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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지막 숨을 결정할 권리
내 마지막 숨을 결정할 권리
  • 장윤미 | 문화평론가
  • 승인 2021.08.31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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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물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죽음이다. 
죽음은 두려워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다. 
죽음은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고귀한 사건이다.(1)

- 이창재, 『프로이트와의 대화』 中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을 다룬 영화 <미 비포 유>

죽음이 두려운 이유

사람들은 죽는 게 두렵다고들 하지만, 진짜로 두려운 건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느끼도록 하는 것, 이를테면 늙는 것 또는 병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의지대로 신체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아프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고, 곧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존재로 하여금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하기 충분하다. 어떻게 해서든 이 불쾌함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노화를 최대한 늦출 수 있다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싶을 것이다.

죽음을 피하고 싶은 욕망은, 태어난 이상 이룰 수 없기에 더욱 간절한 욕망이다. 그런데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약적으로 발달한 의학 덕분에 건강한 신체 유지는 보장받을 수 없더라도 생명연장만큼은 실현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생명연장술과 관련한 가치 평가는 유보하고 말이다.

공중위생 개념이 보편화 되면서, 예방의학이 발전하면서, 그리고 의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의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는 과거에 비해 멀어진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자본주의 개념이 개입되고 자본에 따라 생명연장의 기간이 결정되면서 죽음은 능력과 조건에 따라 (가능한) ‘지연’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뤄졌다. 그러면서 죽음은 긍정에서 부정으로, 치료는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것으로 개념이 이동하고, 이런 흐름이 점점 고착화 되면서 탄생(삶)은 깨끗함/아름다움/부로, 죽음은 더러움/추함/가난으로 이분화됐다. 한 인간의 삶에서 죽음의 영역은 축소되거나 지연해야 하는 대상, 싸워서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예를 들어 ‘질병’이나 ‘죽음’ 등의 단어는 침입/방어의 뜻을 담고 있는 서술어들과 함께 사용되며(병균이 침투하다/질병을 예방하다/죽음을 물리치다) 삶과 죽음의 관계는 전쟁에 비유되곤 한다(투병 중이다/사투를 벌이다). 전쟁의 최종 목적은 승리다. 내 신체에 불법으로 침투한 질병과 싸워서 이겨 죽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질병은 노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 현상과 연결돼있다는 점에서 승리를 보장하는 건 쉽지 않다.

의학이 우리 삶에 깊숙이 개입하기 전까지, 병원이라는 곳이 죽음의 마지막 공간이 되기 전까지는 죽음을 선택하는 건 환자 자신이었고 죽음의 종결점은 환자 자신의 집이었다.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하거나 병원에서 해줄 것이 없다고 판단되면, 의사는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이 환자를 포기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환자에게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한 나름의 최후 대책인 것이다. 비극적인 죽음 중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당하는 급작스러운 죽음이라면, 적어도 환자는 그런 슬픔을 겪지 않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예고된 죽음이라면 말이다. 

환자의 가족들도 의사의 이런 판단과 선택의 의미를 이해했고, 적어도 ‘의사가 환자를 포기했다’라는 오해는 지금보다는 적었다. 물론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환자에게 다가올 죽음을 숨기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죽음을 앞둔 환자는 집으로 돌려보내 여생을 마감하도록 권유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 환자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을 가졌고, 죽음 이후의 절차와 애도는 오롯이 가족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핵가족화와 도시화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가족에 의지했던 돌봄 노동에 자본이 개입하면서 임종의 장소로 자택이 아닌 병원이나 요양(병)원 등의 의료기관을 선택하는 현상은 보편화 됐다. 이제는 집에서 임종을 맞는 것보다 의료 기관이나 요양기관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환자와 가족 모두 익숙해졌고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돌봄 노동을 가족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돌봄을 책임져야 하는 대상이 느껴야 하는 물리적, 심리적 부담을 덜어줬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면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 삶에서 죽음을 경험할 기회가 사라지고,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를 한층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마냥 좋다고만 할 수는 없는 듯하다,

