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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민중 혁명의 빛이 바랜 타흐리르 광장
이집트 민중 혁명의 빛이 바랜 타흐리르 광장
  • 마르탱 루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 승인 2021.03.31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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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은 이집트 혁명의 진원지다. 10년 전, 2011년 2월 11일 바로 이곳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30년 장기집권에 종말을 고한 역사적인 민중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2013년 7월 3일 군사 쿠데타 후 광장을 장악한 이집트 군부는 광장에서 민중 봉기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

 

 

카이로 도심의 타흐리르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나데르(1)는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2011년 이집트 혁명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다. 혁명의 열기를 떠올린 감정의 동요 때문도 아니다. 두려움 때문이다. 인권운동가인 그는 “경찰이 내 휴대폰을 열어보면 난 구속될 지도 모른다”라고 걱정했다. 2011년 혁명 당시 그는 20세 초반의 청년이었다. 그가 참여한 대규모 민중시위는 1월 25일에 시작돼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파흐미는 광장에서 함께 정권퇴진을 외치던 동지들도, 박자에 맞춰 함께 내지르던 구호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은 “국민이 원한다, 대통령은 물러나라!”, “무바라크 퇴진하라!” 등의 구호를 외쳐댔고, 시위 현장 곳곳에서는 난상토론이 이뤄졌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의 혐의만 있어도 끌려간다. 카이로 인권 연구소는 현재 이집트에서 복역 중인 양심수가 최소 6만 명, 최대 10만 명으로 추산한다.(2)

무르시 대통령 하야 후 2014년 압둘팟타흐 시시 정부가 들어섰으나, 2019년 9월 카이로 시내 및 각지에서 반정부시위가 발발하자 타흐리르 광장 인근에선 불심검문이 일상화됐다. 반체제 시위 일체가 불허돼 2주 간 약 4,400명이 구치소로 끌려갔다. 그 중 약 900명이 카이로에서 체포된 사람들이다.(3) 파흐미는 “그 뒤 광장 도처에 사복 경찰이 깔렸다. 행인보다 경찰이 더 많았을 정도”라며, “콧수염과 반들반들한 신발, 그리고 살벌한 분위기가 사복 경찰의 특징이었다”라고 설명했다.

‘대(對)테러척결’과 ‘치안 유지’라는 명분 하에 이런 통제가 계속되고 있는데, 2019년 10월 시작된 광장 재개발도 통제의 명분이다. 정부는 7.5 헥타르에 달하는 이 상징적인 광장을 야외박물관으로 재개발하기 위해, 무려 800만 유로에 달하는 예산을 쏟아 부었다. 오가는 차들로 붐비는 이 도심 한복판에, 무려 17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올랐다. 람세스 2세 시대의 이 오벨리스크는 카르나크 신전에서 가져온 숫양 머리 모양의 스핑크스 4기로 둘러싸여 있고, 오벨리스크 하단 현판에는 지난 1세기, 총 4번의 혁명을 거친 광장의 역사가 기록돼 있다. 과거 타흐리르 광장은 민족주의자 사드 자글룰이 이끈 1919년 독립혁명은 물론 1952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 수립에 이바지한 자유장교단 쿠데타의 주요 거점이었다. 

무바라크 대통령을 축출해 무르시를 첫 민선 대통령으로 세운 2011년 이집트 혁명도, 군부에 의한 무르시 정권의 실각으로 이어진 2013년 6월 30일의 대규모 민중시위도 모두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무르시 대통령을 몰아낸 2013년 7월 3일 이후, 타흐리르 광장은 ‘이집트 자유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군부가 장악해버린 타흐리르 광장

오벨리스크 좌대 위에는 이런 ‘자유’의 역사가 기록돼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자유로이 이곳을 드나들지 못한다. 오벨리스크에 접근할 수도, 그 모습을 촬영하지도 못하며, 최근 설치된 의자에도 앉지 못한다. 지난 5월, 당국은 보안업체 ‘팔콘’에 현장보안 업무를 위탁했다. 군 정보기관 산하의 이 업체는 지난 2014년 정권퇴진 운동이 전개된 10여 개 대학의 ‘치안’ 업무 입찰을 싹쓸이했다.(4) 도시건축가 및 개발연구소 명예 연구원인 갈릴라 엘카디는 타흐리르 광장이 “전쟁터에서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요새 같은 곳”이라고 분석했다. 즉, “광장을 손에 넣는 자가 곧 승기를 가져가는 셈”이다. 갈릴라 엘카디는 최근의 광장 정비 작업이 혁명 후 정권을 잡은 현 정부가 광장에 대해 편집증을 보이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타흐리르 광장의 정치적 영향력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됐다. 당시 명칭은  ‘이스마일리아’ 광장이었다. 1930년 독립을 주장하던 와프트 당의 주도 아래 타흐리르 광장은 카이로 시내 다른 집결지를 제치고 자유와 분노, 그리고 변화의 장으로 거듭났다.(5) 그런데 1952년 ‘해방’이란 뜻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명칭이 바뀐 뒤 이곳은 정부 통제 하의 규합 장소로만 사용됐다. 예외가 있다면 1972년 학생 시위나 1977년 빵 파동 때 정도였다. 따라서 2011년 이집트 혁명 전까지만 해도 민주화 운동 집회는 도심 내 다른 광장에서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11년 1월 25일 혁명 발발 직후 사회민주동맹당을 결성한 활동가 엘함 아이다로스는 “혁명과 더불어 광장이 해방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2011년 혁명의 강도와 열기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을 끌어낸 18일 간의 민중봉기 동안 광장과 그 인근에서는 수많은 시위대가 경찰의 강경한 진압에 맞서 싸웠다. 혹자는 맨손으로 장갑차를 밀어내려 했고,(6) 청년 시위대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민병대의 무수한 습격에도 당당히 맞섰다. 이런 시위대의 용기는 SNS 상에 고스란히 중계되며 “경찰의 절대 권력에 대한 이미지를 깨뜨렸다.” 군부가 과도정부를 장악하고, 논란 덩어리인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과 연루되자, 혁명세력에게 광장은 탈환해야 할 고지가 됐다.(7) 이에 대해 아이다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흐리르 광장은 이집트 군사최고위원회든 (2012년 6월 당선된) 무르시든 모든 정치 지도부에 항거하는 정치적 공간이었다.”

