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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불타는 유토피아』,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지금, 함께 해야 할 이야기
[서평] 『불타는 유토피아』,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지금, 함께 해야 할 이야기
  • 백지홍 큐레이터
  • 승인 2021.04.30 18: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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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세상을 바꿔놓았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혹시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모바일 기술이 불과 10여 년 만에 만들어낸 변화의 산증인인 셈이다.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지금이야말로 정보통신 기술을 중심으로 한 3차 산업혁명의 완숙기로 보인다. 정보통신 기술과 미디어, 배터리 등 관련 기술의 발달이 우리의 일상부터 거대한 산업체계까지 모든 것을 바꿔놓았으니 말이다. 예술도 변화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미술비평가 안진국은 불타는 유토피아를 통해 기술이 가져온 변화의 지점들을 횡단한다. 때로는 동시대 미술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그 기저에 놓인 기술에 대해 논하고, 때로는 기술의 변화에서 시작해 미술작품으로 수렴한다. 기술과 예술을 오가며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며 이 시대를 조망할 수 있는 지형도를 만들어간다.

기술과 예술의 만남 자체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아니, 예술의 역사와 기술의 발전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조금 더 사실에 부합한 말일 것이다. 사진의 발명으로 인한 시각성의 변화와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 휴대가 간편해진 튜브 물감의 발명과 인상주의 회화의 탄생 등 기술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들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을 예술에 접목하는 실험에 뛰어드는 이는 소수였고, 대부분의 작품은 새로운 기술이 아닌 익숙한 기술로, 뉴미디어가 아닌 올드미디어로 만들어졌다. 2000년대만 하더라도 미디어아트 등 새로운 기술을 접목하는 이는 해당 분야에 관심을 가진 소수의 작가와 기획자로 한정되었다.

지금은 다르다. 한국인 약 500명당 1명이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고, 초등학교에서도 코딩을 가르치는 2021, 미술관에서 가상현실, 증강현실, 3d 프린터, 인공지능을 만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다. 캔버스 대신 모니터나 프로젝터를 만나고, 붓질이나 조각 솜씨 대신 코딩 솜씨를 감상하는 것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모습 중 하나가 되었다. 회화나 조각 등 전통적으로 보이는 작품도 그 이면을 파고들면 기술을 통해 변화된 감각이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이 우리를 이끌고 있다.

그런데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 불타는 유토피아는 모든 것이 기술 중심으로 휩쓸려 가는듯한, 때로는 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한 현실에 질문을 던진다. 책의 제목은 저자의 문제의식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불타는 유토피아’. 기술 발전으로 도래할 유토피아의 빛은 스스로와 주변을 불태우며 빛나는 것은 아닐까? ‘

테크네의 귀환은 기술이 인근 분야까지 불태울 수 있는 기반이다. 기술이 사회·문화 전 분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모습은 주술-기술-예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의 테크네(techne)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테크네의 영향 아래에서 변화하는 사회와 현대미술을 통해 오늘을 진단하고, 함께 이야기하기를 제안한다. 그렇기에 불타는 유토피아는 분명 미술비평집이지만, 책의 시선은 종종 미술비평이라는 상대적으로 좁은 영역을 넘어선다.

불타는 유토피아가 던지는 질문들은 우리가 마주하는 기술의 매끄러운 표면의 이면을 파고든다. 스마트폰의 일상적인 사용이 희귀재료를 채굴하는 과정에서의 산림과 산호초의 대규모 파괴와 반도체를 제조하는 공정에서의 엄청난 양의 물과 에너지의 소비, 그리고 서버 운영을 위한 이산화탄소 배출을 일으킨다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다소간 충격적인 프롤로그처럼 말이다.

