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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나리>와 일상의 힘
[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미나리>와 일상의 힘
  • 강선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04.05 1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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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春, 늦봄

 <만춘>은 자신이 떠나고 나면 홀로 남겨질 아버지를 위해 결혼을 늦추고만 있는 노리코(하라 세츠코)와, 그런 그녀를 위해 재혼을 결심하는 아버지(류 지슈)의 이야기를 담은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제목이다. <만춘>은 늘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중을 하고 배웅을 하는 일상의 풍경들을 보여주는데, 그런 풍경들 속에서 그리고 그들의 손이 닿는 일상의 사물들에게서 세월과 서로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난다. 홀로 옷을 다리지도 못하고 밥은 태워버리고 마는 아버지를 두고 떠날 수 없는 딸은 아버지 곁에, 그 공간에, 또 그 시간에 머물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다 커버린 딸을 자신이 붙잡고 있다는 생각에 딸을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자신 역시 재혼을 하겠다고 말하며. 재혼을 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노리코는 서운함을 느끼지만 이내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결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그것이 다른 누군가와의 삶이든 홀로 남겨질 삶이든 노리코가 없는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노리코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떠난 여행의 밤은 시간이 묻어 있는 모든 것들은 그대로인데 시간이 홀로 저만치 떠나고 있음을 알려온다. 도코노마에 놓인 자기 위로 달빛에 드러워진 대나무의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린다. 정물(靜物)과 같은 그들의 마음이 흘러가는 시간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이다. 자연히 흘러가는 삶을 그들은 그렇게 받아들인다. 오즈 야스지로는 늘 이렇게 일상적인 풍경들을 통해 무심히 흘러가버리는 삶의 시간들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정물들처럼 마치 정지해버린 듯 일상을 더디게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인물들은 언제나 눈치 챌 새 없이 지나가버리는 삶의 시간들을 서서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나간다. 시간은 그렇게 이중적이다. 시간은 전쟁 중 건강이 나빠졌던 아버지를 더디지만 서서히 회복시키고, 그러는 사이 어느새 훌쩍 지나가버려 딸을 떠나보내야 하게 되는 것이다.

 

<꽁치의 맛>의 풍경

이런 오즈 야스지로의 일상 풍경은 전후의 일본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만춘>과 아주 동일한 방식으로 아버지와 딸을 그러내고 있는 그의 유작 <꽁치의 맛>에서는 이것이 더 잘 드러난다. <꽁치의 맛>에서도 여전히 류 지슈가 연기하고 있는 아버지는 스승의 가게에서 함께 참전했던 부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전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하던 그는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회한에 잠겨 말한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회한에 잠겨 말한다. ‘오히려 패전한 게 다행이 아닐까.’ 전쟁 이전의 시간으로 절대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마치 그럴 수 있을 것처럼 조금씩 일상들을 매만져가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과 그러는 새 훌쩍 떠나버린 시간과의 간격이 여기에도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출가를 한 딸이 떠난 그 자리에는 여전히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간직하고서 그대로 있는 정물들, 공간들이 있다. <만춘>이 늦봄의 이야기라면 <꽁치의 맛>은 가을의 이야기이다. 일본에는 ‘꽁치는 서리가 내려야 제 맛이 난다’는 속담이 있다. 가을에 먹는 꽁치가 맛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꽁치의 맛’은 가을의 맛, 아마도 자신의 나이듦을 직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는 이렇게 일상의 풍경을 통해 축적되고 흘러가는 시간들, 개인들의 시간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시간, 국가의 시간들의 시간에 가닿는다.

 

<미나리>와 일상을 그려내는 영화의 힘

<미나리> 역시 이러한 일상의 풍경을 보여주는 힘을 잘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다. 80년대 미국으로 떠난 한국인 이민자가 일구는 밭이 첫 과실을 맺기까지의 시간 동안, 낯설지만 비옥한 그 토양과 그들이 속한 세계가 조금씩 드러난다. 아내(한예리)와 매일같이 같은 방식으로 싸웠을 남편(스티븐 연)의 이야기들, 그럼에도 결국 보듬었을 두 사람의 이야기들. 이 상자에서 저 상자로 끊임없이 옮겨가기 위해 도착하는 병아리들처럼 그들의 일상은 반복되고 축적되어왔을 것이다. 이들은 레이건이 농업을 장려하고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과 함께 아칸소의 밭을 일구기 시작하는데, 이 역시 이들에게는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붙들어 온 희망과 불안 사이의 가느다란 실일 것이다. 병아리 감별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미국으로 떠나게 하는 그 끈, 언젠가 아내의 어머니를 모셔올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끈, 이것들이 늘 이들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아주 가느다래서 언제 끊어져버릴지 모르는 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이민자의 삶은 <미나리>에서 그들의 일상과 함께 표현된다.

 

<미나리>는 이들 부부의 삶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삶의 풍경들도 함께 그려내고 있다. 다른 사람의 농사일을 도우며 늘 엑소시즘에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십자가를 매고 걸으며 ‘이것이 나의 교회야’라고 말하는 폴(월 패튼)은 아칸소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백인 농부의 삶의 궤적을 그러낸다. 미국의 기독교적 전통 아래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몰락한 삶을 보여주는 이러한 폴의 서사는 한국인 이민자들의 삶과 조우하고 하나의 미국적 풍경을 이룬다. 폴의 서사뿐만이 아니다. 데이빗(앨런 김)이 교회에서 사귄 친구, 조니(제이콥 M. 웨이드)의 서사는 어떤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네 얼굴은 왜 그렇게 평평해?’ 묻던 조니는 밤새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와 그런 그녀에게 외박을 비밀로 해달라는 어머니의 남자친구와 살고 있었다. 이러한 일상들이 중첩되어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이것이 바로 <미나리>가 개인들의 시간으로부터 사회의 시간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래서 아이들을 봐주러 한국에서부터 온 할머니(윤여정)가 불씨를 퍼뜨리고 모든 것들의 잿더미가 된 뒤에도 자라나는 미나리는 아칸소 풍경 속 모두에게 다시금 살아가게 하는 힘처럼 느껴진다. 저 먼 이국의 땅에서 날아온 미나리 씨앗은 ‘미국 바보’들에게도 원더풀하다. 할머니는 <미나리> 속에서 그런 존재이다. 할머니가 알려준 고스톱은 데이빗과 조니의 놀이가 되고, 신앙심은 있지만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내와 폴의 교회를 이어준다. 이곳에서는 무엇인가가 옳고 그르다는 것이 꼭 중요하지 않다. 문화는 만나고 서로는 그것으로 위안을 얻는다. 쿠키도 굽지 못하고 손자를 ‘브로큰 딩동’이라고 놀리며 남자 팬티를 입고 앉아 레슬링 경기를 보는 할머니는 그렇게 희망을 심는다. 심장이 약한 데이빗에게 조금 뛰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뱀이 나오는 곳에도 가도 괜찮다고 말하는 할머니. 그렇지만 손자의 오줌을 마시고도 웃어넘기고, 손자를 다치게 한 서랍을 혼내주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가 심은 미나리는 익숙하고도 낯선, 비옥하고도 척박한 이 땅에 그렇게 그럼에도 살아갈 힘을 퍼트린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강선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강사 및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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