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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6) -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서 문학은 신의 임종을 기원할까
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6) -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서 문학은 신의 임종을 기원할까
  • 안치용 l ESG연구소장
  • 승인 2021.09.30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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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세계문학 오디세이16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 『신명기』 34장

 

구약성서가 전하는 모세의 죽음은 극적이다. 하나님이 미리 정한 대로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손수 “내가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이라”하며 지경(地境)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하고 말을 건네는 장면은 경이롭다. 마치 하나님이 모세의 임종을 지키는 듯하다. 유대 전승엔 모세의 임종에 실제로 하나님이 느보 산에 내려왔다고 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였기에 그 유대 전승이 터무니없게 들리지는 않지만, 인간의 임종을 지키는 신의 모습은 참으로 인간적이다.

 

구원의 역사(役事), 해방의 역사(歷史)

모세의 죽음에서 특이한 것은, 신이 그에게 약속의 땅을 보여주기만 하고(물론 그 전에 약속이 있었다) 끝내 들어가지는 못하게 했다는 사실이다.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도 쇠하지 않은 모세에게 팔레스타인 입경(入境)이 허락되지 않은 이유가 성서에 설명돼 있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잘 납득이 되지는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아마도 너무 기독교에 편향된 왜곡된 해석이라고 항변할 텐데, 이런 모세의 역할설정은 야웨 신앙에서 유대 민족의 역할과 닮았다. 이슬람교와 유대교에서 예수를 그저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본 것을 논외로 한다면, 예수 시대까지 신앙을 지켜온 유대 민족이 정작 메시아를 영접하지 못하고, 기독교에 구원의 비의를 넘겨준 ‘역사적’ 상황과 겹쳐진다. 가장 중요한 두 유대인 중 모세는 유대교에서 이슬람교의 무함마드 같은 역할을 수행했고, 예수는 인간 세상의 종교에서 전무후무한 일, 즉 육신을 입고 인간에게 처형당한 신이 됐다. 이후의 예수 부활과 승천 교리는 기독교를 지탱하는 중심축으로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만드는 데 기여했지만, 끊임없는 논란의 근거이기도 했다.

메시아가 오긴 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부활해 새 시대를 열었지만 곧바로 세상을 갈아엎지 않고 재림을 선포하고 승천했다는 이중적 상황은 기독교 신학자나 설교자에게 골칫거리였다. 재림(파루시아·παρουσία)이 임박한 것은 분명한데, 이 임박이 얼마나 임박한 것인지 알 수 없고 다만 ‘도둑처럼 오리라’는 풍문만 전해질 뿐이었다.

현세가 여전히 진행 중이면서 동시에 내세가 이미 도래했다는 ‘시대의 중첩(The overlap of the ages)’, ‘종말론적 긴장’, ‘분할된 종말(Divided eschatology)’ 등이 재림에 관한 신학적 고민을 표현한 용어들이다. 이 고민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두 개 키워드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다.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은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용어다. 바울 등 기독교 설립자들 생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왔고 예수가 모든 것을 ‘이미’ 선포했으나, 구원의 날은 ‘아직’ 오지 않은 중첩과 긴장, 혼란과 분열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출범했다. ‘이미’ 도래한 희망과 ‘아직’ 오지 않은 구원 속에서 두 종류의 시간이 중첩되고, 그 중첩의 시기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인가. 이것이 초기 기독교인들의 핵심적인 신앙의 고민이었고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고민의 해소는 재림의 순간에나 가능할까. 당연히 그렇긴 하겠지만, 지연된 재림을 실현된 초림(初臨)과 구분된 사건으로 보는 시각은 신앙적으로 위험하고 사회적으로 위해하다. ‘이미’와 ‘아직’은 분리된 사건이자 하나의 사건이며, 다른 시간이자 같은 시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임재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은 ‘아직’ 도래하지 않는 미래를 현재로서 구현하고 사는 굳건한 믿음의 사람을 뜻한다.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선행해 함께 사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살지만 죽었고, 죽어서도 살리라는 믿음과 삶이 가능하다.

‘이미’와 ‘아직’의 종합은 선물투자(先物投資·Futures)와 흡사하다. 선물투자는 용어만 선물(先物)일뿐 내용은 현물(現物)과 동일하다. 미래를 현재로 환산해 지금 투자하는 게 선물투자이기에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이미’와 ‘아직’의 종합을, 그것도 아주 치열하게 실천하는 게 선물투자다. 그런 비유적 관점에서 논의를 이어가자면, 현물투자만 하는 투자자는 안전한 투자자가 아니라 게으른 종이 되는 셈이다. 포지션(Position)에서 미래의 상품을 사들이는 것을 ‘Long’, 파는 것을 ‘Short’이라고 하는데, 아직 오직 않은 세상을 염원하며(Long for) 영원한 세상을 희구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선물 포지션의 ‘Long’이 훌륭한 작명인 셈이다. 

