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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악마를 보았다에서 보아야 할 진짜 악마는?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악마를 보았다에서 보아야 할 진짜 악마는?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1.10.22 2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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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영화리뷰) '악마를 보았다'

 

최민식의 연기에 대해 흔히 메소드 연기라고 평하는데, <악마를 보았다>에 맞수로 등장한 이병헌 또한 메소드 연기로 유명하다. <악마를 보았다>에서 한국의 메소드 연기를 대표하는 두 배우가 맞짱을 뜬 셈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메소드 연기에 관한 한 존재감이나 관객에게 주는 효과 측면에서 적어도 한국에서 최민식을 능가할 배우는 없어 보인다는 게 일반적인 평이다.

 

좋은 배우가 되는 것의 곤혹스러움

 

메소드 연기를 하려면 흔히 영화 제작기간에 그 배역에 빠져 살게 된다. 최민식 또한 그러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예를 들어 <파이란>의 이강재 역을 맡았을 때 카메라 밖에서도 지질한 동네깡패처럼 살았다고 한다. 다만 메소드 연기가 배역에 따라 배우의 삶을 힘들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지적될 수 있다. 최민식은 <악마를 보았다>에서 사이코패스 살인마 장경철을 연기하며 배역의 삶에 몰입하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동네깡패에 몰입하는 것과 연쇄살인마에 몰입하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최민식은 <악마를 보았다> 촬영 이후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에 관하여 어느 인터뷰에서 털어놓았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살인마의 자도 다신 안하고 싶다며 손사래를 치며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서 어느 아저씨가 친근감을 표시하며 반말로 말을 건네자 이 새끼 왜 반말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 나에게 섬뜩함을 느꼈다.”

 

<악마를 보았다>의 병원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에서 최민식이 보여준 살인마 연기가 관객에게 캐릭터의 생생함을 주었지만 자신에겐 인격의 균열을 초래한, 일종의 직업병을 앓은 셈이다. 역대급 연기력과 최고의 필모그래피를 가진 최민식 같은 배우가 자기식으로 캐릭터를 소화하는 대신 캐릭터에 몰입하는 연기 방법론을 택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배우로서 최민식의 변신 폭이 한 마디로 광대역임을 방증하는 사례로도 볼 수 있다.

 

선과 악의 이분법 너머

 

영화 <악마를 보았다><올드보이>와 마찬가지로 극단적 상황에 내몰린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 복수라는 소재를 다룬 것도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외견상 선악의 대립구도를 취한다. 최민식이 연기한 장경철은 연쇄살인마이고, 이병헌이 연기한 김수현은 약혼녀를 살해당한 국정원 요원이다.

최민식은 절대악이다. 관객에게 일말의 연민을 남기지 않는, 말하자면 빈틈없이 완벽한 악한의 전형이다. 신이 악인을 창조한다면 대체로 장경철 급이지 않을까 싶다는 점에서 김지운 감독의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워낙 논란이 된 장면이 많아 개봉할 때 가위질을 많이 당했다. 영화에서 특히 문제가 된 미성년자 강간 장면은 정서적 거부감과 잔혹한 리얼리티 사이에서 반응이 엇갈렸다. 흥미로운 것은 극중에서 구현된 장경철의 의식구조로, 장경철은 미성년자 강간 장면에서 어떠한 죄의식을 노출하지 않은 채로 자신이 피해자를 좋아하면 안 되냐고 역정을 낸다. 장면의 논란과 별개로 장경철의 무결한 악인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대사이다. 사실 역대급 사이코패스가 미성년자라고 해서 강간 범행에 망설임을 느낀다면 더 어색하다. 문제는 예술형식으로 영화가 사회에서 작동할 때의 규범에 관한 것이지 리얼리티 문제와는 무관하다.

악은 폭력을 통해 실현된다. 따라서 장경철 같은 악인은 폭력의 존재로 표상된다. 이분법을 적용하자면 그렇다면 김수현은 폭력의 존재에 맞서 불가피하게 또 정당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모종의 존재인데, 영화에서 보듯 그렇다고 김수현을 비폭력의 존재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폭력의 동기를 빼고 말하면 두 사람 폭력의 수준은 막상막하이다.

 

복수가 오만에 오염될 때

 

극중 대사처럼 짐승을 잡자고 사람이 짐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지만, 김수현처럼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짐승인 것은 아니다. 짐승이 된 사람이다. 짐승과 달리 짐승이 된 사람은 그러므로 분열하고 고통받으며 존재를 위협받는다.

폭력의 존재는 오직 폭력에 의해서만 삶을 추동당한다. 폭력의 존재로 태어나지 않은 존재의 폭력은 그의 삶을 갉아먹는다.

물론 김수현의 폭력은 정당한 폭력이자 수긍할 만한 복수이다. 그러나 복수가 정의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오만에 오염되는 어느 순간 복수는 그저 폭력이 된다. 장경철과 달리 폭력의 존재로 태어나지 않은 김수현은 이제 폭력에 사로잡힌 존재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김수현과 장경철 사이의 구분은 사라진다고 말해야 하는가. 외양만으로 판단하여 누군가는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인간은 내면을 갖춘 거의 유일한 생명종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짐승과 짐승이 된 인간은 외양이 같다 하여도 내면이 다르다. 폭력으로 수렴된 선과 악의 대치에서 김수현으로 대표되는 선의 기획은 좌초한다. 여기서 좌초보다는 기획이 그래도 의미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악의 기획 같은 건 없다. 악은 악으로 말하자면 충분히 생동한다. 장경철을 연기한 최민식이 영화에서 보여준 대로다.

 

 

화제를 모은 마지막 살해 장면. 죽어서도 장경철이 고통스럽기를 바라며 김수현이 정교하게 고안한 참수형으로 폭력의 질주는 종지부를 찍는다. 장경철이 영화 말미에서 따진 두 사람 사이의 승패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수를 통한 마지막 반전에도 불구하고 폭력으론 당연히 장경철의 승리이다. 한데 두 사람 사이의 승부를 결정지을 때 폭력 말고 다른 기준이 있을까. 도덕이나 인간성 같은 잣대를 애초에 들이댈 수 없다면 장경철의 승리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폭력의 양 말고 질을 따져보면 어떨까. 장경철의 부모와 아들이 단두대를 작동시키는 인문학적 장치를 대신해 장경철과 흡사하게, 장경철 앞에서 그의 부모와 자식을 살해하는 영화의 구성상으로나 캐릭터상으로나 불가능한 시나리오이다. 또한 이미 언급한 대로 이 인문학적 장치를 통해서 결코 김수현의 도덕적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 결국 도덕의 ㄷ자도 떠올릴 수 없는 장()에서 시현된 이른바 인문학적 장치, 죽이는 방식 자체의 우월감이란 또 다른 폭력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김수현은 폭력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장경철을 압도하여 승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연유로 김수현은 다시 한번 패배한다. 그가 장경철에게 이기는 길은 복수였는데, 종국에 폭력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길을 걸으며 김수현이 오열하는 모습 외에 다른 엔딩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악은 승리한다. 악은 선에 맞서 이기는 것보다 선을 악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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