 상처와 패배주의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데뷔하기 전에 쓴 첫 시의 제목이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The Rose That grew From Concrete)>였다는 사실은 그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질곡을 극복하고 자신의 성장을 경험하면서 피어난 장미였음을 암시한다. 투팍의 랩 가사들은 학교를 비롯하여 청소년 시설과 교도소 등에서 결손가정이나 빈곤과 관계된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의 사망 직후인 1997년 버클리대학에는 <역사 98: 투팍 샤커의 시와 인생>이라는 강좌가 개설되기도 했다.


 

투팍의 자작시 -콘크리트에서핀장미- (출처:네이버 흑인의 블로그)
투팍의 자작시 -콘크리트에서핀장미- (출처:네이버 흑인의 블로그)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그대는 들었는가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장미에 대해

두 발 없이도 걷는 법을 스스로 깨달아

자연의 법칙 따위는 엉터리라는 걸 증명하였고

누구도 믿어려 들지 않겠지만

장미는 꿈을 포기하지 않기에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네

시선 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도

콘크리트를 뚫고 자란 장미는 오래오래 피어있으리!

<참고문헌>

투팍 샤커,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인북스, 2000.

 

 

글· 이혜진

세명대학교 교양대학 부교수. 대중음악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도쿄외국어대학과 도쿄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했다. 2013년 제6회 인천문화재단 플랫폼 음악비평상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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