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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애의 문화톡톡] 그림자를 보는 감정의 지력: <홍평국전>
[양근애의 문화톡톡] 그림자를 보는 감정의 지력: <홍평국전>
  • 양근애(문화평론가)
  • 승인 2021.08.3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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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반드시 순서대로 쓰게 되지만 결코 순서대로 읽히지 않음으로써 의미를 발생시킨다. 고전소설 속 영웅의 이야기가 그렇다. ‘고귀한 혈통, 비범한 능력, 시련과 위기, 조력자의 도움, 그리고 위대한 업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순서는 주인공의 영웅-됨을 위해 바쳐진다. 그 과정에서 오롯해지는 영웅의 이름은 역사적 문맥 위에서 빛난다. 초월적인 능력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하여 비로소 하나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웅이란 또한 고전의 지위 속에서 정형화되고 마는 이름이기도 하다. ‘난세의 영웅’이라는 관용구에 영웅-됨의 개별성과 구체성을 다 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누가 영웅인가?’(‘그 영웅의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무엇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종종 건너뛰거나 괄호 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을 다시 쓰는 일은 ‘난세’와 ‘영웅’ 사이를 손쉽게 건너가지 않기 위해 맥락을 되돌아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연극 <홍평국전>의 원작은 조선후기의 영웅소설인 『홍계월전』이다.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비범함을 타고난 주인공 계월이 장사랑의 난에 버려졌다가 평국이라는 이름으로 대원수가 되어 나라를 구하는 이야기다.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이름을 바꾸고 (남장하여 혹은 여성임을 속이고) 남성-영웅의 지위에 오르는 홍계월의 이야기는 많지 않은 여성 영웅의 이야기 중에서도 독특하다. 대원수 홍평국이 여성임이 밝혀진 이후에도 전쟁 영웅인 그의 지위가 완전히 박탈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유교적 질서를 벗어난 전개다. 홍평국이 부모를 만나 자신이 계월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그로 인해 여성임이 탄로 나면서 전환되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전쟁이라는 남성성의 영역에서 활약하던 평국이 천자의 명으로 자신의 부하인 보국과 혼인하면서 군대의 질서와 성 역할이 충돌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설유진 연출은 <홍계월전>을 제목으로 한 공연을 2019년에 선보인 적 있다. 2021년, 제목을 바꾸고 일인 낭독공연에서 여섯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액션 활극으로 돌아온 <홍평국전>은 원작에 내재된 파격성을 정전의 자리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어 동시대적인 문제와 만나게 한다. ‘고전의 현대적 해석’을 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백래쉬가 창궐하는 난세에 소환된 영웅서사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런 식의 해석은 홍계월의 이름을 홍평국으로 내세움으로써 남성성을 전복/전유했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공연을 보는 동안 홍계월/홍평국이라는 인물의 영웅적 모습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내내 사로잡혔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홍계월이 홍평국이 되어 홍원수의 위치에 올랐다가 ‘홍평국이면서 홍원수인 홍계월’이 되는 동안 어떤 질문에 맞닥뜨리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가, 기다란 창을 뚫고 들어오는 늦은 오후의 햇살만큼이나 깊숙하고 예리했다.

 

사진1-홍평국전 ©박태준
사진1-홍평국전 ©박태준

 

연극은 하와이언 셔츠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섯 명의 배우가 등장해서 대본을 읽는 것으로 시작했다. 평국 역을 맡은 황순미 배우를 제외한 다섯 명은 장면에 따라 다른 인물을 연기하며 극을 이끌어갔다. 전(傳)의 문투가 익숙하게 들릴 즈음 배우들이 움직이고 비로소 이야기가 생생하게 몸피를 드러냈다. <홍평국전>은 옛 명성교회였던 건물, 그래서 TINC(This is Not a Church)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 문화공간에서 공연되었다. 배우들은 높은 천장 아래 제단과 측랑, 찬양대실이었을 2층까지 빠짐없이 이동했고 배우들의 유려한 움직임에 따라 관객들은 동그란 좌식 방석을 요령껏 움직이며 360도로 회전했다. 평일 5시라는 이례적인 공연 시간, 교회의 긴 창문으로 조명보다 부신 햇살이 길게 들어왔고 라디오 헤드와 메탈리카의 익숙한 멜로디가 공간을 이질적인 시간으로 물들였다.

