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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각색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 <추적> 케네스 브래너
[정문영의 시네마 크리티크] “각색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 <추적> 케네스 브래너
  • 정문영(영화평론가)
  • 승인 2021.10.1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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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버전의 <추적>

 

2007년 개봉한 케네스 브래너(Kenneth Branagh) 감독의 <추적> (Sleuth)은 1970년 초연된 앤소니 셰퍼(Anthony Shaffer)의 연극 『추적』을 각색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 앞서 이미 1972년에 죠셉 맨키비츠(Joseph Mankiewicz)가 감독한 각색영화 <발자국>(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제목)이 나왔으므로, 리메이크 영화이기도 하다. 토니상을 받은 원작은 1970년대 초반 연극계에 획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와 마이클 케인(Michael Caine)을 주연으로 한 맨키비츠 각색영화 역시 출연배우들이 모두 아카데미상 후보로 오른 첫 영화로 기록을 세울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맨키비츠 영화에도 출연한 마이클 케인과 쥬드 로(Jude Law)를 주연으로, 2005년 노벨 문학상 수상 극작가 해럴드 핀터(Harold Pinter)를 각본작가로 팀을 구성해서 2007년 최대 화제작이 되었던 브래너의 <추적>은 그 높은 기대감에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원작과 1972년 영화가 준 많은 재미들뿐 아니라 브래너 감독의 작가주의적 특성도 살리지 못한 지나치게 위협적이고 어두운 영화라는 지적이 부정적 평론의 요점이다.

영국적 위트와 기지에 넘친 대사들과 수집품과 게임들이 가득한 무대의 전작과는 달리 미니멀리즘적인 무대 위에 전개되는 차가운 죽음의 게임으로 각색된 <추적>에 대한 당시 평단의 부정적인 반응은 늘 너무 “핀터레스크”한 영화라는 지적을 동반했다. 사실 <추적>은 핀터가 정치적으로 헌신하는 한 시민으로서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극작 중단을 선언한 뒤, 그가 선택한 엔드게임이라는 점에서, 그의 스크린-플레이로 볼 수 있는 여지도 많다. 브래너 감독 또한 기꺼이 인정할 정도로 <추적>은 핀터의 영화로 간주되는 경향이 대세이다.

 

브래너와 핀터의 <추적>

 

브래너와 핀터는 함께 스크린에 등장하기도 한다. 작가주의 감독, 오손 웰스(Orson Welles)나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이 “내가 감독이다”라는 식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과는 다른 의도에서이다. 감독과 각본 작가가 함께, 핀터의 『떠나기 전 한잔』을 각색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 속 영화(film within a film)의 심문 장면에서 고문을 하는 자와 당하는 자로 익명의 남자1, 2 역할로 등장한다. 뒷모습만 보이는 고문을 당하는 자, 화면을 가득 채우는 앞모습의 고문을 하는 자의 역할을 브래너와 핀터가 각각 맡았다. 이와 같은 심문 장면을 영화 속 영화로 삽입한 의도는 영화의 주인인 감독과 고용된 하인과 같은 열등한 입지에 있는 각본 작가 사이의 위계적 관계가 전도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감독과 각본작가, 원작과 각색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깨뜨리는 각색 행위의 정치적 의도와 브래너가 영화의 주인이 되는 작가주의적 영화보다는 위계적인 영화산업의 닫힌 시스템을 열린 시스템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영화 정치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각색영화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2007년 개봉 당시 <추적>은 너무 난해하고 비인간적인 영화로 평가되었을 뿐 그 각색의 정치적 의도와 성과는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1972년과 2007년 <추적>에 모두 출연했던 케인은 핀터에게 오마주를 표하며, 언젠가 핀터의 <추적>이 재발견될 날이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최근 넷플리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Squid Game, 2021)의 화려한 등장은 <추적>의 재발견에 대한 그 예언을 떠올리게 한다. 2008년 각본이 완성되었을 때, “낯설고 난해하다”라는 이유로 외면을 당했던 <오징어 게임>이 2021년에 글로벌 관객으로부터 환호를 받게 된 것은 그 사이 우리 사회가 456억원에 목숨을 건 끔찍한 머니게임이 이제 현실감을 갖게 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살벌한 죽음의 머니게임을 다루고 있다는 같은 이유로 외면을 당했던 <추적> 또한 이제 재발견될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추적>의 재발견을 위한 다시 보기의 적절한 방식은 이 영화 자체만이 아니라 각색영화로 접근하는 관점을 취하는 것일 수 있다. <추적>을 원전과 기존 텍스트에 대한 수정된 관점을 제시하는 각색영화로 접근하는 방식은 이 영화 자체 뿐 아니라 기존 텍스트들 또한 재발견할 수 있는 지라르 쥬네트가 말하는 “팔림세스트적” 텍스트로서 <추적>을 보는 배가된 즐거움의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각색이 무엇인지 아는가”

 

최근 각색연구는 각색을 새로운 사회적•문화적 맥락과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시각에서 기존 텍스트를 수정하는 방식의 “다시-보기”(re-vision)로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다시-보기를 하는 동기, 즉 각색의 동기는 희생과 침묵을 강요당하고 주변화된 것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가시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에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모든 텍스트는 다시-보기, 즉 각색이다. 셰퍼의 『추적』 또한 원작이자 1930년대 황금기를 맞았던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류의 탐정소설 장르를 연극으로 매체전환하여 각색한 작품이다. 따라서 원작과 두 각색영화 등, 세 개의 버전들 모두 매체와 1970년대와 2000년대라는 시차와 문화적•사회적 맥락을 가로질러 텍스트들 사이의 상호텍스트적, 상호매체적 참조와 변형들로 창조된 다시-보기들로 간주될 수 있다.

