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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신인가, 인간인가 - <곡성>과 <랑종>
[강선형의 시네마 크리티크] 신인가, 인간인가 - <곡성>과 <랑종>
  • 강선형(영화평론가)
  • 승인 2021.08.0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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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종>은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원안을 쓰고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연출한 영화이다. 이 때문에 <랑종>은 <곡성>과의 비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이기도 하다. 더구나 나홍진 감독은 <랑종>의 첫 출발이 <곡성>의 일광(황정민)의 프리퀄이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랑종>은 처음부터 <곡성>과 기술적인 면에서든 내용적인 면에서든 비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들을 떠나 우리는 이 양자에 근본적인 관심의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야기가 향하고 있는 곳이 신인가, 인간인가 사이의 차이이다.

 

<랑종>의 질문들

 태국어로 ‘랑종(Rang Zong)’은 한국의 무당과 같은 존재이다. <랑종>은 오랫동안 이산이라는 마을에서 바얀이라는 신을 모셔왔던 랑종 가문의 님(싸와니 우툼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그렇지만 <랑종>에서 빙의되고 또 저주를 받는 가문은 님의 언니인 노이(씨라니 얀키띠칸)가 혼인한 야싼티야 가문으로, 이 가문의 이야기가 <랑종>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이룬다. 그래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는 <랑종>은 처음에는 이산이라는 마을의 랑종인 님에 주목하지만, 점차 이 가문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시선을 옮겨간다. 하지만 님은 야싼티야 가문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지켜보며 영화의 처음과 끝에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으로, 영화의 시작을 연 것처럼 영화를 끝맺는 인물로 남아있다.

 

님은 다큐멘터리팀에게 처음에는 노이에게 신내림의 증상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노이가 천주교인이 되면서, 그리고 이후 밝혀지지만 신내림을 자신이 아니라 님이 받게 하기 위해 여러 주술적인 행위들을 하면서, 님이 바얀신을 모시게 된다. 이후 님은 마을의 여러 사람들을 치유하면서 바얀신을 극진히 모셔왔다. 그녀는 바얀신을 ‘본 적’ 없다고 말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자신과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님이라는 인물의 중요성이 있다. 이 님의 느낌이라는 것은 정말로 그녀가 늘 말 거는 대상으로서의 바얀신이 준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기도 행위가 그녀에게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것일까?

<랑종>에 등장하는 님의 기도 행위는 <곡성>에도 등장하고 <랑종>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굿의 행위와는 다르다. 님은 노이의 딸 밍(나릴야 군몽콘켓)에게 노이에게 그랬던 것처럼, 또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내림의 증상들이 일어나자 계속해서 바얀신에게 답을 구하고자 기도를 한다. 내림굿처럼 신을 유도하고 이끄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구하기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다. 님의 기도 행위는 곧 이어 또 등장하는데, 밍과 죽은 그의 오빠가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었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자살을 하자, 그의 원혼이 밍을 데려가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님은 밍의 오빠가 목을 맨 그 나무 아래에서 다시 한 번 간절한 기도를 한다. 수십 개의 계란을 깨면서 밍의 오빠의 원혼을 달래며 그녀는 다시 한 번 답을 구한다. 단지 구마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와 연결되어 있고 그 존재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님의 기도 행위에는 그 믿음이 드러나 있다.

 

이 때문에 님은 <랑종>에서 누구보다도 중요한 질문을 하게 된다. 그녀가 죽고 난 후 드러나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바얀신에 대한 믿음을 의심하고, 사실 한 번도 자기가 느끼고 있는 그 존재가 바얀신이라고 확신해본 적 없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신이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신을 믿고 헌신해온 것이 아니라, 무언가 느낀 것을 관습적으로 신이라고 믿어왔던 것이다. 양자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으면서도 우리는 신을 믿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 아닐까?