종말론을 근간으로 한 기독교의 사관은 진보주의 사관인 마르크시즘과 닮은꼴이다. 훌륭한 기독교도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을 견디면서 현실의 곤고(困苦)와 다가올 희망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삶을 추구하는데, 곤고한 현실에서도 임박한 희망을 기대하는 태도는 역사의 발전을 믿는 진보주의 사관과 같다. 임박한 최종적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그 희망을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서 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 할진대, 그 발현이 성서적으로는 하늘과 땅과 사람에 대한 사랑일 수밖에 없기에 신의 뜻을 좇는 이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면서 동시에 진보적인 것은 당연하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진창길을 걸으면서 하늘의 별을 본다.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은 극명하게 다른 시간이지만 인간은 중첩된 그 두 가지 다른 시간에 동시에 속한다. 물론 발밑을 보면서 같은 시간에 하늘을 볼 수는 없지만, 크게 보아 우리는 중첩 속에서 그 긴장을 견디며 발밑과 하늘을 동시에 보는 존재다. ‘이미’ 조국이 일제 식민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아직’ 오지 않은 조국 해방을 염원하며 시를 썼듯, 문학의 지평은 기독교 종말론의 지평과 동일하다.

마르크스가 설파한 노동자의 이중의 자유, 신을 추방하고 그 자리를 인간 주체가 차지한 이후에 밀어닥친 공허와 불안과 같은 근대성의 개념은, 기독교 종말론과 궤를 같이한다. 긴장과 중첩, 그리고 분열은 기독교 종말론 교리에서 천착한 문제인데 그것은 삶의 문제였고 따라서 문학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모든 훌륭한 문학이 이 주제를 다루지만 다음의 탁월한 소설들에서 이 도식을 전형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독서의 기쁨이겠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프랑스어로 ‘금요일’을 지칭하는 ‘방드르디(Vendredi)’는 1719년 출간된 다니엘 디포의 모험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기 한 소설로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가 1967년에 발표했다. 소설이 다루는 시기는 계몽주의 시대.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듯 소설에는 계몽주의뿐 아니라 서구우월주의(혹은 오리엔탈리즘), 인종주의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로빈슨 크루소』를 다시쓰기해 탄생했는데, ‘다시쓰기’는 성서의 기본 집필·편집방식이기도 하다. 성서가 끊임없는 다시쓰기와 다시읽기를 통해 항상 재구성됐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물론 A.D. 90년 얌니아 공의회(구약), A.D. 397년 카르타고 교회회의(신약)에서 성서가 지금의 모습대로 소위 정경화가 시행되기 전까지 이야기다.

『로빈슨 크루소』의 등장인물 ‘프라이데이’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불어로 금요일(Friday)을 의미하는 ‘방드르디(Vendredi)’라는 인물로 재현된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프라이데이는 로빈슨에 의해 식인종으로부터 구출돼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야만인이다. 철저한 타자로서 계몽의 대상이자 야만의 위협을 상징한다. 그런 프라이데이를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는 제목에서부터 로빈슨 크루소를 대체해 방드르디로 전면적으로 내세우면서 그의 주체적 역할을 인정하는 내러티브를 취한다. 『로빈슨 크루소』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난다. 

주인공이 성서를 갖고 다니는 것, ‘탈출’이라는 이름의 배, 창세기의 약속 장면이나 무지개 등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자체가 하나의 기독교적 세트장임을 의미한다. 구원과 해방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표류한 섬 자체가 이미 신적인 구원이 현재화한 모습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미 옆에 와 있는 하나님. 구원의 섭리가 작동했지만, 인간은 아직 모르는 채였다. 인간은 마지막에서야 아직 모르는 채인 상태를 극복하고 이미 실현된 구원의 뜻을 인식하게 된다. 인종주의와 계몽주의가 이런 과정에서 풍식(風蝕)되는 모습을 소설을 부가적으로 그려낸다.