전문적이고 효율적이라는 명분으로 의료 전문가들과 관련 기관에 죽음의 과정을 맡기고 또 의존함으로써, 과거에 비해 죽음과 동반되는 물리적·심리적 부담으로부터 가벼워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만큼 죽음을 경험할 기회가 적어지고 그에 따라 죽음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죽음을 공포와 두려움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는 점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자체가 주는 절대적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겠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 어떤 정보도 없고, 실체도 알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낯섦’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니 삶에서 죽음이 멀어질수록 무서움이 커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어찌 됐든 ‘의료 전문가’와 의료기관은 ‘질병 치료와 회복’이라는 본래적 기능 외에 ‘생명연장 가능성의 구현’ 기능이 추가되고, 죽음을 담당하게 되는 공공의 공간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죽음이 생의 마지막 과정이 아닌 ‘의료처치 중단으로 인한 기술적 현상’(2)으로 인식되도록 만들었다. 이제 환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선택권은 그 자신에게 있지 않다. 의료기계, 의료진(을 포함하는 기관), 보호자(가족)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그것은 환자, 가족, 의사가 모두 만족할 법한 선택은 없다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는 ‘죽기 전’까지는 절대 병원을 떠날 수 없는 처지가 되면서 ‘마음껏’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생명을 연장한다는 이유로 삽관장치라도 다는 순간부터 환자의 몸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다. 이른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보호자나 가족 역시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치료를 포기하는 것은 환자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죄책감에, 생명연장 장치 개입을 거부하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는 병원비 앞에서 인륜이나 윤리를 강조하는 주변의 시선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의료진 역시 생사를 결정하는 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의료인의 의무와 책임감, 그리고 환자를 포기했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 없어 때로는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지속해야 한다. 반대로 의료 시스템에 개입된 당사자란 이유로 죽음을 선고해야 할 때도 있는데, 이때 발생하는 죄책감 등 심적 고통은 의사라도 해도 절대 덜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의 삶인가, 누구의 죽음인가

의사이자 호스피스 전문의인 야마자키 후미오는 현대 의료 시스템이 질병의 치료와 치유라는 본래의 업무 외에, 죽음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면서 병원에 있는 동안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환자나 가족들이 희망을 버릴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3) 누구도 환자에게 죽음이 다가왔다고 말하지 않으며, 그저 나빠지지 않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물론 환자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환자에게 이런 핑계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고 후미오는 말한다. 오히려 환자는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환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점점 나빠지고 있다고 느끼는 환자, 좋아지고 있다고 둘러대는 의료진이나 가족의 말은 환자가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뺏는다.

이런 상황은 병원에서 죽어가는 과정에서 환자의 대부분은 소외되고 고독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후미오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의료진은 치료 방법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가족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환자는 그 선택을 수용(당)하면 된다. 이 모든 과정을 겪은 후 최종적으로 환자가 죽고 나면 남은 가족과 의료진은 서로에게 그동안 ‘사투’를 벌이느라 고생했다며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이 말에서 정말로 고생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죽음과 ‘사투’를 벌이다 죽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에 대해서 후미오는 지적한다.

죽음에 이르는 동안, 죽음과 대면하고 저항한 대상이 환자인지, 의료진인지, 아니면 가족인지 모호해지면서 겪는 혼란은 결코 특수한 경우가 아닌 것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병원에서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후미오의 책 초판이 2011년에 나왔으니, 1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는 좀 더 달라졌을 수도 있고, 일본의 의료 시스템을 설명한 것이니만큼 우리나라의 경우와 다른 지점이 있을 테지만 의료기관에서 이뤄지는 이 과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한림대 류마티스 내과 교수인 김현아는 죽음은 예방할 수 있는 병도, 고쳐야 할 질병도 아닌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는데 이른바 ‘죽음의 의료화’가 보편화하면서 죽음의 질은 오히려 과거보다 나빠졌다고 지적한다.(4) ‘죽음의 의료화’에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 곳곳마다 죽음을 방어하기 위한 의료기기가 투입되는데, 그 기기에 몸이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 신체에 약물을 투여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기계 투입이나 약물 투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환자 몸에서 자율성을 제거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기의 통제에 따르는 과정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환자의 몸은 자기 의지에 따라 통제하거나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숨은 쉬지만 스스로 쉴 수 없고, 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았다고도 할 수 없다. 의료기술의 발달이 ‘장생’과 더불어 ‘불사’의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지고 사망에 이르는 과정마다 의료 시스템과 의료진이 개입되면서 사망에 이르는 정상적인 신체의 변화과정은 이제 비정상적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 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리는 것, 곧 죽음을 피하고 최대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이해되면서 죽음의 본질에 대해서 누구든지 공적 공간에서 말하거나 공론화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죽음의 의료화 앞에서 딜레마에 빠지는 또 하나의 대상은, 바로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이다. 환자 보호자나 가족이 연명 치료를 선택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간절함과 죽음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검열이 크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의학 앞에서 치료를 중단한다는 것은 생명연장을 ‘중단’함으로써 환자를 ‘포기’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명제 앞에서 가족은 생각해야 한다. 즉 환자의 객관적인 상태, 돌봄 여부, 치료비 등등 많은 것을 따지고 계산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발목을 잡는 건 생명연장 치료에 들어갔을 때 비용과 이후 돌봄의 문제일 것이다.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치료비 앞에서 선택이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환자의 돌봄까지 책임져야 하는 경우 경제활동을 할 수 없고, 경제활동을 할 수 없으면 치료비를 충당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족들의 이중고는 당면한 현실이다. 설사 이중고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가족은 의료 전문가가 아니기에 이 모든 것은 감내하고서도 전적으로 의사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사 역시 생명연장 기술을 아는 사람으로서 결정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지 죽음을 결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의사나 가족 모두 ‘최선’을 선택하겠지만 이보다 더 우선돼야 하는 것은 인간은 삶의 욕망만큼이나 죽음의 욕망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이 욕망의 주체는 바로 환자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죽음은 환자의 것이지만 그것은 선택하는 건 환자가 아니다. 이 지점에서 소외가 발생한다. 환자는 스스로 치료의 방법이나 지속 또는 중단 여부를 선택하지 않았기에, 가족이 치료 중단을 선택했을 경우 환자는 버림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5) 반대로 원치 않는 치료를 지속할 경우 환자는 남은 삶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한다. 말 그대로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욕망이 삶에 대한 욕망만큼이나 강렬한 것이라면, 정말 두려운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환자에게 필요한 건 이 두려운 과정을 최소화, 최단화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상적’이란 표현을 붙이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고통을 최소화한 죽음’이라고 했을 때 환자를 지켜보는 사람이 가슴속에 새겨야 할 것은 포기, 중단, 죄책감, 슬픔 등 남겨진 자신의 감정보다 죽음을 앞둔 당사자의 존엄과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권리일 것이다. 이런 딜레마에 빠지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이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는 간절함, 생명연장 치료를 포기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검열이 환자의 고통을 가중하는 건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적어도 생의 지속을 연명 치료, 죽음의 종착지를 병원으로 선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죽음은 탄생만큼이나 존중해야 하고 또 존중받아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그리고 스스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다면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자기 결정권을 주장할 권리가 분명히 있다. 또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 역시 그 권리를 존중해주어야 한다. 배우자란 이유로, 부모나 자식이란 이유로, 또는 보호자란 이름으로 ‘지금’ 최선을 다해야 ‘나중에’ 원망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료 시스템에 의지하며 생명연장 치료를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영국의 완화치료 전문가 캐서린 매닉스는,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가 의사결정에서 배제된 채 병원에서 연명치료에 기대다가 삶을 마무리 짓는 것이 죽음의 보편적 과정이 돼버린 것에 유감을 표한다.(6) 그녀는 개인의 삶의 질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뿐임을 강조한다. 사람들은 병에 걸린 사람은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신체적 한계를 오래 사는 대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훨씬 많으며, 실제로 병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정작 중요한 것은 외면하고 죽음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아 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죽는 것을 일종의 의무이자 권리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현대의학을 오해하게 만드는 것 중에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죽음

