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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랑종> 수상은 ‘괜찮은 이상함’이었나 - 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판타스틱 영화제의 역할에 대하여
[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랑종> 수상은 ‘괜찮은 이상함’이었나 - 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판타스틱 영화제의 역할에 대하여
  • 이현재(영화평론가)
  • 승인 2021.08.1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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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본능(Instinct)이라는 단어를 빼고 장르 영화를 논하기는 어렵다. 장르를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모든 장르 영화가 공통으로 전제하는 관객이란 한 가지 요소 때문이다. 특정한 자극이 들어왔을 때 어떤 관객이 어떻게 반응을 보이는지는 장르를 규정하는 틀(Template)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장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재현보다도 예측의 영역에 가깝다. 여기서 예측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본능이다. 본능은 분산된 관객을 하나의 객체(Object)로 묶는다. 여기에는 한가지 전제가 있다. 무리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무엇이 일관된 반응을 이끈다는 것이다. 가령, 권선징악이나 노력과 보상, 명료한 인과에 대한 믿음 등이 본능이 될 수 있다. 

장르 영화를 지배하는 이 전제는 장르 영화를 단순한 상업용 엔터테인먼트 그 이상으로 만든다. 장르 영화는 융이 말했던 사회의 집단 무의식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나아가 헤겔이 말했던 시대정신을 소환할 수도 있다. 굳이 정신분석과 철학의 영역에 머물지 않더라도, 장르 영화가 관객을 전제하는 만큼 관객의 욕구를 적절히 조율해야 한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만큼 장르 영화에서 중요한 작가적 역량은 소통역량이다. 장르 영화만큼 담론이 활발히 진행되는 매체를 찾기도 쉽지 않다.

장르 영화에서 사회적 관점을 유달리 많이 인용하고 끌고 오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작품이 사회와 적절히 소통하고 있는가는 장르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다. 다만 모든 장르가 사회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장르 영화 중에서는 간혹 용감하게 관객을 직접 찾아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화가 관객을 찾아 나서는 경우도 장르는 관객을 전제하긴 한다. 이런 영화들이 전제하는 관객의 범주는 상업 영화의 관객만큼 보편적이거나 넓지 않다. 좁은 영역으로 객체를 전제한 만큼 수많은 조건과 필터가 영화의 토대에 깔린다. 조건과 필터가 늘어날수록 영화의 관객은 초점화되는 동시에 잠재적 소비층의 너비 자체는 준다.

이는 최근 파편화되고 있는 대중 시장의 상황에 적합한 대안이다. 잠재적 소비층을 넓게 확보해 순간적인 대량소비를 만들어내는 텐트폴 소비보다 플랫폼을 중심으로 지속적 소비가 일어나는 롱테일 시장에 적합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초점화를 통해 관객에게 높은 만족을 제공함과 동시에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막 나간’ 장르 영화들도 분명 존재한다. 의도적이었든 비의도적이었든 대중의 일부로 보아야 하는 관객을 대중의 영역에서 빼낸 영화들은 공급망의 회로(Circuit)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고인다. 이 영화들은 일종의 폐쇄회로를 형성하여 특정한 장소로 흘러간다. 이들이 도착하는 가장 대표적이며 공적인 장소가 판타스틱 영화제이다.

 

시네판타스튀크 1970년 가을호 표지

판타스틱 영화제, 이탈자들과 매드사이언티스트들의 피신처

판타스틱 영화제는 말 그대로 판타스틱 영화들(Fantastic Films)이 모이는 축제다. 판타스틱이라는 장르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으나 판타스틱 영화는 주로 비주류적 판타지 장르 영화들을 모아 부르는, 백 년을 갓 넘긴 길지 않은 영화사에서 약 50년을 차지하는 나름 뿌리 깊은 명사다. 그러나 아직 많은 이들에게 판타스틱 영화는 생소하거나 낯선 존재다. 판타스틱 영화의 기원은 프레데릭 클록(Frederick S. Clarke)이 1967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에서 계간으로 발간했던 『Cinefantastique』[1]로 본다. 장르영화 팬진(FanZin)으로 시작해 막강한 영향력을 펼쳤던 『Cinefantastique』는 “회고전”(Retrospective) 지면을 통해 <놀랍도록 줄어든 사나이>, <지구 최후의 날> 등을 고전 판타지 장르 영화를 심도 있게 소개하며 일종의 장르 계보-지도를 만들어 왔다. 해석이 축적되며 장르 영화에 대한 해석은 비주류 장르 영화에 대한 해석으로까지 조류를 확장하시며 일종의 ‘서킷브레이커’의 역할을 해냈다. 