그런데 주요 도로가 교차하는 타흐리르 광장은 시민들이 점거하기에는 쉽지 않은 곳이었다. 갈릴라 엘카디는 당시 이곳의 구조를 바꿔, 혁명의 경험을 영원히 남기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구조물들 밑으로 도보공간을 마련하고, 차도를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식으로. 그러나, 그와 반대로 광장에는 차량 위주의 공간이 마련됐다. 혁명으로 중단됐던 지하 공사장 건설은 압둘팟타흐 시시가 대통령이 되자 곧 마무리됐고, 광장의 약 절반을 뒤덮은 커다란 통풍구는 광장의 모습을 바꿔버리며 모든 연대를 끊어버렸다.

혁명 직후부터 2017년까지 건축가로서 카이로 주지사에게 자문을 제공한 엘카디는 광장 재개발에 관한 의사 결정이 주정부의 권한을 벗어나 ‘국무’ 차원에서, 이를 처리하는 상급 기관에 의해 정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무르시 전 대통령이 축출되기 얼마 전, 군부는 광장에서 군사 행동의 적법성을 과시했는데, 2013년 6월 30일 시위 당시 무르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던 수백만 군중들이 탱크의 호위를 받으며 광장으로 몰려간 것이다.(8) 

이런 광장 점거 전략은 2013년 10월에도 지속됐고, 광장의 거대한 연단 위에서는 1973년 중동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열렸던 축하연이 그대로 재현됐다. 아이다로스에 의하면 이집트 ‘국민’의 승리를 자축하는 이 공식 행사는 “무바라크 시대의 축하 행사와 완전히 판박이”였다. “군사최고위원회의 (무함마드 후사인) 탄타위 위원장과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을 주축으로 새로운 독재정권이 자리잡은 것이다. 군부는 그렇게 타흐리르 광장을 장악했으며, 이는 공공장소 전체에 대한 통제를 의미했다.” 

그 다음 달부터 비공식적인 시위가 금지됐고, 2013년 11월에는 진입이 차단된 광장에서, 소수의 장교만 참석해 “두 차례 혁명의 희생자”에게 바치는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그리고 타흐리르 광장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라바 알아다우이아 광장에는 어떤 현판도 걸리지 않았다. 2013년 8월 14일 무르시 지지 시위대에게 자행된 탄압으로 희생된, 수백 명을 기리는 그 어떤 현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라져가는 투쟁의 기록들 

엘카디는 희생자의 이름이 담긴 이 기념비가 “우스꽝스러운 조형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르 아부 바크르도 이를 “위선”이라고 비난했다. 아부 바크르는 광장 인근 모하메드-마흐무드 거리의 유명한 벽화 제작에 참여한 예술가다. 그는 광장에서 죽어간 희생자의 얼굴과 투쟁의 일상을 벽화로 담아냈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수백 명의 시위대는 여전히 그 정당성을 얻지 못했다. 정권이 혁명의 기억을 독차지하는 것에 반대하는 그는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희생자의 벽”을 군복 무늬 그림으로 뒤덮었다. 

