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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수연의 문화톡톡]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류수연의 문화톡톡]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 류수연(문화평론가)
  • 승인 2021.04.2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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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의 『여름의 빌라』에 대한 소고

살면서 무엇인가에 매혹되는 순간이 있다.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것은 사랑일 수도, 우정일 수도, 때로 존경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들에서도 그러한 순간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읽는 순간 성큼 다가와,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그런 이야기들……. 백수린의 작품이 바로 그러하다.

백수린은 경계를 가장 예민하게 자각하는 작가이며, 동시에 쉼 없이 그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이국의 땅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그가 담아내는 풍경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사람을 만나고, 다투고, 오해하고, 상처 받고, 위로 받는 지극히 평범한 삶의 모습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묘하게 디아스포라라는 주제에서 비껴난다. 오히려 어느 도시에서나 볼 법한 지극히 일상적인 고독을 포착하는 것이, 그의 서사적 특징이다.

 


국경을 넘었다고?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별일도 없이,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버리다니. 나는 좀더 무섭고 복잡한 국경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 「국경의 밤」, 『참담한 빛』, 창비, 2016, 295쪽

 

매혹의 첫 순간에 마주친 작품은 바로 국경의 밤이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포박해왔던 경계라는 것이 가진 절묘한 어긋남을 보여준다. “아무렇지도 않게, 별일도 없이, 순식간에넘어서버린 국경을 자각하는 일. 이 찰나의 각성은 강렬한 카타르시스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이유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사로잡혀 있던 국경이란 의미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일종의 벽과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분단이라는 현실적인 정치상황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휴전선은 결코 열리지 않는 벽으로 존재해왔고, 삼면은 바다인 나라에서 국경은 실제로 감각할 수 없기에 더욱 견고한 그 무엇으로 존재해왔다. 따라서 우리에게 국경을 사유한다는 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벽 앞에서 홀로 메아리를 감당해야 하는 운명적인 단절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백수린의 작품은 그것을 순식간에 무효화한다. 그는 경계를 가장 예민하게 사유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 경계가 한 인간의 삶을 차단하는 그 무엇은 될 수 없음을 가장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그것은 관계라는 보다 넓은 차원으로 확장된다. 나와 당신 사이를 가로지르는 이 견고한 경계는, 사실 언제든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설 수 있는 차이의 선에 불과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작가 자신이 언제나 더 넓은 세계 속에서 한 개인으로서 존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국의 땅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하는 인물들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은 것 역시 이러한 사유로부터 기인한다. 이러한 감각을 가진 한 개인에게 국경이란, 타인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리라. 하지만 인간은 누군가와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한다는 숙명을 가진 존재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무엇인가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일지도 모르겠다.

 

사진.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출처: 교보문고
사진.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출처: 교보문고

 

여름의 빌라(문학동네, 2020)의 표제작인 여름의 빌라는 캄보디아에서 보낸 휴가와 그 이후를 담아낸 작품이다. 주아는 오래 전 배낭여행에서 만난 베레나와 한스 부부로부터 여름을 함께 보내자는 초대를 받는다. 스물한 살 첫 배낭여행에서 만난 그들과의 인연은, 결혼 후 남편인 지호와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더욱 긴밀하게 지속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불안정한 시간강사의 삶을 영위하면서 어느 순간 연락은 끊겼지만, 그럼에도 이 초대에 반갑게 응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주아가 남편 지호와 향한 곳은 캄보디아의 시엘레아프. 앙코르와트의 거점 도시인 그곳에서 그녀는 뜻밖의 자각을 마주한다. 그것은 주아와 지호, 그리고 베레나와 한스 사이에 놓인 역사적인종적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을 그저 낯선 환경에서 오는 불편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오히려 그 불편함은 맨 처음 주아가 서점에서 한스와 대화를 나눴던 순간부터 독일에서 보냈던 시간, 그리고 그 이후까지. 그들의 관계 속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것이었다.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와 문화마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다른 한 면마저 결코 넘을 수 없는 휴전선으로 차단된 작은 반도 출신인 내게 당신들과 함께 보냈던 며칠의 시간은 내가 세계시민으로 거듭난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줬던 거죠.

- 「여름의 빌라」, 46쪽

당신들은 동양을 좋아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남북 관계나 한국전쟁밖에 몰랐어요. 하지만 당신들의 동양에 한국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 부부 덕분에 여행 책자만으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세계를 좀더 알 수 있었고, 그것이 좋았습니다.

- 「여름의 빌라」, 50쪽

지호와 나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고, 일상을 벗어나서, 우리가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혼부부였던 시절을 알고 있는 당신들과 함께 지내면 우리의 관계가 거짓말처럼 예전같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거겠죠.

