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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당신의 이웃은 어디에 있나요? (2)
[이병국의 문화톡톡] 당신의 이웃은 어디에 있나요? (2)
  • 이병국(문화평론가)
  • 승인 2021.05.1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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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국의 문화톡톡] 당신의 이웃은 어디에 있나요? (2)

 

3.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

「내 이웃과의 거리」에서 정윤이 느낀 답답함은 혜미와의 관계를 전유한,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장소에 자신은 속하지 못한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불안정하게나마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지키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놓였다는 불안은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상실한 채 배제될 위협에 노출되었다는 공포로 전이된다. 그것은 마치 ‘벼락거지’가 된 기분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래도 정윤은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복직을, 일상의 회복을 상상할 수 있다. 물론 그때가 온다고 하여도 아파트 가격 상승이 불러온 상실의 감각은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하 18도의 냉동창고로 들어가야 하는 비정규직의 전락과는 다른 층위의 계급을 향유할 가능성이 크다.10) 그러한 정윤과는 달리 「그토록 푸른」의 주소영은 밀릴 대로 밀려난 존재이자 감염을 피하기 어려운 취약한 경제적 약자의 자리에 놓여 있어 코로나19 이후에도 일상의 회복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조수경의 「그토록 푸른」11)은 바이러스 감염병으로 인해 여행사 비정규직 일자리를 잃고 새벽배송 물류센터 냉동창고에서 일용직 야간 교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주소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물류센터는 누구나 쉽게 와서 일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바이러스가 창궐한 시기에는 그만큼 쉽게 감염자와 접촉할 환경이기도 하다. 확진자가 발생할 경우, 사업장이 폐쇄될 위험이 있고 그 피해를 기업과 개인이 떠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직원들은 자신의 감염을 숨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문진표 앞에서 진실을 은폐하는 일은 주소영에게도 일어난다. 신체 말단부터 온몸이 푸르게 변하는 증상의 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처럼 보이는) 주소영 역시 문진표 앞에서 망설인다.

감염의 증상인 푸른빛을 감추기 위해 파운데이션을 바르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이미 우리는 코로나19 1차, 2차, 3차 확산 과정에서 경험한 혐오의 내용을 알고 있다. 물론 방역 수칙을 무시하고 단체생활을 하고 자신의 감염을 은폐하고 허위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방역 조치를 어렵게 한 사람들에게도 잘못은 있겠으나, 그 외에도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생계 활동을 수행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표출한 점 역시 지적해야만 한다.

 

출처_교보문고
출처_교보문고

윈프리드 메닝하우스(Winfried Menninghaus)는 혐오를 “동화될 수 없는 타자성을 거부하는 자기 주장의 고조”라고 말하는데, 이는 “오염물로 평가되며 자신과 극심하게 동떨어져 있는” 대상과의 “원치 않는 가까움”에 대한 거절의 표현이라는 것이다.12) 오염물에 대한 접촉 혐오는 사회의 특정 집단에 투사되어 그들을 대상화한다. 한편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사람들이 집단을 만들어 타자를 대상화하는 이유를 패배에 대한 일종의 비이성적인 두려움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두려움은 인간 삶이 수반하는 괴로움을 회피하고, 달성할 수 없는 견고함이나 안전함, 자기 충족성을 추구하는 보다 일반적인 태도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13) 나와 다른 존재를 대상화함으로써 그들을 정상성의 범주에서 바깥으로 내몰고 종속시킬 전략으로 혐오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로 혐오는 약한 집단을 향한다. 비정규 노동자,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중국인, 대구 시민, 노인 등등. 코로나19 감염자도 마찬가지이다. 혐오를 표출하는 이들은 감염자를 방역 시스템을 붕괴시켜 정상인을 위험에 빠뜨리는 오염물로 간주한다. 이 배제와 차별의 논리는 혐오의 주체를 사회 구조적으로 우월한 자리에 놓고 혐오의 대상을 공동체 내에 포섭할 수 없는, 단지 종속시켜 처벌하거나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은 누구든 혐오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역설을 불러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취약한 생존 환경에 놓인 존재는 우리 이웃이 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이다.

 

