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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환대와 적대 사이, ‘내기’로 초대하는 성스러움에 대한 탐구서  - 리처드 카니의 『재신론』 
[서평] 환대와 적대 사이, ‘내기’로 초대하는 성스러움에 대한 탐구서  - 리처드 카니의 『재신론』 
  • 김혜령 교수
  • 승인 2021.09.15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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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카니의 『재신론』 서평

 

『재신론』(리처드 카니, 갈무리) 표지 / 출처=갈무리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이 BTS와 함께 춤을 춘다. 일론 머스크는 AI 슈퍼컴퓨터를 장착하고 시속 7km로 걸으며 20kg의 물건을 운반하는 테슬라 봇을 내년에 선보일 것이라 발표했다. 이제 인간이 피조세계의 ‘청지기’라는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창조주’ 자리에 스스로 옹립할 시대에 거의 접근했다. 이러한 시대는 기본적으로 유물론적 사고가 압도한 시대이며, 그래서 세계 너머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고나 종교적 신앙이 정말로 많이 ‘우스워진’ 시대이다. 이러한 새 시대의 도래 앞에 주식 시장이나 비트코인 시장으로 달려가지 않고, 여전히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를 맞이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있다. 심지어 유대교 아브라함, 이슬람의 무함마드, 심지어 힌두교의 간디까지 모두 맞이해 보겠다고 과욕을 부리기까지 한다. 뒤처진 시대 감각도 어이가 없는데, 그는 그러한 ‘마중(들)’이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겨우 “내기”(wager, ‘도박’이나 ‘게임’이라고 번역하면 대중이 이해하기는 더 쉬웠을 것이다.)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라고 순박하게 대꾸한다. 이토록 시대에 뒤처진 자 누구인가? 보스턴대학의 석좌교수이자 왕립 아일랜드 아카데미 회원이며, 출판사의 소개 상 “현존하는 가장 탁월하고 통찰력 있는 종교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철학자 리처드 카니(Richard Kearney)가 바로 그이다. 