2013년 11월말, 조롱거리로 전락한 기념비를 훼손하려는 반정부시위대의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 상징적인 기념물은 결국 살아남아 혁명 3주년을 맞이했다. 2014년 1월 25일, 각계 진영으로 나뉜 수많은 군중들은 군대에 둘러싸여 혁명기념일과 더불어 경찰의 날을 기념했다.(9) 그러나 이듬해에는 민주사회동맹의 활동가 10여 명만 현장에서 혁명일을 기념했다. 이들이 평화행진을 하는 도중, 민주사회동맹당 소속 예술가 샤이마 사바흐의 목에 경찰의 총알이 관통했다. 아이다로스는 “사바흐가 타흐리르 광장까지 가지도 못한 상태였다”라고 회고한다. 정부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타흐리르 광장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것이다. “시위는 물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사바흐의 사망 후 한 달,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 깃발을 단 높은 깃대가 들어섰다. 타흐리르 광장의 주역들은 이를 보며 ‘혁명 죽창’이라고 불렀다. 같은 해 9월, 카이로 미국 대학에서는 담벼락 한 곳을 허물었다. 이로인해 모하메드-마흐무드 거리에 있는 아부 바크르의 벽화 대부분이 부서져내렸다. 시위대가 그림을 남긴 콘크리트 블록들이 지금은 광장으로의 진입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돼버렸듯, 투쟁의 기록은 그렇게 사라져갔다.(10) 

혁명관련 기록들의 폐기와 말소는 가속화됐다. 행정수도의 이전으로 정부기구 다수가 수도를 떠났기 때문이다. 2016년에는 광장 곁을 지키던 막강한 권력의 내무부가 외곽으로 이전됐고, 2021년에는 다른 행정 기구 다수 역시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의 시범 계획안에 따라 카이로 동부에 한창 건설 중인 신 행정수도로 떠난다. 미래의 대통령궁 앞에는 혁명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린 광장이 펼쳐질 예정이다. 신 행정수도 홍보 책임자 히샴 나기브는 이 “국민 광장에서 군 장례식이 거행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엘카디는 유구한 역사의 구도심이 “지휘권을 모두 박탈당한 채 아무런 의미도 띠지 못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세기 초에서 최근의 혁명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타흐리르 광장이 저항의 주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카이로가 모든 활동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나일강 반대편에 카이로 대학이 위치한 것도 비슷한 영향을 미쳤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부 바크르는 자신의 벽화가 사라진 것에 대해 애석해하지 않았다. “벽화 자체가 변혁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변혁의 흐름이 끊긴다면 내 그림 또한 그 상태 그대로 온전히 존재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다른 시위 참가자들은 이곳에 대한 기억을 계속 보존하길 원한다. 2011년과 2014년 사이 모지린 공동체에서 촬영한 858시간 상당의 영상은 온라인상에서 ‘저항의 기록’을 보여준다.(11) 한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단순히 보존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언제든 끄집어낼 수 있는 기록이라는 게 중요하다. 즉,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무기인 것이다.” 

비록 혁명의 기록, 정치적 의미가 지워지고 있지만, 타흐리르 광장은 여전히 (몇 안 되는) 상징적 장소로 남아있다. 2020년 11월에는 한 남자가 정권의 부패를 규탄하며 이곳에서 분신자살하는 모습이 동영상으로 촬영되기도 했다. 현장에 남은 역사의 기록을 지워버리려는 권력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광장이 지닌 저항의 정체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글·마르탱 루 Martin Roux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라디오 프랑스> 이집트 특파원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 당사자의 요청으로 가명 처리했음.
(2) Karine G. Barzegar, ‘Jamais l’Égypte n’a connu de période plus noire pour les droits humains 최악으로 치닫는 이집트 인권’, <TV5 Monde>, 2020년 12월 8일, https://information.tv5monde.com 
(3) 해당 보고서는 이집트자유인권위원회 사이트 www.ec-rf.net에서 아랍어로 조회 가능. 
(4) Yezid Sayigh, ‘Owners of the Republic : An anatomy of Egypt’s military economy’, Carnegie Middle East Center, Beyrouth, 2019년 11월 18일.
(5) Galila El-Kadi, ‘Les places de la colère et du changement 분노와 변화의 현장’(아랍어판), <Amkenah>, 11호, Alexandria, 2014년 10월.
(6) Leyla Dakhli (dir.), ‘Défier l’autorité. L’homme face au blindé 정권에의 도전 : 장갑차와 맨몸으로 맞선 시민’, <L’Esprit de la révolte. Archives et actualité des révolutions arabes 저항 정신 : 아랍혁명의 기록과 현황>, Seuil, Paris, 2020.
(7) Mona Abaza, ‘Post January Revolution Cairo : Urban wars and the reshaping of public space’, <Theory, Culture and Society>, 제31권 7~8호, London, 2014년 9월 30일. 
(8) Alain Gresh, ‘En Égypte, la révolution à l’ombre des militaires 알랭 그레슈, ‘군부 그늘로 들어간 이집트 혁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3년 8월호. 
(9) Céline Lebrun, ‘La révolution égyptienne au prisme de ses commémorations 기념식으로 본 이집트 혁명 (2011~2016)’, Assia Boutaleb, Choukri Hmed 지도, 파리1대학(Panthéon-Sorbonne), 2017년 6월.
(10) Laura Monfleur, ‘À l’épreuve des murs. Sécurisation et pratiques politiques dans le centre-ville du Caire postrévolutionnaire 벽의 시련: 혁명 후 카이로 도심의 정치 관행 및 치안 정국 (2014~2015)’, <Égypte-Monde arabe>, 16호, Cairo, 2017년 10월 15일.
(11) https://858.ma 에서 해당 영상을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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