미래는 온통 새까맣고 불확실했지만, 어쨌든 이 힘든 시기에 새벽배송 물류센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 가게 문을 닫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물건을 구입하면서 자연스럽게 물류센터에서 일할 일용직 노동자도 더 많이 뽑았다. 묵묵히 밥을 떠 넣고 씹고 삼키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러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온라인 쇼핑몰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거기서 받은 돈으로 다시 온라인 쇼핑몰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일을 하고, 물건을 사고, 일을 하고, 물건을 사고…… 세상이 결국 그렇게 되는 건 아닐까. 어떤 날은 생각이 흐르고 흐르다 지구적인 차원으로까지 번져갔다. 한 번 사용되고 버려질 수많은 박스와 포장재와 얼음팩 같은 것들을 볼 때마다 지구에게 몹시 미안했고, 인류의 미래는 희망이 없다는 절망감마저 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내려놓고, 마을에 내려온 북극곰과 콧구멍에 빨대가 꽂힌 거북이와 플라스틱 쓰레기로 배를 채운 채 죽어가는 갈매기를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의 끝은 늘 “지금 내가 지구 걱정할 때인가” 하는 자조적인 한숨이었고, 다시 숟가락을 꽉 움켜잡곤 했다. 살기 위해서는 일단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24~25쪽)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자가 격리 및 재택근무가 뉴노멀의 생활 방식으로 수용되는 와중에도 타인의 생존을 위해 필수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료진, 식당 직원, 배달 노동자, 돌봄 노동자 등등. 그들 중 상당수의 인원이 저임금 단기 노동을 하며 감염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효율성을 강조하고 단기 이익을 추구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빼앗고 그들을 취약한 환경 속에서 일하도록 내몰고 있다. 남녀노소, 모든 계급과 계층을 막론하고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으나 그 감염 위험은 계급과 계층에 따라 불평등하게 경험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감염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종교시설을 제외하면) 확진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이 요양보호소나 콜센터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일터와 숙소였다는 점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또한, 클럽발 집단 확진 역시 그곳이 성 소수자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공간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오히려 소수자를 배제하고 노동자를 단기 고용함으로써 그들을 열악한 환경에 내몰고 있는 사회 구조에 대해 지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소영이 푸른빛을 감추는 행위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요구에 순응하며 자신의 생존을 지켜나가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자신의 생존 너머의 전 지구적인 문제, 이를테면 환경 오염과 같은 문제를 걱정한다 한들 당장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살기 위해서는 일단 무슨 일이든 해야”하는 이 상황이 코로나19 위협보다 더 문제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 주소영은 우리의 얼굴을 반영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우리 사회가, 아니, 전 세계가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다는 사실”(42쪽)일 것이다. 아무리 사회가 개인화된 방식으로 삶의 구조를 영토화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타자와 연결된 세계를 토대로 존재한다. 그것을 간과할 때, 우리는 타자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훼손하게 된다. 타자의 “그토록 서글픈, 그토록 참담한 푸른빛”을 외면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나와 너는 우리의 이웃이 되어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4. 서로-함께-되기 위해

흥미로운 점은 타자를 향한 혐오 대신 그들이 처한 사회 구조적 환경의 문제를 반성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한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의 사회를 약속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졸데 카림(Isolde Charim)은 현대 사회를 다원화 사회로 본다. 그는 1세대 개인주의를 주체의 변화가 중요했던 시기로 규율이 작동하는 사회로 보았으며 1960년대 이후 2세대 개인주의를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과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본질적으로 선택된 특징과 함께 주체를 바꾸지 않는 게 중요했던 사회로 나누었다. 그리고 오늘날 다원화 사회의 3세대 개인주의를 개인의 분열, 우연성의 경험,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 등을 통해 나의 정체성이 다른 정체성과 나란히 서 있는 사회로 보았다. 즉 오늘날 개인은 누구나 자신이 타자들과 나란히 서 있는 단지 하나의 가능성일 따름이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상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14) 언제나 다른 정체성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셈이다. 이는 다양한 정체성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갈등에 기반을 둔 관계라 볼 수 있다. 분열된 주체들이 제각각 삶을 사는 와중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기에 통합과 분리가 불필요한 사회에 속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벼락거지’로 자신을 감각하고 감염의 공포 속에서도 생존의 필수 노동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취약한 존재를 향한 혐오나 배제를 거부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저항이 가능하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다원화 사회와 부딪히는 와중에도 효율적이고 소비적인 과잉 정체성을 강제하면서 이를 내면화한 정윤의 고단함과 주소영의 생존 불안은 구축되며 공고해진다. 끊임없이 ‘정상’의 범주로 기입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 사회의 바이러스가 되어 널리 퍼져 있는 셈이다. 사회 안전망은 코로나19 감염을 막는 방역 시스템 너머 삶의 물질적 조건을 보장 해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 개인은 사회 구조의 불합리와 그로 인한 불확실성에 저항하는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결국 부정적 정동에 휩싸일지언정 타자와 관계 맺고 나란히 서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출처_교보문고
출처_교보문고

김초엽의 「최후의 라이오니」15)는 멸망을 앞둔 행성 3420-ED에서 가치 있는 자원과 정보를 회수하기 위해 떠난 로몬이 그곳에서 오랜 기간 자신들을 탈출시켜줄 라이오니를 기다리는 기계들과 조우하며 겪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 행성 3420-ED에는 자신의 건강한 신체를 복제하여 몸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죽거나 노화하지 않는 불멸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에게 감염병 D가 퍼지면서 복제된 신체로의 자의식 전송이 불가능하게 되고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되면서 행성의 멸망을 재촉한다. 라이오니는 불멸인의 복제 과정에서 결함이 발생한 복제로 행성의 시스템 오퍼레이터 기계인 셀에 의해 구출된다. 라이오니는 3420-ED에서 불멸인들을 몰아내고 다른 복제와 기계 들과 평화롭게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계들은 다른 행성으로의 터널 드라이브를 할 수 없는 신체였기에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없었고 라이오니는 그런 그들 곁에 머물렀으나 더는 자신이 살 수 없는 환경에 처하게 되자 기계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기계들이 터널 드라이브를 할 방법을 찾아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행성을 떠난다. 오랜 세월이 지나 3420-ED는 완전한 멸망을 앞두고 있으며 셀 역시 죽음을 맞이하려는 순간, 라이오니의 복제인 로몬 ‘나’가 이 행성에 찾아오게 되고 셀의 곁을 지키게 된다.