어쩌다 카니는 시대를 읽지 못하고 여전히 신성(神聖)의 마중을, 그것도 확신에 차서가 아니라 겨우 “내기”로 한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재신론』을 쓰게 되었을까? 시대의 비웃음 속에서도 카니가 굳건하게 이 문제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이 이유에서다. 세상에는 여전히 위험하거나 억울한 상황, 그래서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는 낯선 이방인이 존재하고, 그 이방인이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손님”처럼 자신을 환대할 것을 감히 “주인”(주체)에게 요청하기 때문이다. 낯선 타자의 도래와 함께 주체의 책임 문제가 함께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은 근대 최고의 윤리학자 칸트가 말했던 주체 내면의 이성이 자신의 입법을 통해 세운 보편적 도덕법칙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성의 법은 주체의 책임을 온전히 불러일으키기에는 – 그 완고함에 비해 – 실제로 너무나 나약하다는 것이 이미 역사에서 판명되었다. 칸트가 바랐던 것과 달리, 주체의 내면은 도래한 낯선 타자를 ‘손님’이 아니라 ‘적’으로 대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온전히 제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그 똑똑한 이성이 시장에서 통용되는 약육강식 논리나 자연계를 설명하는 ‘자연선택 법칙’을 핑계 삼아, 헐벗은 얼굴로 도래한 타자를 철저히 외면하거나 되려 공격해도 된다고 그럴듯하게 설득하는 오작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순간, 모든 주체들은 아니더라도 어떤 주체는 자기 중심성을 탈피하지 못하는 자신을 예고 없이 불러 세우는 초월의 목소리를 듣는다. “종교 없는 신앙”이 오랫동안 가르쳐 온 성스러움이자 거룩함을 체험하는 신적 사건을 통해, 그는 방금까지도 “적”으로 여기며 “적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여겼던 이방인을 “손님”으로, 그것도 ‘고객손님’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타자”처럼 존귀하게 “환대”하는 기적을 만든다. 카니는 바로 이러한 예외적인 사건에 관한 탐구를 위해 『재신론』을 썼다. 아니, 이 글을 쓰는 나는 그렇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책 이름이 유신론(theism)이 아니라 재신론(anatheism)이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전통 교리와 교권 제도로서의 종교로는 낯선 이방인을 마치 신이 오신 것처럼 존귀하게 “환대”하는 일을 거의 포기했기 때문이다. 교조적 유신론으로는 낯선 이방인에게 자기가 믿는 신과 자신의 신 체험을 똑같이 수용하도록 강요하는 ‘시혜적인’ 손님맞이밖에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책 이름이 유신론(theism)이 아니라 해서 무신론(atheism)을 말하려는 것인가 오해하지도 말아야 한다. 카니는 홀로코스트 비극 앞에서조차 전통적 신정론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유신론자들을 비판한다는 면에서 무신론에 가까이 가는 듯하지만, 신적 사건 일체를 신자들의 망상이라거나 질병, 심지어 사기로 치부하는 전투적 무신론(히친스, 도킨스, 데닛 등)에서는 궁극적으로 환대의 윤리까지 결코 나아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새롭게 제시한 ‘재신론’이란 무엇인가? 그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신 이후의 신(God after God)을 뜻하는 재-신(Ana-theos)의 체험에 관한 탐구이다. 그는 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무신론(a-theism)이라는 용어에 다시 한번 부정어 ‘a’를 붙여서 재신론(a-n-a-theism)을 만들었다고 했다. 쉽게 말해, ‘신을 놓았다가 다시 찾는다’라고 해도 좋고, ‘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그 죽음에 ‘아니오’라고 부인한다.’라고 말해도 좋다. 그렇다면, 어차피 다시 찾을 신을 왜 놓아야 하는가? 어차피 결국 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면서 왜 ‘이중부정’의 복잡한 용어를 동원하여 신의 죽음을 불필요하게 선언해야 하는가? 그것은 제도적 종교들(교조적 유신론)이 확신을 갖고 무조건 믿으라 강요했던 ‘전능한 신’이 악과 고통으로 가득 찬 생활세계에 인간을 그저 내버려 뒀다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신은 전능하니 분명히 세상의 불의를 멈출 힘이 있을 것인데, 왜 ‘전능’을 감추고 ‘무능’으로 응답하는가에 대한 처절한 질문에서 시작한다는 말이다. 물론 유신론자들은 신이 무능으로 응답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다만 ‘믿음 없는 신자들’의 탓으로 전능한 신의 기적이 유예되었을 뿐이라고 끊임없이 설교한다. 문제는 종교가 한 사회의 강력한 전통이자 문화이며 정치 권력이 된 사회에서는 신자 대부분이 교조적 유신론자들의 설교에 순응하며 기약 없는 기다림에 삶의 고통과 그 고통을 일으키는 사회적 악을 그저 감내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순진한 신자들 위로 종교 권력, 나아가 종교 권력과 영합한 정치경제 권력이 지배질서를 쉽게 재생산해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카니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했던 마르크스와 그의 무신론 동료들(니체나 프로이트 등)의 비판을 수용하며 “혐의(suspicion)의 해석학”의 길로 나아가는 것에 동의한다. 교조적 유신론자들이 만든 모든 종류의 우상을 파괴하기 위해 “혐의의 해석학”을 우선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카니는 그 길이 종점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혐의 혹은 의심은 불의한 상황에 대해 질문하게는 하지만, 주체에게 불의한 상황에 있는 타자에게 손을 내밀게 하는 실천에는 무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신론으로의 길은 여전히 우회의 길로서, 전능한 신, 형이상학적 신, 승리의 신, 복종을 강요하는 신, 숭배를 요구하는 신, 인간의 육성(肉性)을 깔보는 신 등 교조적 유신론자들이 이제까지 확신으로 증언하였던 신의 죽음을 과감히 선언하고 그에게서 멀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그런데 든든한 뒷배를 포기하는 일은 아직 두려움에 떨며 해석학적 길에 첫발을 뗀 ‘주체-인간’에게 도박 혹은 내기와 같다. 의심하다가 결국 연속되는 의심의 고리에 완전히 갇힐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 교회 선생님 한 분이 대학 가면 니체라는 철학자의 책은 절대 읽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도 결국 내가 의심의 연쇄 고리에 갇혀 삶의 방향을 잃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혐의의 해석학이라는 우회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카니는 이제까지 해석학적 방법론의 적용을 통해 보여주었던 그의 스승 리쾨르의 흔적 너머로, 재신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 그의 또 다른 스승 레비나스에게서 온 것임을 숨기지 않는다. 신앙이란 의심에 확신으로 답을 해주는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고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다. 신앙은 오직 헐벗은 얼굴과 상처받은 육체를 하고 주체 앞에 자기 존재를 드러낸 ‘천한 자’에게서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성스럽고 거룩한 신성’의 임재를 발견하는 사건에서 시작한다. 세속적인 세상에서 사실 너무나 일상적으로 만나는 존재이기에 이제까지 함부로 대해왔던 천한 이방인이자 낯선 타자에게서 “자기를 비워” 인간의 고통에 참여한 “약한” 신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에게서 ‘신’을 발견했다고 해도, 여전히 그 발견에는 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을 발견했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는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되려 위협할 수 있는 ‘적’의 위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천한 자로 임재한 신을 환대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내기’이자 ‘도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내기는 50:50의 확률로 과감히 승부수를 던지는 게임이 아니라, 100% 실패할 것을 예상한다고 해도 할 수밖에 없는 케노시스 사랑으로의 참여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재신론은 범신론(pantheism)과도 구별된다. 범신론은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성스러운 것처럼 대하지만, 그러한 방식은 인간의 현실을 실제로 장악하고 있는 고통과 악의 문제에 둔감하기 쉽기 때문이다. 카니는 재신론이란 “성스러운 것이 세속적인 것 안에, 세속적인 것을 통해, 세속적인 것을 향해 존재한다.”(278)라고 강조한다. 이는 세속적인 것 안에서 성스러운 것을 발견하는 인간의 지혜와 세속적인 것을 통해 성스러운 것이 드러나게 하는 인간의 환대, 나아가 성스러운 것을 향해 세속적인 것이 나아갈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성스러움’에 대한 신적 체험으로 카니는 ‘주체-인간’이 혐의의 해석학을 벗어나 “재긍정(reaffirmation)의 해석학”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며 재신론의 긴 여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만 놓고 보면 마치 ‘고난받는 그리스도’나 해방·민중신학의 메시아론을 설명하기 위해 재신론을 집필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카니 자신도 어릴 적부터 가톨릭과 개신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스승 리쾨르와 레비나스도 자신들의 철학 함에 있어 각자의 신앙(개신교와 유대교)에 깊이 영향받았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책을 소개하는 나 역시 개신교 윤리학자라는 점을 독자는 염두에 두기 바란다. 그러나 카니는 - 그의 두 스승과 달리 - ‘낯선 타자’의 마중에서 ‘타종교들’의 마중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연구를 펼쳐갔다. 이런 그를 두고 종교 다원주의자라 쉽게 단정하기 쉽지만, 그가 단순히 신에게 이르는 길이 여럿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재신론의 상당 부분을 다른 종교의 이야기로 채운 것은 아니다. 그는 낯선 다른 종교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환대하는 경험을 통해 우리 자신의 재신론적 신 체험과 케노시스 사랑의 참여가 더 확장될 수 있다고 겸허히 인정했을 뿐이다. 