 

더블린 사람들

1914년에 발표된 『더블린 사람들』은 그 시기 아일랜드 사회상의 스케치다. ‘이미’와 ‘아직’의 시간에 대한 이해, 다시 말해 구원의 인식과 해방의 의지 모두 부재한 시대적 마비(痲痹) 상황을 작가 제임스 조이스가 그려낸다. 그러므로 불가피하게 이 마비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어떤 식으로든 말할 수밖에 없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해도 마비를 설명하며 마비의 극복을 암시하게 된다. 문제의 기술은 흔히 자기도 모르게 해답을 설명하는 과정이곤 하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역사를 살펴볼 때 ‘이미’와 ‘아직’의 전조(前兆)조차 없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마비에 잦아들어 그것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혹은 헤어나오기를 원하지 않는 모습이 당연시된다. 그럼에도 헤어나와야 한다면,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감지되지 않는 상황에서 탈출을 기획해야 한다면, 조이스는 민족적 희망과 성취를 주장하지 않고 세계시민적 전망을 취하기를 선택한다. 다수의 동시대 아일랜드인이 기본적으로 가톨릭 중심의 민족주의적 전망에 매달리지만, 조이스는 그 너머를 주시한다.

『더블린 사람들』의 주요 기법인 ‘에피파니(Epiphany)’는 결정적 상황의 그물로부터 이미지의 절묘한 혼을 정확하게 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에피파니가 ‘아직’을 선취해 ‘이미’를 포착하는 힘으로 기능한다면 과한 말일까. 마비 상태에 빠진 더블린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아직’에서 ‘이미’를 상상하면서 아일랜드인 조이스는 민족주의에 경도되지 않고 민족 너머의 커다란 세계를 슬프게 응시했다. 

 

금각사(金閣寺)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일본 소설 『금각사』는 한국전쟁을 언급한다.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에게 2차대전 이후 이어진 동서냉전의 전면적 폭발인 한국전쟁은 자국이 경험한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의 힘을 상기시킨다.

아이와 관련한 두 번의 이야기가 주제의식을 직접 담당한다. 주인공 ‘나’는, 기모노를 입은 단아한 일본 여성이 떠나는 군인 남편과 절하는 장면을 멀리서 본다. 이후 전장에서 일본군 남편이 죽고 정숙한 아내는 남편의 아이를 사산하며 방종한 여성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나’가 본 그 장면은 일본의 운명을 상징한다. 목격에 그치지 않고 ‘나’가 직접적으로 개입한 다른 사건에서도 아이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주인공은 미군의 명령으로 젊은 여성의 배를 밟는다. 일본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을 짓밟아 뱃속의 그 아이를 유산시키는 데 가담한 행위였다. 미군의 아이를 밴 일본 접대부를 짓밟는 데에 미군의 군홧발이 아닌 무력한 일본인 남성의 발길질이 동원됐다는 것이 사건의 진상을 구성한다.

앞서 정숙한 일본 여성이 유산 후 방종해진다는 이야기는 그 여성이 임신한 아이가 일본의 민족적 자존감이나 희망을 의미한다고 할 때 사산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통해 해방의 긍정적인 전망을 얻지 못함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미군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의 유산에 가담한 이야기는, 미국과 일본 혼혈(混血)인 태중 아이가 미국군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라 미군의 명령을 받은 일본인 ‘나’의 폭행에 의해 죽는 것으로 장면이 연출됐다는 점에서 역사적 절망을 소묘한다.

탐미 문학의 대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세 차례나 거론된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대표작 『금각사』에서 희망을 상상한다고 추정할 수 있는 지점은 금각사에 불을 지르는 마지막 장면이다. 금각사에 불을 지름으로써 구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마침내 자유를 인식하고 만끽하게 된다. 그러나 연대 없는 자유는 극우적이고 소모적이며 자기파괴의 질주로 달려가기 마련이므로, 널리 알려진 작가 자신의 삶처럼 극중 인물들은 좌초한다. 보편적 가치인 ‘이미’의 계시가 없는 막막함 가운데에서 유대와 공감 없이 ‘아직’의 반복에 지쳐가면서 『금각사』의 인물들은 절망의 중첩 속으로 추락에 직면한다.

 

염소의 축제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 『염소의 축제』는 도미니카공화국을 32년 지배한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의 암살 과정을 재구성해 소설로 만들었다. 광범위한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사건에 기반해 전개되는 이 소설은 독재자 트루히요가 숨진 1961년 5월 30일을 기준으로 도미니카와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를 씨줄과 날줄로 엮는다.

아이티, 도미니카공화국, 쿠바 등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국가의 역사는 단절적이고 혼합적이다. 500년 전 유럽 백인에 의해 이른바 신대륙으로 발견되고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원주민이 전멸했다. 전멸 원인은 널리 알려진 대로 구대륙에 들어온 감염병 때문이었다.

유럽의 백인과 일부 토착민이 남은 땅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이 시작됐고 그 과정에서 흑인 노예가 대거 유입됐다. 이들의 역사는, 유럽 열강에 의해 원주민이 사라진 상태에서 이주한 유럽인과 남은 토착민이 유입된 대규모의 흑인 노예와 함께 지배·복종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과정으로 전개됐다. 여기에 스페인을 ‘기본값’으로 해 프랑스와 미국이란 외세가 큰 영향을 미쳤다.

