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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당신의 이웃은 어디에 있나요? (1)
[이병국의 문화톡톡] 당신의 이웃은 어디에 있나요? (1)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1.04.19 09: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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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로나19라는 생존의 위협 속에서

 

한국의 첫 코로나19 확진자는 2020년 1월 20일에 나왔다. 약 한 달 뒤인 2월 18일, 대구에 사는 예순한 살의 31번째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코로나19 감염 확진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K-방역이라는 일련의 방역 시스템과 국민의 자발적 방역 동참으로 확진자 수는 줄었다가 몇 차례의 위기를 거쳐 12월 24일에는 일일 확진자 1237명의 최대치를 기록하곤 2021년 3월 현재 300~400여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확진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팽배하기도 했다. 코로나19가 최초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 신천지와 같은 사이비 종교 단체를 포함한 극우 개신교 단체나 성 소수자들을 향한 혐오의 표현들이 온라인에 가득했다. 확진자의 동선이 공개된 방역 초기에는 감염을 개인의 부주의로 간주하여 그들은 물론 가족의 신상까지 파헤치며 비난하는 등 증오와 혐오가 넘쳐났으며 일부 언론에서도 이를 조장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장기간의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노동자 및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누적됨에 따라 계층 간 갈등이 심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파트 가격은 코로나19와 무관하게 지속적인 상승을 보였으며 주식 시장은 코로나19 유행 초기 급격한 하락을 맞았으나 이후 반등 장세를 보이며 코로나19 이전 지수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사상 최대의 증시 활황을 이끌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빚내서 투자한다는 이른바 ‘영끌’과 ‘빚투’ 현상은 자고 일어나면 가격이 올라 시장에 참여하지 못해 ‘벼락거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숙주 삼아 ‘패닉 바잉’을 불러왔다. 여기에 비트코인마저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며 이를 확보하지 못한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키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자는 의미의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깝게’라는 구호 아래 언택트 시대 비대면 온라인 교류의 활성화는 디지털 소외 문제를 가시화하기도 했다. 김창엽 시민건강연구소 소장의 말처럼 코로나19는 생물학적으로 취약한 존재뿐만 아니라 주거, 노동 조건이 열악한 경제적 약자의 불평등 문제를 폭로하며 노동 시장, 노사 관계, 사회 계급 등의 사회 심층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봉쇄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모순을 드러낸 셈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권력 관계 불평등과 불균형을 핵심으로 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학교, 종교 단체, 자산가와 부유층, 전문직 등은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에 용이하며 이는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반면 노동자나 영세 자영업자, 중소기업 등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 어려우며 노동을 강제하거나 소득 감소를 보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1) 일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곤란한 상황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게다가 수입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아파트 매입이나 주식 투자와 같은 금융 시장에 참여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그러니 사실 코로나19는 맥거핀(macguffin)일 수도 있다. 한국 사회를 포함한 전 세계적 팬데믹은 사회 구조의 주변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며 이를 바탕으로 어떤 국민을 국민으로 통합하고 배제할 것인지 구획 짓는 기능을 수행토록 한 것인지도 모른다. 국민과 비국민의 분리가 어제오늘만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코로나19는 이를 전 세계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연대가 아닌, 재영토화된 국가에서 통합이 가능한 국민을 중심으로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치적 공동체의 완성은 그 공동체의 모습이 비록 선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방역 시스템을 전유한다고 하더라도 지배 권력이 구획한 영토 안에서만 상상된 것으로 남을 위험이 크다.

 

무엇보다 실질적 생존에 위협이 되는 코로나19는 지젝(Slavoj Žižek)의 말처럼 분명한 경계들을 세워 우리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적들을 격리하라는 이데올로기적 압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또 하나의 훨씬 더 이로운 이데올로기적 바이러스로 국민국가를 넘어선 사회, 전 지구적 연대와 협력의 형태를 실현하는 사회를 사유하는 바이러스2)를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악수하지 않고 필요하면 고립되는 것으로서의 연대3)처럼 말이다.

