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큰 뿔 사슴’은 진화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화석을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멸종생물인 ‘아일랜드 큰 뿔 사슴’은 발견된 화석에 근거하면 약 40만 년 전에 지구상에 등장하여 7,700년 전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퍼져 살았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생물 진화의 역사에서 출현한 모든 사슴 중 가장 덩치가 큰 종이다. 화석이 발견되는 지역은 동(東)으로는 바이칼 호수 동안(東岸)에서 서(西)로는 아일랜드에 이른다. ‘큰 뿔 사슴’의 화석이 처음 발견된 곳이 아일랜드이고, 지금까지 발견된 화석들 대부분이 아일랜드의 늪에서 발굴된 것이어서 ‘아일랜드 큰 뿔 사슴’이라 불린다. ‘큰 뿔 사슴’은 어깨까지 높이가 2.1m가량이고, 몸무게는 540~600kg으로 추정되며 큰 것은 700kg까지 나갔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중 뿔의 무게만 40kg에 달한 것으로 분석되는데, 뿔의 끝과 끝 사이 거리가 큰 것은 3.65m나 되었다.(위키피디아 참조)
‘아일랜드 큰 뿔 사슴’은 큰 덩치와 큰 뿔 때문에 유명하지만 진화사(進化史)에서는 멸종의 이유 때문에 더 주목받았다. ‘큰 뿔 사슴’의 뿔은 여느 다른 사슴들과 마찬가지로 해마다 떨어지고 다시 자랐는데 진화의 과정에서 점점 더 커지게 된다. 큰 뿔 선호 혹은 집착이 종 전체의 뿔 크기를 키운 셈인데, 그 이유는 암컷들이 수컷 사슴의 뿔이 더 클수록 더 잘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진화의 동인(動因)으로 뿔이 점점 더 커지면서 종국에 수컷들은 그 뿔을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늑대 등 천적에 맞설 수 있는 보호무기의 기능을 상실하고 단순 장식용 혹은 엽색용으로 전락하고 만다. 너무 무거워서 적을 향해 뿔을 쉽게 휘두를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도망갈 때는 나무나 덤불에 자주 걸리는 또 다른 치명적 부작용을 노정하였다. 마침내 ‘크기(size) 편집(偏執)’이 종의 멸종을 불렀으니 ‘아일랜드 큰 뿔 사슴’이야말로 다른 어떤 종보다도 향락적인 동물이라 할 만하다. 흥미롭게도 한자 ‘고울 려(麗)’에 사슴[鹿]이 들어있는데, 사슴이 잇달아 간다(사슴[鹿] ‘둘이 나란하다[丽]’가 합하여 려(麗)가 만들어짐)는 해석과, 려(麗)자의 모양이 사슴[鹿]이 뿔 위에 덤불 같은 걸 덧붙여 꾸민다는 뜻이란 다른 해석이 전한다. 후자의 해석은 꼭 ‘아일랜드 큰 뿔 사슴’을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니 려(麗)자의 뜻 가운데 ‘짝짓다’가 들어있는 게 우연 같지 않다.
여담 하나 하고 지나가자면 크기, 특히 특정 신체부위의 크기에 관한 한 인간 수컷(어쩌면 암컷까지?)의 집착도 대단해 결코 ‘아일랜드 큰 뿔 사슴’에 뒤지지 않을 법한데 ‘큰 뿔 사슴’이 멸종한 것과 달리 인간이 아직 건재한 까닭은 무엇일까. 아무런 근거가 없는 설명이란 전제를 깔고, 아마도 뿔은 암컷 수컷이 모두 볼 수 있는 신체의 공공연한 지점에 위치한 반면 인간의 특정 신체부위는 문명발생 이래로 은폐돼 있어 현실적인 비교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 때문이 아닐까.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 ‘아일랜드 큰 뿔 사슴’에게 종 전체를 멸종시킬 정도의 몰입을 초래한 동력은 한 마디로 정리하면 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생뚱맞은지 모르겠지만 이 대목에서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지자(知之者)는 불여호지자(不如好之者)요, 호지자(好之者)는 불여락지자(不如樂之者)니라.”
“알기만 하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논어> ‘옹야편(雍也篇)’에 나온다. 약간 꺼림칙하지만 “즐기는” 실례로는 ‘아일랜드 큰 뿔 사슴’만 한 걸 찾기 힘들어 보인다. 멸종할 정도로 즐김에 몰입했으니 즐김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커진 뿔은 명백한 그 증좌며, 뿔 키우기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성공사례이다.