 

<랑종>과 <곡성>

<랑종>의 님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특별하다. <랑종>에서 일어나는 빙의들과 빙의를 일으키는 다수의 신들, 그리고 다수의 신들끼리의 싸움은 <곡성>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랑종>에서는 님의 가문이 모셔온 바얀신, 밍의 오빠의 혼령, 그리고 야싼티야 공장에 깊이 뿌리 내린 나무들처럼 저주로 뒤얽힌 잡귀들이 인간들이 알 수 없는 사이 밍의 몸 안에서 싸우고 뒤섞이고, 마지막에는 노이와 밍의 몸에서 대결하기도 한다면, <곡성>에서는 일광과 외지인(쿠니무라 준), 무명(천우희)의 대결, 또는 그들의 몸에 깃든 신들의 대결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신이 이기는가 혹은 어떤 귀신이 이기는가, <랑종>과 <곡성>의 후반부는 바로 이것을 보여주고자 하고, 그 가운데 인간들은 아주 나약하고 무기력하게 죽어간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수동적으로 울부짖는 것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랑종>의 원안을 쓰고 <곡성>을 만든 나홍진 감독의 관심은 오직 신에게만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들은 그 사이에서 어떤 믿음을 가지든 상관없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이다. 관객들이 어떤 쪽에 서서 어떤 신 쪽에 마음이 가고 어떤 신을 선이라고 생각하든지 인간들은 죽게 되어 있고 오직 무력함을 경험할 뿐이다. <곡성>에서는 심지어 자신을 ‘악마’라고 말하는 존재가 등장하여 예수님처럼 손바닥의 성흔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나홍진 감독의 관심이 오직 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인간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러니까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서 완전히 초월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존재가 행하는 악행처럼 보이는 것들과 선행처럼 보이는 것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랑종>의 결말 역시 비슷하다. 밍에게서 악귀들을 떼어내려는 의식은 실패로 돌아가고, 바얀신이 찾아왔다고 말하는 노이와 이미 잡귀들에게 영혼이 집어삼켜진 밍은 대결을 벌인다. 초월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싸움은 인간들을 모두 죽이고 태워버린다. 인간들은 그토록 무력하고 신들은 그토록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랑종>과 <곡성>은 모두 신에 대한 질문들로 귀결된다. 신이라는 것이 있는가? 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 신을 정말로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랑종>에서 님이라는 인물은 조금 다른 질문을 한다. 인간에 대한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공들여 믿음을 키우고 애쓰고 공들여 가꿔온단 말인가? 확인할 수도, 확신할 수 없는 그 존재는 왜 그토록 인간에게 갈망의 대상이 되는가? <곡성>의 일광과 무명에게서는, 그리고 마지막에 외지인을 만나는 양이삼(김도윤)에게서는 표현되지 않는 인간에 대한 질문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신인가, 인간인가

인간은 오랫동안 신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그것이 신화 속의 다신들이든, 초월적인 단 하나의 유일한 신이든, 우리가 귀신이라고 부르는 죽은 영혼들이든, 인간의 학문이나 예술에서 이 존재들은 떠난 적이 없다. 이 초월적인 존재들은 과학과 기술이 이토록 발달한 현대에도 늘 우리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이론적으로 이 존재를 신 존재증명이라는 증명 아래에서 확신할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파스칼은 신이 존재하는 세계가 우리가 내기를 걸어볼만한 세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호기심들은 정말로 신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 존재를 믿는 인간 안에 있는 무한한 마음을 향한 것일까? 신인가, 인간인가, 이것이 두 영화를 다른 영화로 만드는 중요한 질문이다.

<곡성>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랑종>은 그 영화적 표현들에 대한 평가들을 떠나서 님을 통해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그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어떤 능동적인 행위도 소용없고, 어떤 해석도 불가능한 그런 상황을 마주한 인간들이 처절히 무너져 내리는 서사들 위에서 님은 돌출적인 인물이다. 신의 속셈을 알고 신을 유도할 줄 안다고 믿는 무당들과 랑종들 사이에서 응답이 없는 신을 향해 계속해서 기도 행위를 하는 인물은, 사실 인간들은 신의 장난감일 뿐이라는 결론에 아주 미약하지만 작은 흠집을 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곡성>에서처럼 신과 결탁하거나 신과 하나가 된 인물도 아니고, 효진(김환희)이나 밍처럼 완전히 그 주도권을 내줘버린 인물도 아니다. 그녀는 오직 신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으로 자신을 채운, 그래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일 수 있는 독특한 지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의 죽음은 영화의 결말을 이미 예측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인물이기 때문에 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비록 그녀가 자기 안에 있는 힘 때문이든 자기 밖에 있는 힘으로 인해서이든 죽게 되지만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신은 존재하는가’와 ‘인간은 왜 신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는가’는 서로 뗄 수 없는 질문이고, 또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질문이다. 그렇지만 신이라는 존재들의 게임 속에서 그 승부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선은 비록 새로운 시선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랑종>은 바로 그런 시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곡성>과는 다른 영화이다. 아니, 다른 영화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글·강선형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강사 및 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40회 영평상에서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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