 

사회적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그 위기로 말미암아 배제되고 소외된 존재의 삶을 형상화했던 작가들은 다른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고립을, 그 고립을 초래한 구조적 문제를 폭로하고, 생존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출판사의 요구와 결합하여) 발빠르게 코로나19 시대를 관통하는 각자의 삶을 나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배제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작품들을 앤솔러지의 형태로 묶어 발표하였다.4) 그렇게 작가들은 따로 또 같이 연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출처_보스토크프레스
출처_보스토크프레스

 

이 연대의 목소리는 각자의 공간을 경유하며 자신의 삶, 이를테면 생존에의 욕망을 전유한다. 이때 이 생존에의 욕망은 방역 중심의 사회적 요구에 저항 없이 참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되며 이는 개인적 수행에 기반을 둔다. 푸코식의 규율 사회에서 한병철의 피로 사회로의 전환을 가져온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등에 업고 코로나19의 상황은 방역이라는 규율을 내면화하여 자발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착취의 피로를 높이는 셈이다. 생존을 개인의 영역으로 치환하여 희생을 강요하는 구조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는 일조차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게 나는 버틸 수 있었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한달이란 시간이 흐르면 나는 이곳저곳에 돈을 내야 했고 또 한 달이 흐르면 또 내야 했다. 월말이 다가오고, 그런 생각에 밥을 할 생각도 안 들 때면 지친 모습을 보이기 미안해 다시 나의 집으로 오곤 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이번엔 정말로 망했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보니 그동안엔 조금씩만 망해왔던 거구나. 많은 도움의 손길 속에서도 가끔은 세상에 혼자인 것만 같았고, 그래서 너무 무서웠다.5)

 

코로나19로 인해 학원 문을 닫아야 했던 이주란의 경험이 담긴 에세이에서 발췌한 위 인용문은 경제적 어려움을 개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느낀 두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주변의 도움을 통해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으나 그것은 잠시 잠깐의 위안일 뿐이라서 생존을 영속할 수 있는 삶의 물질적 조건 자체를 충족하기엔 어림없는 일이다. 비록 이 글의 바탕이 되는 지난해 3월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어 학원이 다시 문을 열기도 했을 테지만, 반복된 집합금지 명령의 사회적 요구는 코로나19로 인해 발생한 생존의 위협을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결박시킨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하는 방역 메커니즘은 엄격한 자기규율을 내면화하게 하여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제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위협이라는 공포를 조장하면서 말이다.6)

 

2. 내가 벼락거지가 된 건가

 

자신의 선택이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강제된 선택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남들과 다른, 남들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이러한 감정은 구조의 불합리에 저항하는 방향이 아닌 나와 비슷한 가까운 존재에게 투사되어 분노로 분출되기도 한다. 친밀한 존재였던 타인이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물질적 조건을 비교하며 자신의 불안을 전이된 분노로 그에게 투영하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이 자기 삶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 계급적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부지기수일 것이다. 나에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는데 단지 나와 친밀감을 나눴던 존재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일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정체성에 응답하지 못한 자신과 타인을 대비되는 존재로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 상대적 박탈감은 ‘벼락거지’의 아이러니처럼 실존을 위협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출처_교보문고
출처_교보문고

 