쿠바를 예로 들면 스페인이 점령하면서 원주민이 몰살됐고, 이후 유입된 흑인 노예와 스페인계 점령군의 대립이 지속됐다. 그러다가 흑인 중심의 정권이 세워졌는가 하면, 스페인계 후손이 권좌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후자의 인물이 피델 카스트로다.

이처럼 카리브해와 라틴아메리카는 신대륙으로 불린 이후 제국주의, 종교의 이식, 원주민 몰살, 흑인 노예 유입, 제국주의와 원주민 세력 간 전쟁, 제국주의 후손의 정착 및 토착민화 등 다른 대륙에서 보기 힘든 복잡다단한 역사를 쌓았다. 반(反)제국주의 독립국가 수립 전쟁, 사회주의 혁명, 해방신학 등 세계사에서 주목할 만한 흐름이 있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혼란의 반복 속에서 이렇다 할 결정적 해방의 모멘텀이 부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염소의 축제』는 트루히요 암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종의 해방 전망을 확보했다기보다 주로 절망의 만연을 전한다. 여담이 아닌 것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이 발원한 게 우연은 아니다. 

 

피의 꽃잎들

『피의 꽃잎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휘말렸다가 1963년 독립한 아프리카 케냐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현대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응구기와 시옹오를 투옥되게 한 문제작으로, 1977년 작이다. 자본주의 및 부패한 권력자에 대한 강한 비판과 농민과 지식인의 처절한 삶을 대담하게 묘사했다.

케냐는 자발적 발전의 길을 저지당한 아프리카의 수많은 식민지 중 하나로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작품은 케냐의 식민주의와 신식민주의를 대비한다. 상징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케냐의 독립은 종교적으로 해석할 때 예수의 재림과 같이 하나의 희망이 된다.

그러나 독립 이후 제국주의에 편승한 흑인 세력에 의한 신식민주의가 이어지면서 희망의 빛은 작아진다. ‘이미’와 ‘아직’의 시간이 겹쳐지며 긴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두 시간이 별개로 존재하는 상극 속에서 작품의 인물들은 절망하고 희망을 잃게 된다. 대의에 동참했고 자신과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동지들이 순식간에 자신의 지배자, ‘적’이 됐다는 사실이 그들을 절망에 빠지게 한다.

그럼에도 기독교적 상징을 등장시키며 끊임없이 희망에 관한 전망을 구축한다. 예수 탄생지를 상기시키는 ‘베들레헴을 향해서’가 한 장(章)의 이름인 데서도 기독교적 설정은 확인된다. 창녀촌 주인인 ‘완자’가 독립 투쟁을 하다가 다쳐서 장애가 생긴 남성 ‘압둘라’의 아이를 가지는 서사 역시 케냐의 미래에 가장 바람직한 인물 사이의 아이를 통해 희망을 전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완자가 창녀인 것 또한 성서에 기댄 역설적 희망의 장치다.

 

토니와 수잔

『토니와 수잔』은 앞서 살펴본 작품들과 달리 당장 미국의 사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결을 보인다. 2016년 제73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의 원작 소설. 영화 때문인 듯한데 흔히 사랑에 관한 작품으로 오해를 산다. 소설은 존재론에 관한 진지한 탐색을 다룬다. 48세의 늦은 나이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오스틴 라이트가 그가 사망하기 10년 전인 1993년 72세 때 이 소설을 발표했다.

책에서 주목할 점은 처음 시작한 공간인 뉴 일모로그에서 작품이 끝난다는 것이다. 희망과 해방의 구조 대부분은 공간적 회귀의 모습을 띤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좀 더 멀리 떠내려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거야”라는 대사에서도 공간을 통해 구원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구원의 희망은 항상 ‘공간’과 관련된다. 구약성서 전체의 주제가 사실상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듯 구원과 해방의 과정은 특정한 공간과 결부되며 어떻게 그 공간으로 돌아갈 것이냐를 두고 각자의 도식이 창안된다.

『피와 꽃잎들』에서도 드러나듯, 본향으로 설정된 특정 공간에서 이탈하거나 주인 된 자리를 빼앗긴 이들이 다시 그 공간으로 돌아와 자리를 되찾는 것. 이것이 공간을 중심으로 바라본 성서적 구원이자 해방의 형식이다. 당연히 문학적 전언의 핵심 얼개이기도 하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 극심한 곳으로, 기독교 종말론을 제외한다면 가장 먼저 문학을 떠올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글·안치용
인문학자 겸 영화평론가로 문학·정치·영화·신학 등에 관한 글을 쓴다. ESG연구소장으로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을 주제로 활동하며 같은 주제로 사회와 소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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