『Cinefantastique』의 해석은 대게 제작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만큼 모더니즘 비평보다는 창조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미술계에서 로젠버그가 폴락의 작품을 사건으로 보았던 것처럼, 『Cinefantastique』의 필진은 영화를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을 통해 창작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창조를 유의미한 행위로 인정하려 했다. 이러한 기조는 하드코어와 아마추어리즘의 강력한 동반자이자 지원군이 되었고, 칸트의 무관심성을 신봉하던 모더니즘과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었으며, 비주류 장르 영화를 시장에 올려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Cinefantastique』의 활동은 지상보단 지하에 가까웠지만, 강이 없는 광야의 지하수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Cinefantastique』의 유산은 7-80년대를 통과하며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북미에서는 세련된 자극과 효과로 마감된 호러・고어・슬래셔가 전성기를 맞이하며 존 카펜터, 웨스 크레이븐, 토프 후퍼와 같은 걸출한 작가를 배출한다. 한편 유럽에서는 마리오 바바 등 거장의 흔적을 상속한 판타스틱 영화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당시 제스 프랑코가 활발히 활동했던 스페인의 시체스 영화제를 시작으로 이탈리아의 판타페스티발, 포루투갈의 판타스포르토가 마련되었고 “판타스틱 영화”라는 시장을 형성하며 나름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이후 87년에는 22개의 장르 영화제가 모여 ‘유럽 판타스틱 영화제 연맹’(EFFFF)를 형성한다. 

아시아에서는 90년 유바리 판타스틱 영화제를 시작으로,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등이 만들어지며 판타스틱 영화시장에 합류하게 된다. 유운성 평론가가 지적했듯 영화제의 주요한 기능은 영화시장에 대한 게이트키핑, 즉 검열과 기능할당[2]이지만 판타스틱 영화제는 그 맥락상 가장 자유로운 축에 속하는 영화제다. 그만큼 앞서 언급했던 본능에 대한 해석이 가장 다양하게 이루어지는 시장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만큼 관객의 폭이 좁아 가장 베타성이 강한 폐쇄회로를 장착한 영화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계에서 판타스틱 영화제의 기능은 검열과 시장의 저변을 넓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수위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중의 영역에서 벗어난 관객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영화를 제공함과 동시에, 대중으로부터 이탈한 영화가 폐쇄회로에 갇히는 참사를 막는 관용적 체계이며, 첨예한 충돌과 실험이 행해지는 대표적 장소로서 (역설적이지만) 검열과 기능할당의 최첨단을 달리는 영화제이기도 하다. 영화계 안에서 영화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복합적 요건과 최대한의 수위를 실험하는 장소인 셈이다.

 

랑종(2021)

<랑종>의 수상, 컨센서스와의 대립이 올바른 선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BIFan)는 아시아 판타스틱 영화시장에서 가볍지 않은 권한과 책임을 수행해왔다. 그만큼 판타스틱 영화제가 어떤 영화를 가져왔는지는 영화시장에서 작동하는 기능할당과 검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판타스틱 영화관계자들에게 BIFan이 어떤 영화를 가져왔는지는, 그 선택에 동의하든 안 하든 무시하지 못할 무게를 지닌다. 의도였는지 우연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올해 BIFan은 시장의 컨센서스(여론의 합치)와 대립하는 선택을 했다. BIFan의 특성상 시상에 큰 무게감은 없지만 어쨌거나 “그해의 영화”로 낙점하는 최우수작품상에 <랑종>을 올려놓은 것은 해석해볼 만한 논점이다.

전체적인 조망을 두고 본다면 BIFan의 선택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올해 BIFan이 지지했던 영화의 톤과 무드는 ‘냉소’였기 때문이다. 경쟁부문에서는 인간의 통제력을 비웃은 <킹 카>, <그녀는 초대받지 않았다> 등이 BIFan의 선택을 받았다. 영화제의 핵심을 이루는 비경쟁부문(“월드 판타스틱 블루/레드”부문과 “금지구역”)이 선택한 작품들에서도 냉소는 작품의 중핵을 관통했다. 자기 혐오에 가까운 설정을 유희적으로 풀어낸 <베니 러브 유>, <사악한 쾌락>이나 가족주의의 실패를 장엄하게 그린 <동생을 위한 절대적 사랑>, <잭슨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복수의 카타르시스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 <죄의 근원>과 <악의를 위해서> 등은 인간 주체와 자기효능감을 의심하며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조소했다. 

이 같은 흐름은 레거시 미디어 작품뿐만 아니라, VR 섹션과 같은 뉴미디어에서도 엿보인다. 공식 초청을 통해 들어온 작품 중 <너의 심장소리가 들려>와 같이 낭만적인 작품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순회>와 같이 인간을 원죄적 존재로 그려놓은 작품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이는 과거를 회상하는 작품들에서 두드러졌다. 그레인 도트 효과가 돋보이는 <미러: 더 시그널>은 우주선 난파로 인해 불명예스러운 과거와 마주한 인물의 감정을 통해 불변하는 흔적의 연좌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질문한다. 한편 <안녕 문어 아저씨>는 주체적으로 규정한 공동체적 책임을 자녀가 소화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주체성은 상대의 관용을 기대해야만 하는, 마냥 옹호될 수만은 없는 대상이 된다.