김유담의 「내 이웃과의 거리」7)는 코로나19 초기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 단편이다. 화자인 정윤은 상우와 결혼하면서 K구의 신축 S아파트에 입주한다. 상우는 B아파트를 매입해 리모델링 한 후 들어오자고 하였으나 정윤이 그곳이 지은 지 25년도 넘은 낡은 아파트라서 신혼 생활을 꾸리기에 좋지 않다고 판단하여 새 아파트의 쾌적함과 아늑함을 누릴 수 있는 신축 S아파트의 전세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전세 계약이 만료되는 2년 후, 정윤은 만삭이었고 주변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하자 집을 사야 한다는 불안과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 사이에서 전세 계약을 연장하기로 결정한다. 그런 와중에 정윤은 K구 맘카페 육아 정보 게시판을 통해 알게 된 혜미와 가까워진다. 그들은 비슷한 육아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점과 옆 단지에 산다는 이유로 띠동갑의 나이 차가 무색하게 서로의 일상을 나눈다. 그런 한편에서 정윤은 “최저가와 핫딜 일정을 줄줄 꿰고 있는 혜미 덕분에 육아 물품을 저렴하게 구입한 적도 있었지만, 때로는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52쪽)을 하며 거리를 두고자 한다. 새해가 되면서 아기를 단지 내 어린이집에 보내고 자신은 복직할 계획을 세운 정윤에게 코로나19는 재앙으로 다가온다.

 

오래되어 낡은 B아파트를 ‘영끌’하여 매입해 살고 있는 혜미와 신축 S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는 정윤의 차이는 기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가사노동과 육아라는 동일한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그들은 일종의 자기-동일적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될수록 밀착되는 관계가 답답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윤은 한 대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4천 원짜리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사 마실 돈도 없다고 엄살을 떠는 혜미가 10억짜리 집을 소유한 자산가라니, 천 원이라도 더 싼 기저귀 핫딜을 찾느라고 밤잠을 설치는 혜미를 궁상맞다고 속으로 비웃었는데 오히려 혜미 입장에서는 마흔 살이 되도록 내 집 마련도 하지 못하고 돈을 쉽게 써대는 자신이 더 우스워 보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58~59쪽)

 

그러나 그 관계는 몇천 원에 절절매고 최저가와 핫딜에 집착하여 궁상맞다고 속으로 비웃던 혜미가 10억짜리 집을 소유한 자산가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무너진다. 이때 정윤이 느끼는 혼란은 (조금은 우월한 위치에서) 혜미에게 투사한 자기-동일성이 스스로 만든 환상이었다고 깨닫게 되면서 비롯된 것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체제가 요구하는 물질적 조건을 정윤 자신은 갖추지 못했다는 전락의 공포를 체감케 되는 순간인 셈이다. 경제적 층위에서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실감은 자기-동일성에 투사된 정윤의 허위를 폭로한다. 게다가 4만 원이었던 KF94 마스크가 1만천 원의 마스크로 돌아온 상황에 대한 정윤의 반응은 혜미에 대한 정윤의 인식이 소비를 둘러싼 경제적 우월감에 바탕을 둔 기만이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기만이 정윤의 본질이라고 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불투명한 존재가 타자를 통해 자신을 반영하여 상상하고자 하는, 인정받기를 바라는 심리적 기제로부터 기원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자신과 유사한 경제적 층위 내에서 타자와 관계 맺기를 바라는 항상적이고 부분적인 맹목에 기초한 것인지도 모른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말처럼 자기-동일성, 더 특수하게는 완벽한 일관성에 대한 요구는 일종의 윤리적 폭력이기에 그것을 중지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항상 자기-동일성을 표명하고 유지해야만 하며 타자들 역시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폭력에 맞서는 일이 된다.8) 나와 타자의 관계는 동일성의 층위에서 사유되는, 그래서 선택의 책임을 져야만 하는 관계가 아니다. 버틀러는 레비나스를 들어, 나는 나의 행동 때문에 책임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차적이고 뒤집을 수 없는 민감성의 층위에서, 즉 행동이나 선택의 모든 가능성에 선행하는 수동성의 층위에서 확립된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책임감을 갖는다고 말한다.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나의 능력으로 인해 나는 관계로서의 책임에 연루되는 셈이다.9) 타자와 관계를 맺거나 지속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선택했다기보다는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영향 관계들, 이를테면 돌봄노동,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요구, 친밀함에 대한 심리적 위안 등에 의해 선택 이전에 이미 그렇게 되도록 구조화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관계 맺기로 인해 발생한 고통은 나의 주도적인 타자와의 자기-동일성이 붕괴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관계 맺음을 둘러싼 사회적 구조가 나와 타자가 맺도록 한 관계가 일종의 외상이 되어 내가 책임져야 할 것으로 강제하는 폭력으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벼락거지’로 자신을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경제적 요구를 내면화하길 중지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연후에 우리는 비로소 타자와 나를 비교하고 분노하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지닌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중요한 점은 타자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윤에게 불쾌를 야기한 혜미의 삶은 정윤에 의해서 감각되고 재단된 것이지 혜미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혜미가 행하는 일련의 행위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자각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분명한 자기 인식에 바탕을 둔 혜미는 정윤과의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정윤이 혜미에게 취하고자 했던 목적,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으로 인해 세계로부터 소외된 기분을 위무해줄 존재의 자리에 충실했다. 혜미는 아파트 가격에 의해 부여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 부여된 지위를 수용하면서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성하여 안정된 존재로 안착하고자 하는 현실을 산다. 이를 세계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라 부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내면화하면서도 배제나 분리되는 잉여적 존재가 되는 것에 저항하는 적극적 주체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혜미의 행위야말로 스스로를 비출 타자를 상실했다고 상상하는 우리의 정상성을 되묻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동체는 상상된 것이어서 그것조차 자본화된 사회에서 요구하는 관계 맺기처럼도 보인다. 동일한 계층의 사람과도 친밀한 환대가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 우리는 처한 셈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나와 타자의 관계, 그 친밀함을 무너뜨리는 것은 코로나19와 같은 질병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층위를 의식하고 구분하려는 데에 있다.