- 「여름의 빌라」, 47쪽

 

주아는 그 만남을 돌이켜본다. 첫 번째 여행에서 그들과의 만남은 주아에게 마침내 세계인이 되었다는 일종의 자신감을 주었다. 유학 시절에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충만한 세계를 만나게 해준 존재였다. 그리고 다시 현재, 그들의 초대는 좌절과 절망으로 무너져버린 지호와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로 다가왔다. 이 세 번의 인연이 이어질 동안 주아가 간과한 것은, 그 모든 충만함은 그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은폐함으로써만 가능했다는 사실이었다.

맨 처음 주아가 그 차이를 각성한 것은 발 마사지 가게에서였다. 주아의 피부색은 그들보다 어두웠고, 그녀의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던 젊은 안마사의 피부색은 그보다 더 어두웠다. 피부색에 따라 각자의 위치가 정해진 것 같은 이 기묘한 구도 속에서, 주아는 오랜 시간 자기 안에 감춰져 있던 불편함과 마주한다.

그동안 주아는 그들과 연락이 소원해진 원인을 자신의 삶이 엉망진창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호의에 제대로 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책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마침내 깨닫는다. 오랜 시간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그 진실을 말이다. 그것은 이 관계가 오직 그들의 일방적인 호의에 의해서만 지속될 수 있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여름의 끝은 파국이었다. 관광지에서 마주한 캄보디아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호와 한스는 대립한다. 지호는 그들의 삶에서 어쩔 수 없는 비극을, 한스는 그들의 삶에서 자기 삶에 대한 낙관을 발견한다. 표면적으로 이것은 식민지 역사에 공감하는 아시아인과 오직 이곳을 관광지로서만 대하는 유럽인의 대립처럼 보였다. 그들의 갈등은 해결점을 이루지 못했고, 이로써 이 여행은 오랜 시간 동안 은폐했던 서로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끝이 나고 만다.

하지만 여름의 빌라는 이 파국 위에서 진정한 주제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 서사가 편지의 형식을 띄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이 편지는 여행의 시작 지점에서 쓴 것이 아니라 파국으로 끝나버린 여행 이후에 쓰고 있는 것이다.

편지란 기본적으로 고백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누군가 읽을 대상을 분명히 전제하고 있는 글이고, 거기에 적히는 것들은 바로 그 사람이 읽어주길 바라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편지의 수신자는 베레나이고, 그것은 그들의 관계가 여행 이후에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언젠가 틀림없이 나도 읽었고, 그래서 베를린에 두고 온 친구들의 안부를 걱정하게 했으나, 일상에 치여 이내 잊어버렸던 그 기사. 기사에는 당신이 편지에 쓴 것처럼, 우리가 함께 여행을 하기 육 개월쯤 전 그 사건이 벌어진 장소는 크리스마스 시장이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 「여름의 빌라」, 47쪽
 

 

주아의 편지는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그 현재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되었다는 베레나의 편지를 받은 순간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한스와 베레나 부부가 하나뿐인 딸을 테러로 인해 잃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지나간 여름의 대립은 또 다른 의미로 회상된다.

그것은 정치적 대립이나 인종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식민지 역사를 가진 아시아인 남자와 테러로 인해 딸을 잃은 아버지의 대립이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접점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 역시 여기서 명확해진다. 그들 각자 마주보고 대립하고 있었던 것은, 눈앞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또 다른 누군가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화해는 이루어진 것일까? 개인적인 슬픔에 공감하는 일이, 역사적 비극을 간과하는 일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진 역사와 정치와 인종과 계급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타인과 관계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 백수린의 작품을 진정한 매혹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결말이다.

 

내가 망설이던 사이, 캄보디아 소년 앞에 섰던 레오니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자신의 바롤 레오니와 소년 사이에 그어진 선을 지우는 게 아니겠어요? 레오니는 돌멩이 끝으로 소년의 뒤쪽에 새로운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새 친구가 왔으니 원숭이님이 더 좋아하겠지?” 하고 나에게 말을 했어요.

(중략)

나는 덜컹거리는 열차 위에 아직 타고 있고, 여전히 무엇이 옭고 그른지 당신이나 지호처럼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니에요. (중략) 나는 폐허 위에 살아남아 창공을 향해 푸르게 뻗어나가는 당신의 마지막 기억이 이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딸이 낳은 그 어린 딸이 내게 그렇게 말한 후 환하게 웃는 장면이요.

- 「여름의 빌라」, 71쪽

 

주아는 여행에서 자신이 느꼈던 그 불편함을 다시금 은폐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그들이 친구라는 사실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여준다. 새 친구를 맞이하게 위해 그어진 선을 지우고 소년의 등 뒤에 다시 선을 그은 레오니의 행동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가 보여준 해답은 거창하지 않았지만 진실했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아이에게 우리의 경계는 그토록 쉽게 확장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국경의 밤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별일도 없이, 순식간에넘어서버린 국경을 각성했던 그 순간처럼 말이다.

 

 

글 · 류수연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교수. 문학/문화평론가. 인천문화재단 이사. 계간 <창작과비평>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현재는 문학연구를 토대로 대중문화연구와 비평으로 관심을 확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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