1낮달불타는 유토피아라는 책이 탄생하게 된 질문들로부터 시작한다. 낮에 떠 있는 달은 밤에 빛나는 달과 달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존재를 알아채기 힘들다. 우리가 당연시 하는 인터넷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투입되는 수많은 물리적 시설과 노동력처럼 말이다. 저자는 밤이 찾아와 달이 환히 빛나기 전에 저기 달이 떠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기술의 부작용에 대한 저자의 우려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이미 도래한 현실에 대한 관찰에 가깝다. 사람들이 아직 눈치채지 못한 낮달의 존재는 불타는 유토피아를 집필할 수밖에 없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2둔갑술은 근래 유행하는 아날로그의 귀환이나 레트로가 디지털 기술에 대한 반작용이 아닌, 자신의 영역 너머까지 침투하는 현상임을 말한다. SNS 등 디지털 환경이 가져오는 변화를 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기에 동시대 미술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중점적으로 등장하는 파트이기도 하다. 3폐허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을 폐허에 비유하고 환경문제, 포스트 휴먼, 재난, 재해 등의 문제를 대면한다. 폐허는 새로운 시대의 기반이 될 수 있을 터이지만, 그 가능성은 폐허의 원인이 된 고전적 인간중심주의와 자본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날 때만 실현될 것이다. 4불면증은 너무나 많은 데이터를 접하는 상황을 불면증에 비유한다. 저자에게 미술계의 아카이브 유행은 감당할 수 없이 넘쳐나는 정보 증상이다. 그리고 아카이브 열병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모든 기록을 디지털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지속되는 가운데, 디지털 정보를 인간이 독해할 수 없게 만드는 AI가 탄생하게 되면 우리의 기록은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디스토피아적 상상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하는 질문을 남기며 말이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미술 월간지 미술세계에서 편집장으로 근무하며 불타는 유토피아에 수록된 일부 원고를 먼저 읽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었다. 그렇기에 책의 첫 장을 펼치기 전부터 불타는 유토피아가 담고 있을 미덕 하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동안 접해왔던 안진국 비평가의 글이 늘 그랬듯이 지나치게 현학적인 문장을 구상하거나 현상의 표면에 머무는 인상 비평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비유와 감각적 묘사를 아우르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말이다.

폭넓은 주제와 다양한 인용을 다루면서도 그 무게에 눌리지 않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담고자 하는 노력이 책 전반에 걸쳐 담겨있다. 독자를 고려한다기보다는 필자 중심적으로 쓰인 것처럼 느껴지는 글들이 범람하는 한국 미술계에서 이는 귀하고, 필요한 재능이고, 노력이다. 코로나-19를 비롯하여 예술 저작권 문제, 환경 파괴, 인공지능, SNS의 영향력, 혐오 발언과 가짜 뉴스 등 현재진행 중인 첨예한 문제들을 넓은 시야로 조망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담아낸 불타는 유토피아의 성과는 결코 작지 않다.

그렇지만 불타는 유토피아는 가볍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은 현대미술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는 점이다. 몇몇 챕터에서는 미술 작품이나 전시가 저자가 다루는 담론의 예시로서 제시되어 미술의 문외한이라도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몇몇 챕터는 그렇지 않다.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난이도 편차는 불타는 유토피아가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는 큰 틀 안에서 작성된 다양한 성격의 원고들을 정리하여 묶은 책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다. 저자는 원고들을 4부로 분류하고 각 부가 시작될 때마다 여는 말을 덧붙여 독자에게 길라잡이를 제공하지만, 앞선 글의 논의가 차곡차곡 쌓여 뒤따라오는 글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식으로 논의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이는 독서의 난도를 높이는 원인이자, 처음부터 진득하게 읽는 이에게 다소 간의 덜컹거림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 덜컹거림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주제를 오가는 원고들을 다시 편집하여 매끄럽게 이어붙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책에서 던지는 질문들이 과거의 것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럴 수는 없다. 저자는 지금의 이야기를, 현재가 지나가기 전에 함께 이야기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가는 말에서 윤종욱의 시집 우리의 초능력은 우는 일이 전부라고 생각해를 언급하며 우는 것이 자신이 하는 일이라 말했다. 가만히 있지 않고 표현하는 것, 그래서 다른 이들과 소통의 실마리를 마련하는 것.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처럼 저자의 질문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일들이 많아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유토피아로 포장된 디스토피아를 막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그렇기에 불타는 유토피아는 특정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담을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에 모든 것이 끌려가는 듯한 지금, 이대로 괜찮은지 끊임없이 질문이다. 저자의 울음은, 아직 소리 내지는 못했지만 급격한 변화에 전율하는 이들, 저자 이전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들에게 가닿아 소통의 발판이 될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밝게 빛나는 유토피아를 불러오는 대신 주변의 모든 것을 태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일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 되었으니, 불타는 유토피아를 읽기 위한 노력이 헛될 일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책을 채우는 질문 대부분이 기술에 대한 다소간의 회의적 관점과 우려에 기반하고 있지만, 독자를 회의에 빠지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에 대한, 아니 불타는 유토피아의 담긴 내용대로라면 포스트 휴먼, 인간을 넘어선 보다 넓은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태도야말로 불타는 유토피아를 빛나는 유토피아로 바꿀 기반이라고 믿는다.

 

글·백지홍

광주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예술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월간 『미술세계』에서 2013년부터 기자로, 2016년부터 2019년까지는 편집장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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