(다음 호에 계속.)

 

1) 김창엽, 「코로나19의 과학과 정치는 어떻게 만날까?」, 기모란 외, 『멀티플 팬데믹』, 이매진, 2020, 56~68쪽 참조.

2)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강우성 옮김, 북하우스, 2020, 55쪽.

3) 같은 책, 99쪽.

4) 시인과 소설가를 중심으로 하여 코로나19를 소재로 하여 묶인 앤솔러지는 시, 소설, 에세이 등 여러 장르에서 다양하게 출간되었다. 지난 한 해 출간된 것 중 일부를 묶어 보면, 『코로나 19 블루』(한국의사시인회, 현대시학사), 『코로나19 극복 대한민국 36 시인 시특선』(심정숙 외. 한비CO), 『코로나? 코리아!』(이광복 외, 청어), 『지구에서 스테이』(김혜순 외, &), 『아침이 오면 불빛은 어디로 가는 걸까-코로나19 대구 시인의 기록』(윤일현 외, 학이사), 『사진을 많이 찍고 이름을 많이 불러줘』(김안 외, B공장), 『코로나19 기침 소리』(엄현주 외, 나무와숲), 『코비드 19의 봄』(이덕화 외, 문학수첩), 『혼자서는 무섭지만』(오은 외, 보스토크프레스), 『쓰지 않을 이야기』(조수경 외, 아르테), 『팬데믹:여섯 개의 세계』(김초엽 외, 문학과지성사) 등이 있다.

5) 이주란, 「만약 내 삶에서」, 오은 외, 『혼자서는 무섭지만』, 보스토크프레스, 2020, 81쪽.

6) 그러나 한편으로 외국의 사례들을 보면, 그 저항이 실제의 위협이 됨을 알 수 있다. 이 모순적인 상황을 어찌할 수 있을까.

7) 김유담, 「내 이웃과의 거리」, 김안 외, 『사진을 많이 찍고 이름을 많이 불러줘』, B공장, 2020.

8)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양효실 옮김, 인간사랑, 2013, 75쪽.

9) 같은 책, 155쪽.

 

 

글 · 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제4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동시대 한국인이 쓴 시와 소설 읽는 걸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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