귀족 탐정소설 작가 앤드류 와이크(Andrew Wyke)와 자수성가한 청년 사업가 마일로 틴들(Milo Tindle)의 굴욕 게임을 다루는 셰퍼의 원작은 초연 당시 크리스티와 핀터의 중간 지점에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로 극찬을 받았다. 이러한 평가를 기준으로, 아마도 맨키비츠의 각색영화는 크리스티의 탐정소설 세계와 그 세계에 향수를 갖는 1970년대 영국사회의 계급 갈등을 보여주는 굴욕게임에, 2007년 <추적>은 위협희극(comedy of menace)의 대가 핀터가 부각시킨 포스트모던 글로벌 사회의 이면에 내재한 야만과 폭력의 충동에 의한 살벌한 게임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각색영화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원작과 첫 각색영화에서 앤드류와 마일로의 대면은 “탐정소설이 고귀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오락”이라는 정의에 대한 마일로의 동의를 구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반면에 2007년 <추적>에서는 앤드류가 마일로에게 “각색이 무엇인지 아느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작은 이 영화가 각색을 의도적으로 의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970년대 앤드류의 질문은 그가 설계한 게임에 앞서 귀족들이 즐기는 탐정소설과 마일로가 속한 계급이 즐기는 TV에서 각색물로 다루는 범죄소설, 각 장르가 기초하는 세계를 계급사회로 분명하게 구별짓기를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글로벌하게 유명한 베스트셀러 범죄소설 작가로 대체된 앤드류는 자신의 소설들이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고 대중 매체들로 각색되어 글로벌한 명성과 부를 얻게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따라서 그가 무명의 실직배우이자 다문화적 소수자인 마일로에게 네가 각색이 무엇인지나 아느냐라는 질문은 계급보다는 다문화주의적 인종차별의 우월의식을 반영한다. 이에 “나도 영어는 안다”라는 마일로의 대답은 2021년 각색영화는 1970년대 버전에서 가시화되지 않은 다문화주의 시대의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저항과 도전을 부각시키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제 앤드류와 마일로의 신분 차이는 잉글랜드라는 지역적, 문화적인 특수 가치들의 기준보다는 성공의 글로벌적 기준인 부와 유명세에 의한 차별로 대체되고, 글로벌 자본주의의 자본 축적의 위력이 초래한 양극화는 수퍼 리치 상류계층의 앤드류와 자수성가한 사업가가 아니라 실직한 루저, 채무자 마일로를 등장시킨다.

 

영국 귀족의 유서 깊은 장원 저택 대신 현대식의 갤러리 같은 앤드류의 저택은 단순히 무대가 또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위협희극의 대가로서 명성을 얻은 핀터 자신을 풍자하듯이, 자신의 작품들의 번역물과 각색물들을 수집해 놓은 방의 벽에 확대한 앤드류의 얼굴 사진과 <<선데이 타임즈>>(The Sunday Times)의 특집 제목으로 붙인 “위협의 대가”(the master of menace)라는 글귀와 그의 작품 제목 리스트를 담은 특대 흑백 포스터가 붙어있다. 그리고 그 옆은 그의 부와 유명세를 돋보이게 하는 그의 소장품과 동격으로 취급되는 “트로피 와이프”, 매기(Maggie)의 실물 사이즈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스타일과 격조를 갖춘 베스트셀러 작가 앤드류와 그의 아내 매기가 사는 공간은 포스트모던 문화의 속물적인 물질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일종의 “신전”과 같은 역할을 하며, 귀족 계급의 특권을 살 수 있는 자본의 위력을 과시한다. 앤드류가 CCTV로 마일로의 도착을 보고 있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하듯이, 처음부터 이 공간은 CCTV 카메라의 파놉티콘적인 감시를 통해 그가 통제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미니멀리즘적인 건축양식과 실내디자인에 하이테크 장비를 갖춤으로써 자본과 기술의 힘을 과시하는 품격 있는 이 공간에서 바로 21세기 앤드류와 마일로의 살벌한 게임을 펼쳐진다. 그 게임은 맨키비츠의 영화에서 그의 각색을 통해서는 전경화되지 않았지만 엔딩에서 죽어가는 마일로가 꼭 전해달라고 한 “죽음의 살벌한 게임” (deadly bloody game)을 가시화한 것이다.

