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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고전산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박하지 않은 현실주의
[안치용의 고전산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박하지 않은 현실주의
  • 안치용
  • 승인 2021.05.17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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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2

서양 사상의 두 원류가 헬레니즘(그리스ㆍ로마)과 헤브라이즘(유대)이라 할 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헬레니즘의 두 기둥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이 융성한 시기 이후에 특별히 기독교 형성기 및 중세의 교부철학에서 두 사상가의 영향이 두드러지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에서도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하여도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에게 각각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리스철학과 교부철학에서 두 사람의 위상은 다르다. 비유적으로 말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독자적으로 우뚝 선 두 개의 기둥이라면, 교부철학에서는 예수()라는 무겁기 그지없는 지붕을 우아하게 떠받치는 기둥이다.

보통 뭉뚱그려서 플라톤은 이상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주의자로 그려진다. 이러한 분류법은 기독교 사상사에 미친 영향을 논외로 한다면 대체로 유효하다. 다만 기독교 교부철학에 미친 두 사람의 영향에서는 이상주의/현실주의 구도보다는 이원론/일원론의 구도가 더 본질적이었다. ‘이상주의/현실주의이원론/일원론은 대칭적이기도 하지만 때로 심각한 비대칭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 등 플라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 교회사상가들의 이원론은 역설적으로 현실주의로 귀결하여 세속주의 교회론의 이론적 지주가 되었다. 일각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세속주의 교회론이 그리하여 예수의 이상주의를 배반했다고 보기도 한다.

신학에 투영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복합적인 양상을 드러낸 반면, 정치사상사에서는 두 사람이 각각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대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국가>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플라톤은 이상주의 국가를 꿈꾼다. 프랑스 혁명이 표방한 공화주의의 이상 또한, 당시 봉기에 참가한 민중 가운데 플라톤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도, 플라톤에 사상적인 빚이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르게 생각한다. 플라톤과 연관 지어 프랑스 혁명을 언급한 김에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편의적으로 설명을 마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영미적인 자유주의 사상에 영감을 제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 즉 폴리스를 통일체로 파악한 플라톤과 달리 복합체로 보면서 플라톤의 철인정치, 처자공유, 재산공유 등을 비판한다. 공유(共有)의 현실적인 대안은 사유(私有)밖에 없다.

영미 중심의 자유주의는 자본주의 발흥과 연계되면서 불가피하게 (개인의) 재산권 보호를 자유의 핵심 개념으로 채택하고 발전시켰다. 왕권으로부터 부르주아지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을 철학적으로 정의하고 이론으로 뒷받침하였다는 게, 영미 자유주의를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처자공유제. 재산공유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결국 내 것의 존중으로 지탱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와 영미 자유주의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확보한다.

 

 

사적 소유는 자본주의의 핵심 근거이다. 물론 사적 소유만으로 자본주의가 발생하지 않지만 사적 소유 없는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는 자본주의의 발생을 가능케 할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자본주의로 연결될 수 없었지만 그의 철학의 본원적 입장은 자본주의적인 맥락을 갖는다고 주장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 철학의 본원적 입장은 사회주의적인 맥락에 위치한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분명히 할 것은 맥락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연히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모른다.

편의의 계보학이지만, 흥미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선 자본주의의 맹아적 발상이 생각보다 많이 목격된다. <정치학> 9장에서는 마르크스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연상시키는 논리 전개가 보인다. 예를 들어 샌들을 얘기하면서 신는 데도 사용되고 교환하는 데도 사용된다고 말한다. 물론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입각한 마르크스의 사용가치/교환가치 분석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처한 생산양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원초적인 관점의 다름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 시장의 형성, 화폐의 발생, 미다스로 운위되는 화폐의 물신적인 성격 등 상당히 재미있는 논의가 이어진다. 특히 자본의 탐욕과 자본의 자기증식욕구를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표현한 대목도 찾아진다.

 

그들의 향락은 과잉에 있으므로 그들은 향락의 과잉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술을 찾게 된다.”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많이 나간 이야기라고 해야겠다. 이 인용문에서 저절로 드러나듯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잉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가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몰랐지만, 만일 알았다면 통렬하게 공박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중용이다.

대부(貸付)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폐는 교역에 쓰라고 만든 것이지 이자를 낳으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얘기하면서 대부를 비판한다. 옛 가톨릭 및 이슬람과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화폐의 기능 자체에 대해서는 그 역할을 인정한다. 경제학에서는 화폐의 기능을 두고 다양한 논의가 펼쳐졌는데, ‘화폐는 베일(veil)에 그쳐야 한다는 입장이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맞닿아 있다. ‘화폐 베일관이라고 불리는 이 견해는 교역과 같은 실물경제가 경제의 근본이고 화폐는 베일처럼 실물경제를 단지 감싸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굳이 최초 저작권을 찾자면 화폐 베일관()’의 저작권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는 플라톤의 공유에 대한 비판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러나 공유의 대안으로 제시된 사유가 탐욕을 의미하지 않음은 자명하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가 중용에 근거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상상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지금 시대에 활동했다면 격렬한 반체제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까.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중용에서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 극단적인 체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승 플라톤의 공상적 공유체계를 비판한 것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면, 모두에 논의한 폴리스적 동물또한 그의 현실주의의 소산이다. 철인이 통치하는 이상국가가 아닌 폴리스적 동물이 가능성과 한계를 갖고 함께 모색하는 현실국가에 그의 눈은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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