 

나는 열흘간 셀의 옆에 머물렀다. 셀에게 내가 셀을 만나기 위해서 했던 수많은 일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도시를 탈출한 이후 어떤 무시무시한 멸망들을 마주했는지, 어떻게 터널을 넘었고 새로운 문명과 행성을 발견했는지, 그곳에서 셀과 기계들을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 그럼에도 방법을 찾지 못했을 때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이곳으로 오는 터널들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고 미로를 헤매는 것처럼 어려웠는지. 대부분은 거짓말이었지만 나는 마치 그 일들을 직접 겪은 것처럼 말해줄 수 있었다. 적어도 나의 고통, 혼란, 슬픔과 두려움은 모두 실재하는 것이었다. (……) 나는 내가 죽음의 두려움을 아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셀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다독여줄 수 있었다. (……) 그 열흘 동안, 셀은 어떤 순간에는 나를 라이오니라 믿고, 어떤 순간에는 그렇게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라이오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낯선 존재로 대하며 이어지는 그 기나긴 이야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나는 라이오니로서 셀의 손을 잡아주었다.(46~47쪽)

 

자신이 다른 로몬과 차이를 지닌 이유가 무엇인지, 도대체 ‘나’의 존재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묻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에 ‘나’는 셀과 관계 맺음으로써 응답한다. 행성의 시스템 오퍼레이터인 셀이 죽음을 맞는 순간, 로몬인 ‘나’가 그의 손을 잡아줌으로써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실 셀이 기다린 존재는 자신과 다른 기계들을 구원해줄 라이오니였기 때문에 라이오니의 복제인 ‘나’는 셀의 소망을 이뤄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셀의 곁을 지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일이 가능한 이유는 ‘나’가 죽음의 공포를 이해하는 유전적 결함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결함, 결핍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어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타자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나’가 다른 로몬과 함께 있을 때는 ‘나’가 지닌 유전적 결함으로 말미암아 예외적 존재이자 로몬 공동체에 포섭되기 어려운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장소를 옮겨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는 셀과 나란히 서게 되면서 취약한 존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긍정하고 의미화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과거의 실패를 셀에게 발화함으로써 자신의 결핍과 마주하게 되고 그 한계를 노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형성한다. “나는 ‘나’에 의해서는 포착될 수 없고 동화될 수 없는 것을 겪는데, 왜냐하면 나는 항상 나에게 너무 늦게 도착하기 때문이다.”16) 로몬인 ‘나’는 셀의 곁에 나란히 서 있음으로써 타자의 결핍을 상상적으로나마 채울 수 있는 관계를 구현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다.

이처럼 나를 설명하려는 서사적 노력은 단독적 위치에서는 성취할 수 없다. 그것은 늘 실패로 귀결되며 정상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기능을 수행한다. 불안정한 주체로 존재하는 나는 정상성의 층위에서 통합될 이유가 없다. 타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타자의 불투명성과 나의 불투명성이 만나 공명함으로써 서로를 환대하는 관계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강제로부터 결핍된 존재가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서로를 시기하고 거리를 두도록 만든 것이야말로 최근의 한국 사회가 만들어 놓은 허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자학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것은 여전히 타자와 나란히 서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의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결핍, 결함, 결여의 취약성이 “서로-함께-되기”17)의 관계로 나아갈 때, 우리는 서로의 이웃이 되어 윤리적 연대를 가능케 하리라 믿는다.

 

 

10) 물론 뉴노멀이라는 용어로 재영토화된 기업 시스템은 코로나19 이전보다도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정규직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때 돌봄노동을 수행해야 한다고 상상되는 여성인 정윤이 그 앞에 서리라는 것을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11) 조수경, 「그토록 푸른」, 조수경 외, 『쓰지 않을 이야기』, 아르테, 2020.

12)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조계원 옮김, 민음사, 2015, 166쪽.

13) 같은 책, 426쪽

14) 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이승희 옮김, 민음사, 2019, 58~60쪽 참조.

15) 김초엽, 「최후의 라이오니」, 김초엽 외, 『팬데믹:여섯 개의 세계』, 문학과지성사, 2020. 김초엽의 소설은 같은 시기, 계간 『문학과사회』 2020년 가을호에도 게재되었다.

16) 주디스 버틀러, 앞의 책, 139쪽.

17) 주디스 버틀러, 아테나 아타나시오우, 『박탈』, 김응산 옮김, 자음과모음, 2016, 122쪽.

 

- 글은 2021년 3월 25일에 진행했던 요즘비평포럼 <Un/contact – 관계맺음의 역설> 발표문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글·이병국

시인, 문학평론가, 그 외 이런저런 알바生. 시집 『이곳의 안녕』이 있음. 제4회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동시대 한국인이 쓴 시와 소설 읽는 걸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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