이 혼성적인 시공간을 횡단했던 황순미 배우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평국을 연기한 그는 자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타났으나, 그것을 계월이면서 평국인 정체성의 혼란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차라리, 두려움을 경계하나 끝없이 두려운 자의 표정이 아니었을까. 요컨대 <홍평국전>의 계월은 원작에서처럼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한스러워’하지 않는다. 원작의 해석 방향을 지시한 그 대목을 과감하게 삭제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물론 부모로부터 버려져 조력자의 도움으로 살아나 새로운 이름을 얻고 나라의 공을 세운 평국의 활약상이나, 보국과의 혼인으로 아내의 역할을 하면서 첨예해지는 갈등 요소는 극의 표면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가령 평국이 여성임을 알게 된 후, 그를 아내로 맞이하는 상황이 되자 혼란을 느끼는 것은 보국이다. 보국은 가부장의 권위를 이용하여 평국을 '계집'의 위치에 놓으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연극은 이를 "너는 경거망동 말라"라는 대사를 반복하여 희화화한다. 다시 전장에 나갔을 때, 대원수 평국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게 된 보국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낸다. 그는 평국을 제대로 알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국가도 가정도 평국의 능력이나 아량이 발휘되지 않으면 위태로워졌다. 이와 같이 젠더를 교란하고 규범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것은 원작의 몫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공연의 표면을 꿈틀거리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평국의 감정이 지닌 지적 능력이다.

마사 누스바움에 의하면 감정은 동물적 에너지나 충동이 아니라, ‘상념의 지형학적 융기’다. 그의 통찰대로, 감정이란 소중함(가치)의 지각에 대한 지적 반응이다. 평국이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이 정체성 갈등으로 인한 내면의 토로이거나 영웅의 인간적 면모가 아니라는 뜻이다. 전장에서 함부로 사람을 베고 그 위용을 모두가 두려워했으며, 심지어 천자에게도 두려운 마음을 불러일으켰던 홍원수는 수많은 죽음을 겪으며 결국 그 자신이 두려운 감정 앞에 놓인다. <홍평국전>이 “너는 그저 두려운 마음을 조심하라.”로 시작하여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다는 점을 놓치기 어려운 까닭이다. 공연에서 ‘두려움’은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원작의 의미에서 벗어나 중심을 이동한다. 선녀와 곽도사로부터 무심한 예언으로 던져진 이 말은, 두려움 없이 전장에 섰던 평국을 홍원수로 만든 다음 죽음 앞에 선 두려움으로 변하고, 끝내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되짚는 외로움의 형태로 도착하는 것이다.

 

사진2-홍평국전 ©박태준
사진2-홍평국전 ©박태준

 

평국    사람이 사람을 죽임은 무슨 일이오.

선녀    이제 너는 가서 세상을 구하라.

평국    사람 하나가 어찌 세상을 구하리오. 두려워 나가지 못하나이다.

선녀    사람이 아니면 누가 세상을 구할 것이냐.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직시하게 된 평국은 이제 칼을 들기를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면서 칼을 든다. 홍평국을 영웅으로 호명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낙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난세에 나라를 지킨 영웅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없는 세상을 슬퍼하는 지극한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그가 버려지고 오인 받고 외롭고 두려웠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은 이제 그의 것만이 아니다. 

<홍평국전>은 양부인, 양윤과 함께 천하 방방곡곡을 누비며 사람을 구하러 다니는 평국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러 이본이 있는 원작으로부터 자유로운 이 결말은 그림자를 응시하는 홍평국의 그림자를 넋 놓고 바라보던 나를 지금의 현실로 데려다 놓았다. 전언에 의하면, 셋이서 사람을 구하자 청하거늘 “네 사람이 다섯 사람이 되고, 다섯 사람이 여섯 사람이 되고, 여섯 사람이 일곱 사람이 되고, 일곱 사람이 여덟 사람이 되고, 여덟 사람이 아홉 사람이 되고 아홉 사람이 열 사람이 되고 열 사람이 열한 사람이 되고 열한 사람이 열두 사람이...” 이렇게 한 명씩 늘어났기 때문이다. 홍평국의 비범함에 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 수도 있었을 텐데, 꼭 한 명씩만 늘어나는 이 이야기의 끝이 너무나 미더워서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났다. 여섯 명의 배우가 모두 이 연극이 그려낸 홍평국처럼 보이는 듯한 느낌이 착각이 아니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어떤 이야기는 질서 바깥에서 시작되지만 결코 바깥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안을 드러내 보인다. 드러난 취약성을 외면하지 않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감정이기에, 어둠을 바라보던 사람의 마음은 지금 우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승인하게 만든다. 연극이 책 속에 누워 있던 활자를 일으켜 세우고 복잡한 사람의 표정을 보여주는 이유를 그렇게 찾고 싶다.

 

* 참고문헌: 마사 누스바움, 『감정의 격동』, 조형준 역, 새물결, 2015.

 

글 · 양근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조교수. 극작, 드라마터그, 평론을 병행하며 극 창작에 참여하고 있다. 기억/역사의 빗금과 경계를 파열하는 문화의 정치성 수행성에 관심을 두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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