하지만 ‘아일랜드 큰 뿔 사슴’이 거둔 전대미문의 ‘성공’은 공무도하가의 백수광부와 전혀 다른 관점에서 슬픔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효율성만 추구하며 한 방향으로 내닫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와 닮았기에 드는 생각이다. 사슴이 성욕을 숭배하듯, 인간은 물신을 숭배한다. 이 방향이 잘못되었고 이 경로를 고수하다간 ‘아일랜드 큰 뿔 사슴’처럼 공멸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생존시의 ‘아일랜드 큰 뿔 사슴’들과는 달리 인간은 적잖은 숫자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아일랜드 큰 뿔 사슴’과 마찬가지로 ‘뿔 키우기’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어 보인다.
인간은 물신숭배의 위험을 사슴과 달리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인식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일랜드 큰 뿔 사슴’이 뿔에 미친 것보다 인간이 물신숭배에 더 미쳐있는 까닭은 왜일까. 위험을 인식함과 위험에서 벗어남은 별개 차원인 걸까.
허무맹랑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인식에 부합하는 행동을 인간에게 촉구하기 위해 ‘아일랜드 큰 뿔 사슴’의 뿔 화석을 대량으로 복제하여서 집집마다 거실에 걸어놓도록 법으로 의무화하는 것은 어떨까. 아쉽게도 그런 생생한 교훈을 거실 벽에 걸쳐놓기엔 우리네 집들이 너무 좁다는 현실적 제약이 존재한다. 사실 인간사회에서 고대광실 뿐 아니라 누옥(陋屋)에까지 들어찬 과도한 탐닉의 결말은 백수광부 처의 노래나 ‘큰 뿔 사슴’의 화석을 통하지 않아도 뻔하지 않은가.
주마가편이란 말이 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것은 자동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말을 가게 하려면 간단하게 “끌 끌” 하는 입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물론 조련된 말일 때의 이야기다. 달리게 할 때는 고삐를 한 쪽만 확 낚아채든가 박차를 가하면 된다. 채찍질도 효과가 있는데 말이란 동물이 워낙 겁이 많아서 실제로 때리지 않고 채찍을 들기만 하여도 잘 훈련된 말은 알아서 달린다.
달리는 말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질주성향을 타고난 말이란 동물에게 주마가편은 폭주를 불러올 수 있다. 말은 원래 사람 태우기를 싫어하는데 조련을 통해 등에 억지로 사람을 태우도록 교육을 받았다. 질주본능과, 기승의 허용이란 훈육 사이의 균형점에서 승마가 이루어진다. 주마가편이 가능하려면 말 뿐 아니라 사람도 훈련을 받아야 한다. 달리는 말 위에서 말을 적절하게 통제하면서 떨어지지 않고 가속하려면 적잖은 시간을 들여 말과 친해지고 동시에 승마훈련을 이수해야 한다.
승마에는 ‘재찍’보다 ‘고삐’가 더 중요하다. 말을 달리게 하기에 앞서 말을 멈추게 할 줄 알아야 하며, 너무 당연한 얘기로 멈추게 할 줄 모르고 달리게 할 줄만 안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한데 우리는 고삐 없이 채찍을 들고 말에 탄 사람 같다. 달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달리는 걸 즐기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게 먼저인데, 우리에겐 그저 즉각적으로 좋아하고 홀딱 즐기는 게 절대선일 따름이다.
다시 공자의 인용문으로 돌아가면, 공자의 ‘불여(不如)’는 등급을 뜻한다. 공자의 인용문은 지(知)ㆍ호(好)ㆍ락(樂) 가운데 락(樂)에 금메달, 호(好)에 은메달, 지(知)에 동메달을 준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불여(不如)’가 대체로 ‘여일(如一)’보다 못하다. ‘불여(不如)’의 세상은 갈등과 반목을 기본으로 땅따먹기에 열중한다. 반면 ‘여일(如一)’의 세상은 화합과 상생을 바탕으로 나눠먹기를 도모한다. ‘불여(不如)’가 ‘여일(如一)’과 ‘불여(不如)’한 것이다. 지(知)ㆍ호(好)ㆍ락(樂)은 함께할 때 여일(如一)한 세상, 여일(如一)한 삶을 가능케 한다. 효율과 등급이 ‘아일랜드 큰 뿔 사슴’에게 비참한 말로를 열었듯, 주마가편은 우리에게 치명적 낙마를 불러올 수 있다. 주마가편은 쉬우나 달리는 말을 멈추게 하기는 어렵다. 만약 그동안 주마가편으로 달려왔고 아는 것도 주마가편 뿐이라면 지금이라도 달리는 말을 세우는 방법을 배우는 게 나쁘지 않겠다. 늦지 않았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이니 오래 달려야 하고 오래 달리려면 멈출 줄 알아야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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