환자는 생명연장을 꿈꾸는 의학기술 앞에서, 죽음이 돈벌이의 수단이 되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그리고 평화롭고 존엄하게 죽음을 준비하려는 자신을 가로막는 힘 앞에서 공포와 좌절을 동시에 느낀다. 반대로 보호자와 가족은 환자를 입원시키는 시점부터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라는 죄책감과 비난 앞에서 공포를 느낀다. 마음대로 죽음을 선택할 수도, 그렇다고 원하는 대로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더욱 어렵게 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의 주체가 누구인지다.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는 일차적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 환자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죽음의 의료화’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그 과정을 알 길이 없다. 의료화의 궁극적 목적은 완치, 치료인데 죽음 앞에서 이런 목적은 무의미하다. 의료화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이라면 한자의 고통, 공포, 두려움을 최소화하는 것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삶과 죽음 사이에 의료기술을 지나치게 개입시키고, 또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대상과 멀어질수록 대상에 대한 감정은 옅어진다. 단절과 소외가 지닌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이것이다. 감정을 느낄 수 없도록 하는 것, 애도의 과정을 충분히 거치지 못하게 하는 것. 

죽음을 앞둔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바람은 고통 없는 죽음일 테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 하는 사람의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외면하지 않을 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도 편할 수 있다. 또 하나 연명치료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가족들에게 향해 '반륜', ‘패륜’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 역시 절대 마땅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 내 옆에서 조용히 존엄하게 마지막 숨을 쉬고 싶다는 말을 듣고도 내 맘대로 그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인간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고 싶은 욕구를 지닌다는 것이다.”(7)  

 

 

글·장윤미
대중문화 연구자. 역사, 영화, 그리고 역사영화에 등장하는 인간 심리에 관심이 있다. 네이버 <연애&결혼> 판 집필 중이다.


(1),(7) 이창재, 『프로이트와의 대화』, 민음사, 2004.
(2) 이반 일리치, 『병원이 병을 만든다』, 박홍규 옮김, 미토, 2004.
(3) 야마자키 후미오,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 잇북, 2020.
(4) 김현아, 『죽음을 배우는 시간』, 창비, 2020.
(5) 오타케 후미오, 『왜 환자들은 기적에만 매달릴까』, 사계절, 2020.
(6) 캐스린 매닉스,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뜰 수 없겠지만』, 사계절,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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