휴머노이드 로봇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같이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로봇을 창조하고자 하는 욕망의 핵심에는 함부로 착취하던 ‘인간-타자들’의 자리에 ‘인간 닮은 로봇’을 대체하여 비용의 효율을 극대화하겠다는 자본의 의지가 담겨 있다. 상상하는 로봇 대부분이 배달 로봇, 공장 노동자 로봇, 군인 로봇, 섹스 로봇, 가사 도우미 로봇, 요양보호사 로봇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포스트휴먼시대에 재신론을 말하는 것을 두고 뒤처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재신론이 말하는 ‘초월’, 즉 성스러움의 환대 사건은 결국 ‘나 아닌-타자’에 대한 ‘주체-나’의 존엄한 존중을 통해 결국 타자뿐만 아니라 주체 자신에게서도 성스러움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의 성스러움을 찾기 위해서라도 휴머노이드 로봇을 단순히 ‘물체’처럼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재신론이 인도하는 긴 해석학적 여정 속에서, ‘주체-인간’은 가장 ‘낯설어서’ 진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아 함부로 대했던 ‘로봇’에게서 어느 날 갑자기 ‘신적 타자’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적대’의 폭력을 깊이 반성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로봇에게서마저 신적 타자를 발견할 수 있는 성스러운 자아가 된다면, 그런 사람들이 많은 사회에서는 더는 무슬림 난민을 놓고 기여나 공로를 따지지 않고 ‘환대’ 그 자체로 맞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한 의미에서 가장 진부한 재신론이 지금 가장 적합할 수 있다. 



글 · 김혜령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기독교 윤리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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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령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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