이처럼 올해 BIFan은 유달리 인간을 원죄적인 존재로 보는 작품이 많았다. <랑종>은 애초부터 절대 옹호할 수 없는 대상을 끔찍한 방법으로 전시한다. 이미 수많은 평자가 지적했듯, <랑종>은 카메라의 관음적 권위에 취한 다큐멘터리 팀이 용납될 수 없는 방식으로 전시한 약자의 고통을 엔터테인먼트로 소화하는 과정에 참여하길 권하는 사악함을 가지고 있다. 애초에 불쾌하고 찝찝한 감각을 겨냥한 영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결국 자신들이 관음했던 대상에게 단죄되는 수준을 넘어, 철저히 조롱의 대상이 된다. 판타스틱영화에서 가해자가 도륙되는 플롯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랑종>이 승부수를 건 것은 극의 사악함이다. <랑종>은 장르적 카타르시스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철저히 파운드푸지의 이미지로 조형하되, (하필이면) 철저히 극의 논리를 따른다는 것이다.

 

베니 러브 유(2020)

영화제라는 관용의 명과 암

<랑종>에 대한 오호는 이 승부수를 긍정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BIFan은 어쨌거나 이 사악한 승부수에 지지를 표했다. 올해 BIFan의 전반적인 흐름이 냉소였고, 캐치프라이즈가 “이상해도 괜찮아”였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전혀 이해못할 선택은 아닌 듯하다. 다만 이 선택이 판타스틱 영화제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 ‘최소한의 복합적 요건과 최대한의 수위를 실험’하는 데 성공적이었는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이는 꽤 쉽게 그렇지 못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이미 <랑종>보다 훨씬 높은 수위로 관객의 윤리에 도전했던 영화들이 있다. <세르비안 필름>(2010)은 신생아 강간이라는 장면을 넣어놓고 “주인공이 세뇌된 상태고,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니까”라고 잡아뗀다. 심지어 영화는 뻔뻔스럽게 이를 “예술적 포르노”라며 지칭하며 관객을 도발한다. 이건 이미 2010년대 초의 이야기다. 

이 같은 실험을 거쳐 라스 폰 트리에는 <님포마니악>(2013)에서 몸서리쳐질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한 낙태 장면을 칸 영화제라는 메이저 시장에 가져다 놓는다. 2018년 <살인마 잭의 집>은 비경쟁부문에 ‘초청’된다. 이는 이미 영화계에서 <랑종>이 했던 실험에 대한 검증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BIFan의 선택은 ‘이상해도 괜찮아’라기 보다는 구태의연한 10년 전 실험의 동어반복이거나 일각에서 이는 “비평적 할복”[3]일 수 있다. 혹은 (인정하기 싫지만) 판타스틱 영화제라는 자리에 주어진 특권적 관용을 남용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제25회 BIFan이 실패한 영화제라고 몰아세우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 뚜렷한 흐름을 만들어냈으며, 단순한 기믹을 넘어선 시네마로서 VR을 발굴한 비욘드 리얼리티 섹션의 성과는 호평할만하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리 헤이븐 존스의 <그녀는 만찬에 초대받지 않았다>와 헤니타 피녜이루의 <킹 카> 또한 주목할만한 영화제적인 성과였다. 특히 헤니타 피녜이루의 <킹 카>는 판타스틱영화에서 꾸준한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프랑스 감독 쿠엔틴 듀피욱스의 시도가 어떻게 퍼지고 있는지 관찰할 수 있는 사례였다.

제25회 BIFan의 순기능은 ‘마킹’이 되지 않는 부분들에서 더 두드러졌다. 특히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관용이 빛났다. 아마추어리즘이 활용할 수 있는 태도를 통해 혐오와 유희를 적절히 조화시킨 칼 홀트의 <베니 러브 유>(월드 판타스틱 섹션)와 저예산 장르영화에서 종종 남용되는 점핑 스케어드의 기믹적 사용을 서사적 요소로 확장하는 노련함을 보여준 다미안 맥카시의 <경고>(부천초이스 섹션), 1인 프로덕션의 자유로운 창작환경을 십분 활용한 호리 타카히데의 <정크헤드>는 이번 BIFan이 내걸었던 “이상해도 괜찮아”에 더 어울려보인다. 다만, 명예롭지 못한 의혹을 일으킨 작품에 ‘마킹’을 한 것은 아쉬운 실책으로 두고두고 남을 것이다.

 

 

글·이현재
영화평론가. 2020년 동아일보 영화평론부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경희대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한류 스토리콘텐츠의 캐릭터 유형 및 동기화 이론 연구』(2018) 등의 다양한 연구를 보조・수행했다. 평론으로는 「보이(지 않)는 폭력」(2020, 창비), 「<미나리 – 잡초 우거진 황무지의 낭만, 그 심산하고 이상한 풍광>」(202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등이 있다.


[1] 『Cinefantastique』는 현재 디지털 스캔을 거쳐 archive.org에 보관되어 있다. 1970년 가을호 이후부터 2002년까지만 무료로 열람할 수 있다.
(https://archive.org/details/cinefantastique_1970-200270)
[2] 유운성 「영화제의 검열-효과에 관한 노트」, 『인문예술잡지F』(4호), 2012.1.
[3] 코로나로 인해 어려워진 상황을 타파하고자 비평적 기능과 역량을 상업 영화에 몰아주는 행위를 말한다. <승리호>에 대한 씨네21의 호평을 비아냥거리기 위한 용도로 트위터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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