 

 

“죽음의 살벌한 게임”

 

차가운 조명과 첨단기술 장비를 갖춘 포스트모던적인 글로벌성을 대변하는 저택의 주인 앤드류는 지적인 두뇌 게임과 탐정소설 세계에 빠져있던 1970년대 앤드류와는 달리 감각적인 쾌락과 사치스러운 특권으로 자신의 불안과 공격성을 해소시키려고 하는 진지성과 인간성이 결여된 전형적인 포스트모던적인 인간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전형적인 루저 마일로는 거침없이 앤드류의 품격 있는 공간의 표면과 가면을 찢는 공격을 가한다. 우아하고 세련된 고품격의 공간은 게임의 폭력과 호전성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2차전 복수의 게임에서 마일로가 앤드류에게서 그 공간에 대한 통제권을 상징하는 리모트 콘트롤을 빼앗고, 거울과 유리 수족관을 깨뜨리고, 앤드류에게 강제로 보석을 착용시켜 거울에 투영된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보도록 강요하는 장면은 그 공간과 그가 쓰고 있는 가면 이면에 억압된 충동과 파편들을 상징하는 페티시들의 기호들로 미장센을 구성한다. 특히 반칙으로 앤드류가 쏜 총을 맞은 마일로가 관과 같은 좁은 엘리베이터 (핀터의 아이디어로 첨가된 장치) 속으로 떨어져 추락하는 장면은 앤드류의 포스트모던적 신전의 심연에 작동하고 있는 폭력과 야만의 파괴력을 잘 표출해준다.

 

돌아온 매기

세 버전 모두 앤드류와 마일로의 살벌한 게임의 원인을 제공한 마그리트(매기)를 “사라지는 중재자”(Slavoj Žižek)의 역할을 할 뿐 부재한 인물로 다루고 있다. 각색의 “다시-보기”는 원래 아드리엔 리치(Adrienne Rich)의 페미니즘의 산물로 성정치성이 반영된 용어이다. 따라서 기존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의 다시-보기를 통해 매기의 존재는 가시화의 단계를 거치고 있음을 각색영화들은 보여준다. 원작에서 배제된 마그리트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맨키비츠는 그녀의 초상화, 코트, 그리고 여성 인형들과 같은 페티시들로 그녀의 존재를 대체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맨키비츠의 마그리트는 카메라에 자주 포착되는 초상화 속의 마그리트처럼 여전히 젠더의 틀에 갇힌 여성으로, 여전히 남자들 사이의 교환의 대상으로 취급된다. 따라서 셰퍼와 맨키비츠는 “은근히 여성혐오주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반면에 “은밀한 페미니스트” 핀터와 브래너의 매기는 사라지는 중재자로 남지 않고, “억압된 자의 귀환” 뿐 아니라, 게임의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숨어있는 실세의 존재감을 갖는다.

사실 2007년 <추적>은 시작부터 매기가 두 남자들의 죽음의 살벌한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을 지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제공하고 있다. 앤드류가 그 공간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만, 매기가 실내장식을 했다는 앤드류의 정보는 그 공간에 대한 그의 지배권 행사를 그녀가 감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처음부터 갖도록 유도한다. 다시 말해, 이 정보는 장 쥬네(Jean Genet)의 발코니(The Balcony)의 마담 어마(Madame Irma)처럼 매기가 그 공간을 꾸밈으로써 앤드류의 남성적 지배권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그 공간의 스펙터클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암시를 준 것이다. 사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CCTV의 영상을 잡은 몇몇 프레임들, 특히 CCTV에만, 즉 스크린 속의 스크린에만 잡히는 두 남자들이 함께 있는 프레임들로 카메라 뒤에 있는 그녀의 존재가 때때로 암시되기도 한다. 따라서 매기가 적절한 때를 포착하여 전화를 거는 개입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들의 게임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추측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게임의 여왕으로서의 그녀의 위협적인 존재를 마침내 그녀의 차가 두 남자의 차들 사이에 주차된 순간에 이르러서야 확실하게 발견하게 된다.

경찰의 도착이 아니라 부재한 매기의 귀가로 대체된 반전의 엔딩은 영화의 시작에서 앤드류가 던진 각색이 무엇인지를 아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각색영화 <추적> 자체가 제시한 답이라고 볼 수 있다. 기존 텍스트들에서 억압되어온 위협적인 매기의 존재를 드러내고 두 남자의 치열한 죽음의 게임이 일어나는 닫힌 공간의 열림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그녀의 귀가로 엔딩을 처리한 것은 다시-보기로서의 <추적>이 시도한 각색의 정치적, 특히 성정치적 의도를 확인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귀가를 알리는 벨소리의 음향기호의 반향은 새로운 게임의 시작을 예고한다.

 

 

글 출처 : 『해럴드 핀터의 영화 정치성』(도서출판 동인, 2016)에 실린 10장 「핀터의 엔드게임: <추적>」(249-270)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정하여 다시 쓰기를 한 글이다.

사진 출처 : ‘추적’, 《구글》, 2021.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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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문영
영화각색연구자, 계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각색과 전유 및 상호매체성과 문화 혼종성의 관점에서 각색영화, 특히 서구 텍스트를 각색한 한국각색영화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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